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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진] 비주류의 메시야

대학교회설교, 2001.3.11

성서본문
 
신명기 26:1-12, 마가 8:27-38

설교문

1. 주류 콤플렉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지난 2월 8일 서울 주재 일본특파원과 가진 간담회에서 이른바 '주류심판론'을 펼쳤다고 합니다. 그는 <마이니치 신문> 기자가 "2002년 대통령 선거에 대한 견해가 뭐냐"고 묻자,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합리적인 메인스트림(main stream)들이... 현 정권에 대해서는 확실한 심판을 해서 새로운 정권을 만들어 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주류라는 말은 본래 차별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용어입니다. '중심'이 있으려면 '주변'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류와 비주류라는 말을 즐겨 쓰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비주류에 대한 경멸과 함께 권력의 핵심에 서겠다는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데에 익숙합니다: 서울과 지방,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인문계와 실업계, 이른바 명문대와 비명문대, 공무원 사회의 고시파와 비고시파... 치열한 입시경쟁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교육열이라기보다는 주류 콤플렉스, 즉 주류 편입 욕구입니다. 이른 바 명문대 일류학과를 향한 교육열기는 사실상 진리탐구와는 상관없는 주류편입 욕구입니다.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중심세력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학자들은 대체로 사대주의적인 친미·친일파, 반공세력, 보수세력이라고 규정합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이러한 주류가 민주화세력으로 대체되는 변동이 있었지만, 아직도 사회전반에서는 민주화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에는 성공했으나 여전히 소수정권으로서 자민련과 공동정권을 꾸려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권의 개혁노선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주류론을 언급한 것은 바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반공세력, 개발독재세력을 거치면서 이어져 내려왔던 주류 정치세력의 기반에 근거하여 그는 주류 정치세력의 위치를 재탈환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부시가 미국의 역사를 보수적인 방향으로 되돌려 놓고 있듯이, 이 총재의 야망이 한국역사를 거꾸로 되돌려 놓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입니다.

2. 비주류의 하나님

오늘 우리가 경청한 히브리성서의 말씀은 히브리인들이 추수한 농산물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면서 그들의 역사에서 활동하신 야훼 하나님께 드리던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조상은 떠돌아다니던 아람사람이었다.
-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는데,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강제노동을 시켰다.
-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

이 신앙고백을 통해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조상이 떠돌이였고, 이집트에서 노예로서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조상이 근동지역의 역사 속에서 철저히 비주류에 속했으며 주류세력에 의해 고난받았음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노예신세에서 해방시켜 주신 야훼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받는 비주류의 해방자로서 찬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서의 말씀은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레위인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함께 살고 있는 외국인과 함께 나누며 즐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삼년마다 십일조를 드리되, "그것을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이, 너희가 사는 성 안에서 마음껏 먹게 하여라"(12절)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농산물을 수확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고난받는 비주류에 속했음을 기억함으로써, 수확물을 비주류의 삶을 살고 있는 동료인간들과 함께 나누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해야 하는 가나안 땅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은 바알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풍요의 신인 바알은 풍년을 보장함으로써 물질적인 축복을 내려준다고 여겨졌습니다. 바알신을 잘 섬기는 사람은 축복을 받아 풍요롭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가난한 삶을 살수밖에 없다고 간주되었습니다. 바알 숭배는 결국 현실적인 빈부격차를 신의 이름으로 재가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수확한 농산물은 그것을 수확한 개인에게 내린 신의 축복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바알신은 경제적인 주류들을 보호하는 수호신이었던 것입니다. 바알신 숭배자들의 추수감사절은 개인의 부를 축적하는 데에 대한 자기충족적인 축제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농산물의 수확을 출애굽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고백합니다. 따라서 그 농산물은 개인의 물질적인 풍요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농산물은 개인을 경제적 주류에 편입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철저한 비주류 인식과 동시에 비주류의 인간들과 연대하는 삶의 실천이 히브리적 신앙전승의 토대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히브리인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권세잡은 자들과 부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노예들과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3. 비주류의 메시야

우리가 두 번째로 경청한 말씀은 빌립보의 가이샤랴에서 행해졌던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빌립보의 가이사랴는 요단강의 수원지인 헤르몬산 기슭에 있는 도시로서, 로마황제 디벨리우스 황제('가이사')를 기념하여 '가이사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이방과 유다의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으므로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장 먼 도시에 속했습니다. 이곳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한 고난의 '길'을 떠나기 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제자들이 동료 유대인들의 여론을 전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같은 예언자라고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일반 군중의 여론보다는 제자들의 생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은 일반인들의 여론에 따라 좌우되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분명하고 특별한 인식과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해 자신의 대답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특별한 확신을 담고 있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한 예언자가 아니라, 선생님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야 자신이십니다! 이 고백에서 일반대중과 제자들이 구분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대해 남들이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 이 고백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세운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백을 떠나서는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은 예수께서 이러한 고백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는 점입니다. 아무에게도 예수님을 메시야로서 홍보하지 말도록 당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생각과 대립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선교활동을 위해서도 홍보에 많은 투자를 합니다. 부흥회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으레 강사가 얼마나 말씀선포와 치유에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대대적으로 광고합니다. 마치 메시야라도 나타난 것처럼 홍보에 열을 올립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한 홍보를 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길과는 달랐습니다!

만일 유대민중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야라고 홍보를 했다면 더 많은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메시야로서의 과업을 성취하는 데에 힘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PR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길의 끝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세력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 의해 배척을 받아 살해되어 결국 역사에서 추방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영광과 승리를 얻는 대신에 고난과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메시야라고 고백한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마태복음 16:22은 예수께 간청하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누가복음 9:22 이하에서는 이 장면을 아예 삭제하고 있다. 이 장면은 수제자인 베드로의 이미지를 파괴할 수 있으므로 이 장면을 보도한다는 것은 거리낌이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이 항의는 그가 이해한 메시야의 모습과 예수께서 이해하신 메시야의 모습이 서로 대립되는 데에 대한 실망과 절망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기존의 지배세력을 뒤엎고 새로운 지배세력의 핵심으로 떠오를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메시야인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 그에게는 주류에 편입하게 되는 것을 보장받는 길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는 베드로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10:35이하의 보도에 따르면,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오른 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이러한 요청을 듣고 분개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서로 출세할 꿈에 젖어 있었으므로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거듭되는 고난예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류에 편입될 환상과 기대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항의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단호한 어조로 꾸짖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33) 자신에 대해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바로 '그' 제자를 향해 예수께서는 '사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바로 그 제자가 지금 사탄, 곧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예수께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도록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혹은 늘 달콤한 말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제자는 지금 마치 메시야인 선생님을 보호하려는 듯이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항의'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그처럼 분노했을까요? 베드로가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비주류의 구원자이시며 보호자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일을 위해 메시야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길은 비주류의 길이 될 수밖에 없고,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만 비주류를 위한 메시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류세력에 편입되려는 욕망으로 메시야를 이용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환상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고난은 예루살렘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제자들에 의해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그 순간에 이미 예수께서는 고난의 길 위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낯선 사람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때보다는 가까운 사람들과, 그것도 가장 가깝다고 여기는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들과 대화가 되지 않을 때 더 큰 외로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를 메시야로 고백한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꾸짖으면서 얼마나 깊은 고독에 사로잡혔을까요?

예수께서는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추호의 헛된 환상도 지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34절) 제자의 길은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의 연장선상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걸어간 길과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는 길을 걷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 곧 메시야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주류세력으로 편입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권세를 장악한 주류세력에 의해 배척받는 비주류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곧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여 흔히 자기자신에 대한 무관심이나 자기학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전후 문맥을 고려할 때,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주류에 편입되기를 갈망하는 자기중심적 욕구를 포기하라는 요청으로 이해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4.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

교회역사에서는 고난받는 메시야의 길이 승리자의 길로 쉽게 변조되곤 했습니다. 부활절 이전에 고난절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주 잊혀지곤 했습니다. 아니, 고난절 절기가 지켜지기는 했지만, 고난절 행사들은 부활절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이 너무나 쉽게 간과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너무나 자주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찬양 속에 묻혀지곤 했습니다. 비주류의 메시야는 너무나 자주 주류편입을 보장하는 수호신으로 선전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상징은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 이 고난절기에 얼마나 많은 교회들과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진지하게 따르려 노력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로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제자들의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가장 큰 유혹은 십자가에 달린 분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대해 항거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제자로서 그의 존재는 위기에 봉착합니다. 그는 지금 제자로서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것인지 아닌지를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다. 입술로만 하는 신앙고백이 그를 제자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 신앙고백은 십자가를 지는 행동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의 신앙과 예수의 삶에, 따라서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고난받는 메시야의 모습은 찬란한 영광가운데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었던 구원자의 모습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난받는 메시야상은 불쾌하고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에게 불쾌한 것이고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받는 메시야의 모습, 예수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은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보존되어야 하는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화려한 옷을 입고 거창한 권세를 가지고 세상의 환호와 갈채를 받으면서 그의 통치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굿간 말 구유에서 태어나 박해받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마침내 주류들에 의해 십자가에 추방되는 철저한 비주류의 모습으로 겸손한 통치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는 비주류의 메시야로서 그를 따르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교회들은 예수의 수난사를 슬그머니 승리자의 역사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서양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예수님은 살찐 제왕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예수님을 살찐 제왕으로 묘사하는 그림에는 베드로의 메시야상이 숨어있습니다. 또한 그 메시야를 따라 주류에 편입되려는 인간의 욕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하나님의 일과 예수의 길에 저항하는 배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의 권세, 내 권세"라고 노래하는 교인들의 모습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값싸게 축복을 세일즈하는 부흥사들의 모습에도, 거대하고 휘황찬란한 예배당을 건축하는 목회자들의 가슴 속에도 그러한 배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베드로의 항거는 그의 기대와 환상이 깨어지는 당혹감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 자칭 경건한 신앙인들이 입으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베드로와 같은 소망을 지니고 있으므로, 실제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은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지만,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합니다. 미국에서 하나님은 미국의 국가이익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부흥사들은 주류에 편입되기 위해 예수를 믿으라고 선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만 하면 "불가능은 없다"고 장담합니다.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들도 독재정권과 결탁하여 반공노선에 앞장섰습니다. 한국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은 보수주의를 자랑함으로써 현실을 지배하는 주류에 편입되려 시도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 역시 주류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주류론의 발설자인 이 총재 자신도 카톨릭 신자라고 합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하나님은 어느 새 주류의 수호신으로 되어버렸고,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새 주류를 위한 메시야를 따라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항변을 변호하려 들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예수님의 꾸짖음을 약화시키려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차라리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도 베드로처럼 예수께 항거하는 것이 더 정직한지도 모릅니다. 공개적으로 예수께 항거하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꾸짖음 앞에서 자신을 돌이켜볼 기회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십자가를 높이 세워놓고도 승리의 메시야만 선전하는 교회들, 그리고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예수의 '공로'로 온갖 축복과 영광을 독차지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의 당혹감에 참여할 기회마저 상실하였으므로, 예수님의 꾸짖음 앞에서 회개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헛된 기대와 환상의 늪에 빠져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함으로써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우리의 교회들을 책망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날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배척받을 위기 한복판에 있습니다. 에수님의 고난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길에 참여하라! - 바로 이 요청이 고난절을 지키는 우리들 모두가 경청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거대하고 휘황찬란한 교회당을 지어놓았다고 해도, 아무리 유명한 목회자가 되었다고 해도, 아무리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이 요청을 거부하거나 간과한다면 예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참된 신앙고백은 고난을 포함해야 하며, 고난받는 비주류에 대한 연대와 참여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절기가 우리를 주류 콤플렉스에서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함께 참여하는 축복의 계절이 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비주류의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계절이 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숱한 사람들을 고난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주류들의 범죄가 드러나고, 그들의 횡포가 종말을 고하게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계절이 되기를 빕니다. 우리들의 새로운 삶에서 우러나는 찬양과 기도로 우리의 교회들이 그리고 우리의 사회가 새롭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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