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 어버이주일 설교, 2001.5.13
성서본문
호세아 11:1-4, 8-9, 누가 15:11-32
설교문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의 희생과 사랑을 기린다는 것은 뜻깊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정파괴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진심으로 어버이의 희생과 사랑을 찬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버이다운 삶을 살고 있는 어버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동시에 자식다운 자식도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다운 삶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삶이 자식을 위한 희생과 사랑의 삶일까요? 우리는 모든 인류의 어버이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헤아려 봄으로써, 우리가 어버이로서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어버이의 사랑을 기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2. 어머니 하나님의 마음
오늘 우리가 경청한 호세아서의 말씀은 아마도 히브리성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아름답고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성서의 어느 부분도 하나님의 사랑이 지닌 따뜻함과 강함을 이처럼 인상적으로 묘사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여리디 여린 모성애를 지닌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버이로 묘사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1-4절은 하나님의 애정어린 돌봄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가 광야 시대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그 후에도 이스라엘 역사 한가운데에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자주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이렇게 회고하십니다: "내가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2)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짝사랑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식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자식이 지치면 팔로 감싸주는 인자한 어버이처럼 그의 백성에게 사랑을 베풀고 보호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파멸의 위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해주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정하게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고 하나님을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사랑이 거부당했음을 확인하면서 슬픔에 잠기십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습니다(4). 여기에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모성애'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5-7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받게 된 형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자청하던 자들, 즉 이집트와 아시리아는 이제 이스라엘에 대한 억압자로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전쟁에 휘말려 파괴될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정책의 탓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들이 바알을 불러 호소하지만, 우상은 그들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에는 스스로의 죄로 인하여 파멸하고 말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은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을 겪는 어버이처럼 괴로워하십니다: "내가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8)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과 생명력을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에 굴복하고 맙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9)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신에 대한 보복을 포기하기로 결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심판도 포기하기로 결단하십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은 사랑과 은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9)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은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이점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은 인간적인 방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것,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언자 호세아가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불행했던 결혼생활에서 그가 겪었던 고통스런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깨달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겪은 고난의 체험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하여 오늘날 인류의 어버이로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온 인류는 하나님의 한 가족인 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오도록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초청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버이 하나님은 인간 어버이들에게 참된 어버이의 길이 무엇인지도 계시하고 계십니다.
3.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
우리가 경청한 신약성서의 말씀은 이른 바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어버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이 비유는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삶을 살던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당시에 발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을 교육의 자료로 활용하시곤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보통 18-20세에 결혼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작은 아들이 아직 미혼이라는 암시로 보아서 아마도 17세 안팎이었으리라고 추측됩니다. 요즘의 고등학생 정도 나이의 청소년이었던 셈입니다. 이 작은 아들은 부모에게 무조건 저항하고 제 고집대로 살려고 투쟁하는 사춘기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직 결혼할 정도로 성숙하지 않았으므로, 아직 경제적 독립을 이룰 시기가 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그가 물려받을 재산의 몫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간청에 못이겨 그의 재산을 아들에게 나누어주고 맙니다.
(구약의 법에 의하면 아버지가 죽을 경우, 큰아들은 작은 아들에 비해 곱절로 유산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의 3분의 1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가 생존해 있으므로 둘째 아들이 받을 몫은 훨씬 적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아마도 9분의 1정도의 재산을 물려받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작은 아들에게 재산이 상속되었다면, 큰아들에게도 그런 재산 양도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아마 나머지 재산은 거의 다 큰아들의 몫으로 되었을 것입니다. )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 독립합니다. 그래도 그는 물려받은 재산을 적어도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할 도덕적 의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가 평생 땀흘려 마련하였던 그 재물을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낭비하고 말았습니다. 가뭄으로 불경기가 찾아오게 되자 그는 몹시 궁핍하여 일용할 양식마저 조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허비한 후에야 비로소 인생의 실체를 깨닫게 됩니다.
결국 그는 돼지를 치는 농장에 취업하여 연명하려 시도합니다. 아마 그는 지금 이스라엘이 아닌 외국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했으므로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물론이고 돼지를 기르는 것도 금기사항이었기 때문입니다. 돼지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유대인들에게는 더러운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둘째 아들이 돼지에게 먹이를 주는 노동자로 전락했다는 것은 천해질 대로 천해져서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져버렸음을 암시합니다. 더구나 돼지와 함께 먹이를 나누어 먹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삶이 이미 사람다운 삶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돼지의 먹이로 단지 배를 채워야 하는 또 다른 짐승으로 연명할 뿐이었습니다.
바로 인간이하의 삶을 살수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에 떨어졌을 그 때, 작은 아들은 비로소 그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그 때에 그는 "제정신이 들어"(= 회개하여) 아버지 집에 있는 품꾼들의 처지를 부러워하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바르게 살지 못했으므로 더 이상 아들로서의 자격이나 어떤 요구사항을 제시할 처지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품꾼으로 써주기를 간청할 생각으로 집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그가 아직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하는데, 그는 길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 생각에 늘 그처럼 먼 길을 걸어 나와 아들을 기다리곤 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 아들의 입에서 회개의 말이나 용서를 간청하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아니, 아들이 아버지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20). 아버지의 이런 행위는 용서의 상징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를 아들로 맞이했던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자비심' 때문에 아버지는 먼저 주도적으로, 끊어진 인간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아들은 마음먹었던 말을 꺼냅니다. 아마도 터벅터벅 걸어오면서 수백 번도 더 연습했을 그 말을 아들은 조심스레 꺼냅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21) 그는 이제 그를 아버지의 품꾼으로 고용해달라는 말을 힘겹게 꺼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그 간청을 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가로채어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어서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22-23)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가 재산을 어떻게 탕진했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아들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 따지지도 않습니다. 앞으로의 각오를 말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힌다는 것은 이미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반지를 손에 끼운다는 것은 그에게 주인의 아들로서 권위를 회복시켜 줌을 의미합니다. 신을 신겨준다는 것은 아들을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인정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아버지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의 귀환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태도에는 인간을 향해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통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아버지의 집을 향해 돌아오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범적이고 근면 성실한 큰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기다리거나 마중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늘 규칙적으로 귀가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염려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는 효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그는 잔치소리를 듣고 종에게 영문을 묻습니다. 종은 그에게 객관적인 사실보도를 합니다. 그는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큰아들이 가출하게 될 판입니다. 그러자 다시 한번 아버지가 주도권을 잡습니다. 아버지가 달려나와 큰아들을 달랩니다. 그렇지만 큰아들은 아버지를 향해 원망을 퍼붓습니다.
그는 여러 해를 아버지를 모셨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둘째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큰아들의 분노는 당연한 것입니다. 아니, 그는 분노를 넘어서 비애와 배신감마저 느꼈을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편애에 대해 적개심을 지녔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돌아온 동생을 동생으로서 맞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작은 아들을 자신의 '동생'이라 부르지 않고 경멸조로 '당신의 아들'(30, 표준새번역 성서에는 '이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그는 생전처음으로 아버지께 그렇게 대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잔칫집 바깥에서 그는 그렇게 눈물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항의하는 큰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31-32)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아버지와 더불어 살고 있는 삶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환기시킵니다. 그리고 불평하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어주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큰아들 자신이 아버지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잔치하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동적이며 비주체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니라 주체적인 존재로서 이 상황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돌아온 작은 아들이 그의 '아우'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요청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초청에 참여했을까요? 아니면 잔치가 끝날 때까지 집밖에서 서성이며 여전히 울분을 터트리고 말았을까요? 아니면 이젠 큰아들이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갔을까요?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계속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니, 그것은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우리 자신이 지금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하도록 초대받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결단할 것인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왜 어머니 대신에 아버지가 등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상식적으로 알려진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없습니다.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의 태도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도덕과 질서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저항하는 큰아들의 항변은 도덕적이며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큰아들의 도덕보다 더 거룩합니다.
우리는 이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이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요? 도덕과 권위를 앞세우면서 큰아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식의 허물을 덮어주고 새로운 출발을 하도록 격려하면서 잔치를 베풀기보다는, 과거의 행적을 문제삼으면서 잔칫상을 뒤엎고 있지는 않는가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지만, 종종 율법의 종교로 타락하여 사실상 저 큰아들처럼 행동했고,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기보다는 잔칫상을 뒤엎는 역할을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마녀사냥, 이단처형, 그리고 아우쉬비츠에서의 유대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4. 어버이 사랑의 실천을 위해
어버이로서 살아가면서, 특히 반항하는 사춘기 청소년들의 어버이로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곁길로 가는 자식들 때문에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슬퍼하지만, 때로는 아예 부모 자식간의 의를 끊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식에 대한 정을 버릴 수 없어 괴로워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아무리 선한 부모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의 모습을 어버이의 모습으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더 큰사랑과 더 넓은 아량으로 자녀들을 대하려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도 어버이들의 자식들이었고, 우리들 자신도 어린 시절에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자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질풍노도의 시대인 사춘기를 통과할 때, 우리의 어버이들의 가슴은 얼마나 미어졌던가요? 그래도 우리는 그 시절에는 부모의 마음과 사랑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들의 은혜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은 우리들 자신이 부모가 되고 난 후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아직 어버이의 마음과 사랑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해서 가슴아파할 일은 아닙니다. 그들도 때가 되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어버이들의 마음과 사랑을 미리 헤아리지 못했음을 가슴아파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자녀들을 대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에 부모의 사랑을 미화하고 의례적인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버이 주일을, 인류의 어버이이신 하나님의 따뜻한 마음을 배우는 기회로, 그리고 배은망덕한 인간을 향해서도 용서와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본받으려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1년후 어버이 주일에는 진정으로 어버이의 사랑과 희생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어버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