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1.9.16
성서본문
창세기 4:17-24, 누가 6:27-36
설교문
1. 들어가는 말
지난 주 화요일(2001.9.11일 현지시각 오전 8:50이후), 미국에는 사상 초유의 동시 다발 테러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뉴욕에서는 세계경제의 중심인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미국 국내선 민항기 2대와 충돌한 후 붕괴되었으며, 워싱턴에서는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군사력의 상징인 국방부 건물(펜타곤)의 일부가 역시 민항기를 이용한 테러로 파괴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미국 본토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공격이라는 점에서 미국국민들은 물론 전세계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쌍둥이 건물이 두 번째 공격을 받는 장면과 110층 건물이 흔적도 없이 허물어지는 광경이 CNN을 통해 생방송되면서 충격의 여파는 더욱 컸습니다. 이 끔찍한 대참사는 어떤 테러 영화보다도 더 끔찍하였습니다. 이 대참사를 막아줄 슈퍼맨도, 베트맨도 거기에는 없었습니다. 다만 절망과 탄식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국제 테러는 정상적인 외교나 군사력으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킬 수 없는 약소국이나 집단이 강대국 주도의 질서를 깨기 위해 감행하는 폭력행위입니다. 테러는 정규전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드는 대신에 전시효과가 큽니다. 그렇지만 테러는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살상을 통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시도되는 것이므로 반인륜적 행위로 지탄받는 것입니다. 이번 테러사건도 미국의 세계지배에 대한 저항을 시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대규모의 파괴 및 인명피해는 공포와 경악을 불러일으켰고, 더 나아가 미국의 강경노선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번 테러사건은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이 가련한 피해자로 둔갑하도록 돕고 말았습니다.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했는데도 10시간이나 백악관을 포기하고 숨어 지낸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응징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부시는 미국 등 서구의 전복을 내세우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오사마 빈 라덴을 테러의 배후세력으로 단정하고, 이번 사태를 '선전포고'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적'의 색출과 적의 은신처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미국 강경파는 이번 테러 사건을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빗대어 당시와 같은 보복전쟁수행을 주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전술핵무기 사용까지 거론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자원 입대하려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한 젊은이는 "위기에 빠진 우리의 자유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조기를 달기 위해 성조기가 불티나게 팔리는 등 맹목적인 애국주의로 인해 전쟁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이미 미국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에 대한 테러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아랍인들에 대한 폭행과 위협이 잇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텍사스의 한 이슬람 사원에는 6발의 총탄이 날아들어 유리창을 깨뜨렸고, 뉴저지의 한 시크교도 집 주차장에도 돌이 날아들었다고 합니다. 아랍계 학생들은 학교에서 백인 학생들로부터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국 해커들은 테러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아랍권을 해킹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추모의 날 행사에서 부시는, 역사에서 우리의 책임은 이 땅에서 악의 무리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합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를 통해 부시는 미국을 선으로 그리고 이슬람권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스스로가 심판자 하나님이 되려 하는 것입니다. 부시는 바로 미국 스스로가 악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테러리스트들 입장에서는 미국이라는 '악'을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졌습니다. 악에 대한 개념규정 자체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시는 간과하고 스스로의 입장을 절대화하는 오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부시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항공기 돌진 공격을 '테러행위'가 아닌 '전쟁행위'라고 규정하고, 전쟁수준의 대규모 보복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국민들을 흥분시키고 있으며, 전쟁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미 국방장관은 군인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여러분은 며칠 안에 미국의 역사적 군사 영웅이 될 것"이라고 부추겼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시 행정부가 테러집단과 같은 논리를 사용하고 있음을, 아니, 테러집단보다 더 위험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음을 봅니다. 자기중심주의적인 선악의 규정, 악에 대한 심판을 구실로 대량학살을 감행하려는 부시의 태도는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한 미국 대통령 부시가 성경에서 배운 것은 기껏 끝없는 보복을 노래한 라멕의 노래뿐일까요? 그와 그의 아버지는 대체 누구에게 기도하면서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 것일까요?
2. 가인의 문화
창세기 4:17 이하에는 인간의 도시 문화가 발전되면서 동시에 인간의 죄, 곧 비인간적 폭력이 증대해 가는 과정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아벨에 대한 가인의 형제살해로 이어졌고, 이제 가인의 후예들이 발전시킨 문화는 무자비한 보복수행을 자랑하는 폭력의 문화로 타락하였습니다.
4:23-24에 기록되어 있는 '라멕의 노래'는 가인의 후예들이 이룬 역사적 진보의 실체가 무엇인지 폭로하고 있습니다. 즉 갈등 및 폭력의 증대와 강한 자의 자기중심적인 권위주의와 무차별적인 보복폭력으로 인해 인간 공동체는 파괴되고 있는 것입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소년)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23-24)
힘있는 용사인 라멕은 아내를 둘이나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일처제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아내들에게 자신의 말을 경청할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합니다. 아내들에게 경청할 것을 강요하는 라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뜻밖에도 자신이 저지른 보복 폭력이 얼마나 무자비하였는지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죄로 느끼기는커녕 부끄러워할 줄도 모릅니다. 그는 그의 권위와 강함을 시위하면서 일흔일곱 갑절이나 보복할 것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타락한 남성문화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락한 남성문화의 특징은 권위주의와 폭력입니다.
라멕의 보복행위는 고대의 동형보복법(탈리오의 법칙,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동형보복법은 복수의 하한선이 아니라, 상한선을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나친 보복행위를 억제하기 위해 설정된 것입니다. 인간공동체를 보전하기 위한 이 법마저 파괴하고 라멕은 무자비한 보복으로 약자들을 위협합니다.
라멕은 하나님이 그의 조상 가인에게 약속한 보호(가인을 해친 벌을 일곱 갑절로 갚겠다는 약속)로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폭력으로 보복을 감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복수는 무자비하게 수행되었습니다. 한 군데 상처를 입힌 한 사나이를 죽였고, 한 번 손찌검을 한 소년을 죽였으며, 앞으로도 자신을 해친 자에 대해서는 일흔 일곱 배로 보복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보복행위를 통해 그는 동물만도 못한 인간의 잔학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은 보복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라멕은 이러한 반항적 권리 주장을 통해 야훼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4:25-26에는 셋 후손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가 아닌 새로운 인류의 싹이 움트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의 후손인 예수께서는 마태 18:22에서 일흔 일곱 번(표준새번역에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로 번역하고 있으나 "일흔 일곱 번까지"로 번역할 수도 있음) 용서하라고 가르침으로써 라멕의 주장을 무효화시키십니다.
부시와 미국 강경파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심지어 핵무기를 동원하여 보복하겠다는 발상은 다름 아니라 라멕의 보복의 노래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가인의 후예들의 범죄적 발상이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서는 안되며, 스스로가 악에 대한 심판자로 자처해서도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차별 대량학살을 감행한다면 그것은 라멕의 죄보다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3. 가인의 후예들에게 대한 예수의 경고와 가르침
오늘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은 '평지 설교'의 핵심으로서, 여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는 '사랑의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원수'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촉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27-28)
바로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실천할 때에만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인의 후예들이 만들어 놓은 남성 문화, 곧 폭력의 문화를 무효화시키는 '여성적 메시야'를 만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생명을 보호하려는 여성적 관심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된 말씀, 곧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된 말씀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야말로 부시와 미국민들에게 주어진 복음입니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저 라멕의 노래는 결코 생명의 복음이 아니라, 죽음을 부르는 저주의 노래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멸로 치닫고 있는, 가인의 후예들이 만들어 놓은 폭력문화를 극복할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뺨도 돌려대"(29)라고 가르침으로써 폭력을 무효화시키도록 촉구하십니다. 폭력의 악순환을 단절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황금률을 제시하십니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31) 당시 유대인 사회에는 보복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형식의 계명이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계명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어찌 대하든 간에 '내'가 상대방을 대하는 방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32절 이하는 황금률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질문을 제기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32-34) 다른 사람이 잘해준 대가로 잘해주는 것은 고대 세계의 일반화된 관습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에서도 불문율처럼 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보상을 기대하여 선행하는 것은 실제로 칭찬을 받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만한 일은 악한자들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행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인정되는 자에게 행한 선행을 기억하십니다!
황금률은 또 다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이어집니다.(36)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수라고 규정하는 사람들도, 부시가 적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모두가 사랑스런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사랑하시므로 그들의 생명을 보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우리의 형제자매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요청하십니다.(35-36) 절대적 사랑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교훈가운데에도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자비하신 것처럼 땅 위에서 자비하라." 자녀들은 아버지의 성품을 보여 주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인의 후예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보복의 악순환, 폭력의 악순환이 가져오는 파멸에 대한 경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라고 규정하는 사람마저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 원수도 사랑하라! - 이 계명을 따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이 계명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웃에 대해 심판자가 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폭력의 희생자가 됨으로써 남성문화의 범죄성을 폭로하고 동시에 폭력의 악순환을 단절시키는 순교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떤 이유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차별적인 보복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4. 생명문화 창출을 위하여
미국에 가해진 테러의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측에서는 라덴을 가해자로 미리 단정짓고 그를 악마화하기 위하여 짜맞추기식 수사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은둔지를 타격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융단폭격'이 계획되고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시는 미국의 사태를 '전쟁상태'로 규정하고 라덴을 악마화함으로써, 무차별적인 대량학살을 초래할 군사작전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테러리스트들의 논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테러리스트는 소수였고, 제대로 된 무기체제를 갖추지 못했으며, 은밀히 범행을 모의하고 실행했으나, 부시는 다수의 군대를 거느리고 고성능 학살 무기들로 무장하고 있으며, 공공연히 대량학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의회의 동의를 얻었고, 국민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국제적인 동의와 협력을 얻어 그의 대량학살계획을 합법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시는 테러리스트들보다 더 위험한 것입니다!
무역센터의 붕괴로 인한 사상자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가슴아파 하면서, 더 많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예상되는 무차별 공격을 서두르는 것은 자기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설령 보복에 성공해도 목숨을 내 걸고 투쟁하는 테러리스트들의 추가 테러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테러 직후 팔레스타인인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환호하였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소수의 목소리이지만 신중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라덴이 배후 인물로 밝혀지더라도 그가 거느린 별도의 부대나 시설이 없으므로 정확한 타격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또한 미국의 강공책은 수십 년 간 보복폭력의 상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공격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 있으며, 전쟁수행으로 인해 미국 자체가 몰락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유럽의 언론들은 "무리한 보복공격은 피의 악순환을 부를 수 있으므로 미국은 냉철히 접근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한국언론은 미국의 입장을 전달하는 데에만 그치고 있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이면서 사회비평가인 노엄 촘스키 교수(72)는 미국의 성급한 공격은 오히려 악영향을 초래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 테러사건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끔찍한 잔학행위"라고 규정하면서도, "결국 이번 테러는 무력으로 지배국가들을 통제해 온 미국의 강경 외교정책이 부른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한겨레신문}, 2001.9.14., 5면) 또한 그는 "희생된 사람의 숫자로만 보면 이번 사건은 뚜렷한 증거도 없이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 행한 무차별적인 공격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면, "1998년 8월 빌 클린턴 행정부가 케냐 등 미국 대사관 테러사건과 관련해 아프가니스탄과 수단 지역에 미사일 폭격을 퍼부었을 때는 수만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며, 제약공장의 절반 이상이 폭파됐다"는 것입니다.
* 그밖에도 미국이 전세계에서 저지른 테러 행위는 수 없이 많습니다.
- 미국은 히로시마에 실험용 핵무기를 투하함으로써 도시전체를 일순간에 날려버렸습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은 TNT 13,000톤의 폭발력을 지닌 것이었다. 이 우라늄 폭탄은 24만 5천 명의 인구 중 7만 5천 명 이상의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갔으며, 10만 명 이상의 부상을 초래하였으며 시내의 7만 6천 채의 건물 중 90%가 파괴되었다. 부상자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었으며 서서히 죽어갔다.)
- 한국에서 미군은 노근리 학살을 비롯하여 숱한 양민들을 살상하였습니다.
- 걸프전에서 미국은 이라크에 '융단폭격'을 감행함으로써 무고한 시민들을 대량학살하였습니다. (미국은 전쟁발발을 알리는 1991년 1월 17일 새벽의 제1차 공습에서 고성능 '재래식' 폭탄을 18,000톤이나 '융단폭격'으로 투하하였다. 이것은 파괴력에서 히로시마 폭탄의 1.5배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최초로 사용되는 수백 기의 토머호크 미사일이 미함정으로부터 발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래 한 지역에 단 하루 사이에 이처럼 대대적인 폭격이 감행된 적은 없었다.)
미국은 테러의 원인을 인식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일방적인 강경일변도의 외교정책과 세계화 추진,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무모한 전쟁수행을 통해 반미감정이 고조되었다는 사실을 미국은 진지하게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미국의 일방적인 이스라엘 지원정책(미국은 매년 20억 달러 이상의 군사원조를 이스라엘에 제공하고 있음)이 이슬람 세계의 반미 감정을 부추겼다는 엄연한 사실이 인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원인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폭력의 악순환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의 문화는 예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는 '기독교 문화'가 아니라 '가인'의 문화입니다. 붕괴된 세계무역센터와 파괴된 펜타곤은 가인의 문화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 경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전술핵무기까지 동원하는 보복을 감행하겠다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되돌릴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현재 개발된 전술핵무기는 아무리 소형이라 할지라도 히로시마 폭탄보다 몇 배 혹은 몇 십배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전술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히로시마의 참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파괴와 살상, 그리고 방사능 오염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하는 후유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핵무기 사용까지 검토한다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실체가 무엇인지 폭로하고 있는 것으로서 전세계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만일 미국국민들이 진정으로 테러 희생자들의 죽음을 애도한다면, 그들에 의해 희생당했던 억울한 사람들의 죽음도 함께 애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무차별적인 보복공격에 의해 학살당할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희생도 가슴아파 하여야 할 것이며, 따라서 무차별적인 보복공격에 대해 저항해야 할 것입니다. 무역센터와 펜타곤에서 희생당한 백인 엘리트들의 생명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제3세계 민중들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무차별 살상을 감행해야한다는 부시의 논리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번 갈등을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 사이의 불가피한 '문명충돌'로 규정짓는 것도 불합리하고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슬람 형제자매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우리의 이웃입니다. 이슬람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평화지향적이며 생명을 소중히 여깁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일부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의 공격성인 것입니다.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이슬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계에도 존재합니다. 부시는 지금 기독교의 이름으로 극단적인 근본주의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는 갈등을 평화적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국민들이 이성을 되찾도록 설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테러가 발생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테러를 구실로 전쟁놀이를 시작하기 위해 국민들을 충동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시는 그의 아버지 부시의 훈수에 따라 강경노선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현대판 라멕입니다. 그의 노선에 저항하는 소수의 목소리 속에 예수님의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청만을 높일 것이 아니라 그 소수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경고와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인류는 지금 아랍계(?) 테러리스트들의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부시의 무차별 보복에 의해 생존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 남신도회 헌신예배에서 가인의 후예들에 대한 예수의 경고와 가르침을 되새기는 까닭은 부시의 무차별 보복선언으로 인한 폭력의 악순환이 우리의 삶에 미칠 영향이 염려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라멕의 논리 속에, 부시의 논리 속에, 우리 사회의 남성문화의 논리 속에, 가인의 후예들이 이루어 놓은 문화적 유산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러한 폭력적인 문화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 결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저항, 예수님의 가르침은 폭력적인 남성문화에 대한 유일한 대안입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에는 생명을 보호하고 보전하려는 여성적 관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신도들은 지금 폭력적인 남성문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모성적인 관심사에 참여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폭력의 포기를 통한 공존문화의 형성, 이것이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남신도들이 선택하여야 할 유일한 노선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남성들의 폭력문화를 정당화시키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땅 위에 생명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부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생명의 수호자가 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특히 남북이 대립하고 있는 분단상황에서 이러한 요청은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유일한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수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과, 파멸적인 가인의 문화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시기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