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1.7.8
성서본문
아모스 5:10-15, 21-24, 마태 7:15-20
설교문
1. 들어가는 말
오랫동안 가뭄으로 고통받던 대지에 흠뻑 비가 내렸습니다. 이번 장맛비는 오랜 가뭄 끝에 내린 것이어서 반가운 단비였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이런 단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스라엘 여행을 다녀온 뒤로는 늘, 우리가 얼마나 큰 자연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감격하곤 합니다. 제가 이스라엘을 여행한 때는 6월 초였는데, 여행하는 2주 동안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2주만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름 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 팔레스타인 땅입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면, 대체 한국이 누리고 있는 자연의 혜택은 어떻게 묘사하여야 할까 스스로에게 되묻곤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텔 아비브 공항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에는 푸른 나무들이 꿋꿋이 자라고 있었고, 곳곳에 물이 나오는 음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열악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연으로부터 큰 혜택을 누리다보니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지혜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물입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두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여행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자주 묻는 말은, "아이에게 줄 물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식수가 바로 생명수라는 것이 실감이 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로 우물을 차지하기 위해 투쟁한 것이 얼마나 치열한 생존투쟁이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오랜 소망 가운데 하나는 풍족한 수자원을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강물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흐르게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강물은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는 젖 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또 다른 강물을 꿈꾼 한 예언자를 만납니다. 그는 공의가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르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강물이 필요하듯이, 한 사회, 한 국가가 건강하게 존속되기 위해서는 법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가뭄 끝에 단비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렇게, 법과 정의를 갈망했습니다. 비는 인간의 뜻대로 내리게 하거나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법과 정의는 인간의 뜻대로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법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왜 그처럼 간절히 법과 정의를 갈망했고, 또 왜 그처럼 법과 정의를 요청한 것일까요?
2. 법과 정의에 대한 갈망과 요청
법과 정의를 요청한 이 예언자는 지금부터 약 2800년 전에 살았던 아모스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는 남왕국인 유다 출신으로서 양을 치고 뽕나무를 가꾸던 농민이었습니다. 그는 직업적인 훈련을 받은 종교지도자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활동을 하였습니다. 당시 북왕국은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한창 번영하던 때였습니다. 그는 배부르고 자신감 넘치던 이스라엘 왕국의 한복판에 나타나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강대국 앗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 왕국은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 왕국의 번영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어용 종교지도자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가 심판을 선언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에는 사회정의가 사라지고 불법과 불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모스는 당시의 지배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공의를 쓰디쓴 소태처럼 만들며, 정의를 땅바닥에 팽개치는 자들이다."(5:7) 그는 5:10-13에서 정의를 짓밟은 지배자들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법정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말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신중한 사람들이/ 이런 때에 입을 다문다./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13절)//
너희가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그들에게서 곡물세를 착취하니,/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거기에서 살지는 못한다./ 너희가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는 못한다.//
... 너희는 의로운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법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였다."
번영을 구가하던 당시의 이스라엘 왕국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모스의 눈에는 지배자들의 부정의와 부패로 인해 패망을 앞둔 사회로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하게 살면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를 도울 것이다'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러한 착각을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아모스는 그들의 환상을 깨뜨리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아라."(14)
회개하지 않은 채 성전 순례에 참여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4-6절) 살기 위해서는 '선'을 구해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과 교훈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위해 필요한 결정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모스는,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할 때에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14b)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행이 하나님의 자비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행여 ...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실지 모르니,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법정에서 올바르게 재판하여라."(15) 여기에서 '선'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것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16-20절에는 심판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주의 날'('야훼의 날', 18)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적대자들에게 파멸을 안겨주는 날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 날을 이스라엘 자체에 대한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6:4-7은 지배자들의 사치와 향락이 파멸로 끝날 것임을 경고합니다:
"너희는 망한다!
상아 침상에 누우며/ 안락의자에서 기지개를 켜며/ 양 떼에서 골라잡은 어린 양 요리를 먹고/ 우리에서 송아지를 골라 잡아먹는 자들,/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서/ 헛된 노래를 흥얼대며,/ 다윗이나 된 것처럼/ 악기들을 만들어 내는 자들,/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의 집이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는 자들,/
이제는 그들이/ 그 맨 먼저 사로잡혀서 끌려갈 것이다./ 마음껏 흥청대던 잔치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
형식적인 종교행사들이 이스라엘을 파멸로부터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5:21-23) 당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 행사들은 일상생활과 아무 관련이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종교생활의 영역과 일상생활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 곧 정의는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가 행복과 번영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라고 오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상적인 삶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살았고, 제사와 절기행사에서만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종교적 절기행사들이 '역겹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환심을 사려는 각종 제물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십니다. 하나님께는 불의한 자들이 부르는 찬양의 노래는 '시끄러운' 잡음으로 간주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명백백하게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24) 이제 이스라엘의 신앙인들은 이 말씀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모스의 예언이 있은 지 약 30여 년 후에 하나님의 심판은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번영하던 왕국이 강대국 앗시리아에 의해 파멸되었고, 주민들은 이스라엘 영토로부터 추방되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북왕국의 영토에는 이방인들이 이주해 왔고, 이방인들의 혼혈민족인 사마리아인들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의롭지 않은 나라는 패망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우리는 다른 나라들의 역사에서도 수없이 확인하게 됩니다.
3.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마태 7:15-20은 거짓 예언자를 경계하도록 경고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탈을 쓰고 있으나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거짓 예언자 판별법을 알려주십니다. 그들의 열매로, 즉 그들의 행위의 결과를 통해 그들을 판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17) 이 경고는 불신자들과 불경건한 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경건한 그리스도인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종교지도자들을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신앙인,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지 못하는 신앙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양의 탈을 쓴 이리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허울뿐인 신앙인 혹은 신앙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 마음 속에는 탐욕이 가득해서 이웃을 해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참된 예언자로서 사셨습니다. 아모스의 말처럼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법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하기 위해 가르치고 투쟁하고 고난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투쟁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예언자들, 곧 거짓 종교지도자들이 설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이루기 위해 투쟁하고 고난받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짓밟는 자들을 축복하면서 함께 정의를 짓밟습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탐욕과 힘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인터넷을 통해 몇 권의 책을 구입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한용상이 쓴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해누리, 2001)는 충격적인 제목을 지닌 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CBS기자를 역임했던 한용상은 그의 책에서 언론인으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을 '도둑공화국'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그는 정치의 부패와 교회의 타락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의 에세이의 마지막 장은 "정의가 서야 나라가 선다"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부패한 세상, 부정과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 힘있는 자들의 탐욕이 지배하므로 형성된 도둑공화국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강같이 흘러야 한다."(266)
그러므로 그는, 한국 사회를 구원하기 위한 교회의 사명은 정의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이런 사명을 다하려면 먼저 철저한 회개를 통해 교회의 과거청산을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기보다는 부정의와 부패의 장본인들을 지원하였으며, 자체유지를 위해 스스로가 부정의한 종교집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그의 책을 읽으며, 제가 쓰고 싶던 글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 땅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아모스처럼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의를 위해 투쟁하지 않는 교회,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 신앙인은 아모스의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정의를 외면한 교회와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정의를 실천하도록 촉구하기보다는 헌금만을 강요하는 목회자들, 스스로가 정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실천하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들은 '거짓예언자'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명제는 타당한 것입니다. 정의를 위해 일하지 않는 교회들은 사라져야 합니다. 거짓예언자들로 인한 복음의 왜곡은 이제 중단되어야 합니다. 정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교회들, 그런 교회들의 지도자들은 심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19) 주님의 경고입니다.
4. 맺는 말
요즘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가 발표됨으로써 한국 사회가 얼마나 구조적으로 부패했는지 다시 한번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국세청이 발표한 일부 신문사와 언론사사주들의 세금탈루 규모와 수법은 놀랍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서민들이 무거운 세금에 허덕일 때,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해야 할 언론사들은 막대한 액수의 세금을 포탈하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또 다시 허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국세청은 조선, 동아, 국민일보사 등 언론사 법인과 사주를 조세범처벌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하였으며, 막대한 세금을 추징하기로 하였습니다. 법을 어겼으면 고발되어 처벌받아야 하고, 세금을 포탈했으면 추징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무조사 결과에 대한 해당 언론사들의 보도태도는 더욱 우리를 분노하게 합니다. 언론사들은 이러한 불법과 탈법이 관행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에 아부하고 역대 군사독재 체제의 시녀노릇을 하던 신문들이 갑자기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합니다. 독재체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던 어느 신문이 스스로를 '할 말은 하는 신문'이라고 광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열매를 통해 양의 탈을 쓴 이리떼들의 정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87.8%가 "탈세 언론사는 국민에게 사과하고 추징금을 조속히 납부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으로 간주하고 추징금을 납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응답자의 5.2%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당은 공식성명을 통해 언론사 세무조사를 "조세권을 악용해 특정언론을 탄압하고 회유하려는 술수"라고 발표했습니다. 수권정당을 자임하고 있는 야당의 의식과 판단이 국민들의 의식수준과 판단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통탄스러운 것입니다. 더구나 대법관까지 지냈고 법조계에서 '대쪽'으로 알려졌다는 이회창씨는 '언론말살음모 저지 긴급대책회의'까지 열고 대정부 투쟁을 결의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의 법해석이 일반국민의 법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허탈하기 그지없습니다.
이회창씨야말로 세무조사 결과의 투명한 공개와 엄정한 법집행을 주장하여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히려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 갈수록 본질에서 벗어난 지역감정 조장과 색깔론 공세를 펼치는 등 흠집내기에 골몰하고 있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그가 속한 정당을 보면서 절망합니다.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에 여당만도 못한 야당이 있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한나라당은 야당 구실을 아예 포기하고 있습니다. 자유언론을 외치는 자들은 아예 언론의 자유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지를, 아니 더 나아가 언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망각하거나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야당과 언론사들은 사회정의 수립을 위해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정의의 초석을 놓기 위해 스스로 제거되어야 하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열매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논리가 양의 탈을 쓴 이리떼들의 논리라는 사실에 대해 더 이상 놀라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심판받아야 하는 집단일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들은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들은 이제 일반 시민단체만큼도 정의를 위해 투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은혜와 진리'를 추구한다는 대형교회 목사의 아들(36세)이 교인들의 헌금으로 창간한 국민일보의 전직 대표로서 책임을 추궁받고 있습니다. 그가 포탈한 세금은 57억 원으로 밝혀졌습니다. 순수한 복음만 추구한다더니, 교회성장의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진 이 종교집단에서 각종 비리의혹이 끊이지 않더니, 그 집단에서 세운 언론사마저도 세금 포탈의 범죄까지 저지르고 고발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목회자의 아들이 사건의 핵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범죄 수준이 어디에까지 이르렀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고 실천하기를 외면하는 교회가 어떻게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지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회 자신의 구원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경청해야 할 때입니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정의를 촉구하고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