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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진] 일어나 걸으시오!

윤응진·한신대 기독교교육학 교수

대학교회 설교, 2001.6.10

성서본문

이사야 42:1-4, 사도행전 3:1-10

설교문

들어가는 말:

기독교교육과 학생들은 4학년이 되면 교육실습을 받게 됩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교육실습을 했던 학생들이 그들의 경험담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들은 경기도 소도시의 한 학교에서 실습을 하였는데, 학교 분위기가 영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우수한 학생들은 대도시로 유학을 떠나기 때문에, 그 지역에 남아 있는 학생들이란 대부분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라고 합니다.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 대부분은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이라고 합니다. 그 학생들을 대하는 학교 선생님들은 이미 학생들에게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는 것입니다. 선생님들로부터 버림받은 채 '교육'받는 학생들이 제대로 교육될 리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학생들이 스스로를 포기하다보니, 불량 청소년이 되기는 쉬운 일입니다.

실습나간 학생들은 이런 현실이 마음 아팠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실습생들이 머무는 사무실에 화분이 하나 있었는데 심겨진 나무는 돌보는 이가 없어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실습나간 학생들은 그 나무를 살리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고 합니다. 그런 실습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학교 선생님들은 포기하라고 충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가던 나무는 마침내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생님들이 실습생들로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법을 실습하게 된 셈이지요. 다른 한편, 실습생들이 관심과 사랑으로 대해주니까 학생들의 모습들도 생기를 되찾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나무도 사랑으로 돌보면 생기를 되찾는데, 인간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가능성이 없다고 방치된 학생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 생기를 부어주고 온 실습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그 곳에 부활의 기적이 발생하였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의 종'의 노래

오늘 우리가 경청한 첫 번째 말씀은 일명 '하나님의 종'의 노래(49:1-6, 50:4-11, 52:13- 53:12) 시리즈 중의 첫 번 째 노래입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경청한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대신 집행할 지도자를 임명하는 임명식에서 선포된 말씀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선택한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종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 종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그의 임무는 민족들 가운데 '공의'를 세우는 것입니다.(1) 공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세계를 위해 새로 세우신 법질서를 의미합니다. 이 법질서는 일반적으로 강한 자들과 부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세속법과 반대여서, 힘없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의 통치방식은 세속적인 폭군들의 통치방식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1) 우선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큰 소리를 치거나 목소리를 높여 수선스럽게 하지 않습니다(2). 사람들은 흔히 어떤 직책을 맡으면 그 직책이 지닌 권세에 도취되어 평소보다 더 목청을 높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서 사람을 버리게 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소란을 떨지 않으면서, 수선을 떨지 않으면서 그가 맡은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나갈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종은 몰락해 가는 것조차 멸절시키지 않습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습니다.(3a,b) 지배자들은 흔히 강한 자들에게 약하고 약자들에게 강합니다. 지배자들은 약육강식의 경쟁논리를 동원하여 사람들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죽어 가는 갈대도, 꺼져 가는 등불도 보호하고 보존하려 노력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3c)입니다.

3) 하나님의 종은 스스로 소멸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 낙담하지 않으며, /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4a)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이러한 특이한 임무 때문에 극심한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 땅위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울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4)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입니다(7). 즉 그는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그는 이 땅 위에 정의를 이룩함으로써 평화를 수립할 것입니다.
강대국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바로 자신들을 상한 갈대처럼, 꺼져가는 등불처럼 여겼습니다. 바빌론 사람들은 그들을 조롱하고 멸시하였고, 파멸시키려 했습니다. 그 때에 유대인들은 그들을 해방시켜 줄 '하나님의 종' 메시야를 갈망했습니다.

마태 12:18-21에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 예언된 '하나님의 종'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실로 예수님이야말로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려는 사랑으로 인간세계를 지배하려 하셨습니다. 그분은 소란스럽게 그분의 직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드러나지 않게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서 그리고 반란을 획책한 정치범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했습니다. 그는 이제 소멸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살해당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해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감으로써 주님의 사역을 완성시키려 합니다. 예언의 말씀처럼, "그는 쇠하지 않으며, / 낙담하지 않으며, /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입니다.

2.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두 번째로 경청한 말씀은 '예수의 이름'이 일으킨 기적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후 3시경,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교의 관습에 따라 오후 기도에 참가하기 위해 성전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오후 기도는 성전에서 저녁 희생제사 때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성전 문 곁에는 선천성 장애인인 앉은뱅이가 앉아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걸을 수가 없는 장애인입니다. 따라서 그는 주체적인 존재로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전 문 곁에 앉아 있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능했습니다. 그가 앉아 있는 성전문은 고린도 지방에서 수입한 구리로 만들어 휘황찬란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문을 '아름다운 문'이라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앉은뱅이는 그들을 향해 구걸을 합니다. '아름다운 문' 곁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 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앉은뱅이에게 휘황찬란한 성전은 무엇인가요? 아름다운 문은 지금 인간을 두 부류로, 즉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인간들과 성전 밖에 머무는 인간들로 나누고 있습니다. 성전은 앉은뱅이에게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앉은뱅이도 성전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성전을 향하는 사람들에게 앉은뱅이는 단지 자선을 베풀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순례자들은 단지 구걸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전문은 인간과 현실을 둘로 나누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눈여겨" 바라봅니다.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쳐다봅니다. 앉은뱅이는 그를 소외시킨 세상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 자신이 세상을 버립니다. 그는 지나가는 인간들을 단지 구걸의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그는 인간을 단지 물질적 욕구를 채워줄 대상으로만 간주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관심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는 앉은뱅이 자신에게 관심 합니다. 베드로는 전혀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 사람을 소중한 존재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대합니다. 그는 앉은뱅이의 욕구를 채워줄 물질을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앉은뱅이를 실망시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를 실망시킨 바로 그 베드로가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3:6)!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는 맹세를 한다든가 치유행위를 할 때 기적의 능력을 지닌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자명한 사실로 통하였습니다.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인물에게 우연히 주어진 칭호가 아니라 그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 안에는 그의 능력이 임재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께 병자의 치유를 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치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영광스러운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에 처형당한 사형수의 이름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바로 그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걸인의 손을 잡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그는 감격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순례자들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4:22에 의하면 40이 넘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제 그의 두 다리로 우뚝 서서 걷고 뛸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그가 마침내 그 높은 성전 문을 뛰어 넘을 수 있었다는 것도 기적입니다. 성전 문 밖에 놓여지도록 운명지어진 존재가 성전 안으로 뛰어 들었다는 것은 기존의 성전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전 문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폐쇄공간이던 성전은 이제 열린 공간으로 변화됩니다. 성전을 특수 공간으로 유지함으로써 특권을 누리던 종교귀족들의 설자리가 사라지게 됩니다.

더구나 이 일이 사형수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형된 예수의 이름이 죽어 가는 생명을 소생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예수를 처형한 종교귀족들의 판단과 조처는 철저히 잘못된 것임이 폭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그리스도를 살해한 범죄자들로서 심판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역시 큰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걸어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크게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습니다(10).

모여든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이 기적이 사도들의 권능과 경건 덕택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12), 부활한 예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부활한 예수는 생명의 주님이시며, 바로 그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치유되었다고 베드로는 증언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증언에 대해 종교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여 끌고 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귀족들 앞에 끌려나가 심문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4:12) 대제사장과 그의 무리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합니다(18). 예루살렘의 종교귀족들은 이제 그들이 처형한 예수의 '이름'에 대해 두려움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4:19-20)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생명공동체 운동을 막아보려 시도하였지만 허사였습니다.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명공동체 운동은 불길 번지듯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함께 모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초대교회 신앙인들은 사도들과 교회를 보호해주시기를 간구하는 대신에, 계속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4:29).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적이 계속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성장이나 발전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물질적 풍요나 권세획득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말씀을 대담하게 증언할 수 있기를, 그리고 새로 시작된 생명공동체 운동, 즉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 확산되기만을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오순절 사건 이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입니다. 오순절 사건은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제 처형당한 예수의 이름이 죽어 가는 생명들을 소생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3. 일어나 걸으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첫 번째 기적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이었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초대교회 선교의 목표와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선다는 것은 단지 두 다리의 신체적 기능이 회복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의식과 인식, 아니 삶 전체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운명처럼 주어진 자리에서 역사의 객체로서 살아가던 존재가 운명을 박차고 일어서서 역사의 주체로서 살아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연명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던 존재가 어깨를 펴고 우뚝 서서 존재의 의미를 추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창조하기 위하여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육체적 죽음이전에 이미 현실을 지배하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던 삶을 청산하고 새롭게 부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땅을 기어다니며 먹이만을 찾는 짐승이 아니라, 두 다리를 지구 위에 버티고 서서 머리를 하늘에 심고 멀리 역사와 미래를 바라보며 직립보행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음식물 때문이든 지배자의 폭력적 강압에 의해서든 고개를 숙인 채 동물적인 삶을 이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우리가 앉은뱅이처럼 살아가도록 강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상한 갈대도 꺽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 사랑의 화신이었습니다. 이제 그분의 영인 성령께서는 보잘 것 없는 존재를 하나님의 나라 시민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지배자들만이 아니라 종교마저 포기한 존재를, 성전 문밖에 버려져 있는 존재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하여 그의 입을 통해 진정한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합니다. 그의 삶의 방향전환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 역사가 전개되게 하십니다.

모든 앉은뱅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 - 이것은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세상을 갈망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일입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 초대교회는 그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투쟁했습니다. 종교귀족들과 정치지배자들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모든 앉은뱅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이 인간해방 운동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새 생명운동에 참여하는 신앙인들의 모임으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 우리들은, 앉은뱅이를 외면한 채 성전만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재촉하던 순례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찾게 되지는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그 앉은뱅이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매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전 문밖에 주저앉아 있는 저 앉은뱅이의 모습이 행여나 우리들 자신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앉은뱅이 신세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미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무엇이 우리를 앉은뱅이처럼 살아가도록 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죽음의 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사슬들을 깨뜨리고 다시 일어서십시오! 두발로 일어서서 삶의 기쁨과 감사로부터 우러나오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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