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신학대학원 설교, 2001.12.4
성서본문
누가 1:46-55, 2:28-35
설교문
1. 마리아의 이미지를 깨뜨려라!
요즘 많은 남성들이 '예진 아씨'의 이미지가 깨어진 허탈함과 충격에 휩싸여 있다고 합니다. 인기인들의 스캔들로 먹고사는 사이비 언론들은 이러한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예진 아씨는 가공의 이미지일 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과오를 저지른 그 연기자의 인간됨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여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공의 이미지 파괴에 대한 분노와 비난 때문에 정작 주인공인 그 연예인의 인격이 매도되고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또 다른 충격에 휩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경청한 '마리아의 찬가'는 '예진 아씨'보다 더 곱고 순종적인 마리아의 이미지를 철저히 파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그가 잉태한 아기가 이룰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주께서 자비를 기억하셔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눅 1:51- 54)
이 노래는 여느 임산부의 노래가 아닙니다. 이 노래는 사회주의 혁명 대열에 앞장선 여성 게릴라의 노래처럼 들립니다. 이 노래는 입에 담기조차 위험한 사회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는 우리에게 익숙한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산산조각내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청순하고 가련한 마리아의 이미지를 간직하기 위해 이 노래를 성서에서 지워버리든가, 아니면 이 노래를 경청하기 위해 백인 미녀 마리아 이미지를 파괴하는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2. 미리암의 꿈
실제 역사적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그녀는 당시에 마리아로 불려지지 않고 '미리암'으로 불려졌습니다. 마치 예수가 요수아로 불리어졌듯이 말입니다. 유대인 요수아가 예수로 불리면서 백인의 메시야가 되었듯이 유대인 미리암도 마리아로 불리면서 백인들의 여신으로 둔갑하고 말았습니다. 결코 늙지 않는 백인 미녀의 모습을 한 마리아의 이미지에는 로마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여인의 고뇌와 고통보다는 늘 비정치적인 순진성을 담은 잔잔한 미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경청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미리암'은 결코 잔잔한 미소만을 머금을 수 있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시골처녀가 아닙니다! 미리암은 지금 식민지 유대 땅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유대 땅의 정치적, 경제적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현실에 굴복하거나 체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지금 전혀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미리암이 꿈꾸는 세상은 결코 가능해 보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자신의 꿈이 현실화되는 것을 앞당겨 보며 노래합니다.
미리암은 그가 한 아기를 낳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낳게 될 아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다"(누가 1: 54)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미리암의 노래에는 60년이나 로마 식민지로서 억압과 착취에 시달려야 했던 유대인들의 분노와 꿈,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다림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찬가에는 기쁨이 넘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리암은 이미 모든 고난을 극복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결코 쉽지 않을 인생의 길, 하나님의 일을 위한 특수한 봉사를 담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음으로써 엄청나게 더욱 어려워진 삶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쩌면 생명을 위협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지닌 무기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뿐입니다. 어디에도 약속이 이미 실현되고 있다는 징후를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강한 자들이 실각되고 비천한 자들이 높여진다는 것, 부한 자들이 빈털털이가 되고 굶주린 사람들이 배부르게 된다는 것은 역사적 경험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머스를 기다리는 미리암은 분명히 역사적 경험과 모순되는 '하나님의 혁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경험상 '가능한 가능성'(m gliche M glichkeit)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가능성'(unm gliche M glichkeit,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가능한 것)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가능성'을 실현시킬 메시야는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리암의 가슴은 시므온의 예언처럼 마치 예리한 칼에 찔리듯 처절한 슬픔을 간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 하나님의 혁명을 이루기 위한 전사로서 부름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터미네이터와 미리암
저는 이러한 미리암의 모습을 보면서 영화 '터미네이터'가 떠 올랐습니다. '터미네이터'는 제임스 카메룬 감독의 출세작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미래 사회인 2029년부터 1984년의 로스엔젤레스로 넘어온 살인기계인 터미네이터와 맞서 싸우는 한 여인의 외롭고 처절한 투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핵전쟁으로 파괴된 사회를 기계들이 지배하는 미래를 가정하고 있습니다. 미래사회에는 인간과 기계 사이의 투쟁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터미네이터는 미래의 기계사회에 반역을 시도하는 인간들의 리더인 존 코너의 어머니 사라를 살해하기 위해 현세로 침투한 것입니다.
존의 어머니인 사라는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메시야적 존재인 존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후로 그녀는 터미네이터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투사로 변모합니다. 특히 "터미네이터 2"에서 사라는 투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세속적으로 표현된 미리암인 셈입니다.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탄생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녀가 낳은 그 메시야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외롭고 힘겨운 투쟁을 벌입니다.
터미네이터와 싸우는 사라는 인간을 기계로부터 지키기 위해 기계에 저항하여 싸웁니다. 그러나 유대 여인 미리암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부유하고 강한 자들에 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미리암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 때문에 나서야 했던 긴 여행길에 아기를 해산해야만 하고, 헤롯대왕의 칼을 피해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미리암은 아들 요수아를 보호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린 자식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영화 '터미네이터'의 사라는 승리하지만, 현실의 미리암은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의 무덤교회 안에 있는 갈보리 산 위에는 가슴을 칼에 찔린 마리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세워져 있습니다. 저는 그 그림을 보면서 마리아의 슬픔이 나에게 전해져 오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의 마리아는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습니다. 거기에는 식민지 땅에서 고난과 고통의 삶을 살았을 미리암의 주름진 얼굴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슬픈 얼굴은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하였습니다. 아들 요수아의 주검을 안고 있는 미리암은 여느 어머니처럼 처절한 절망과 슬픔으로 일그러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신학자들은 화가들과 조각가들을 통해 그녀의 주름진 슬픈 얼굴을 삭제함으로써 비정치적인 순진성을 조작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터미네이터와 싸우는 사라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웁니다. 그러나 미리암의 무기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사랑뿐이었습니다. 미리암은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요수아와 함께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폭력의 희생물이 됨으로써, 철저히 패배함으로써 폭력 자체를 무효화시켰습니다.
4. 미리암의 크리스머스
미리암은 지금 그녀의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1: 50)이 모든 악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질서들을 파괴하고 정의와 평화를 세우는 하나님의 행동의 내적인 원동력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대변혁을 초래하는 것은 어떤 역사법칙이나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미리암은 그 시대의 어둠 속에서 고통을 겪던 비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의 눈으로, 이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시작되는 하나님의 혁명을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리암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마치 현실화된 것처럼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미리암은 지금,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권세와 재물이 메시야로 말미암아 어떻게 그것들의 매혹적이고 위협적인 힘을 상실하게 될 것인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치적 권세와 경제적 소유물은 더 이상 메시야의 제자들을 유혹할 수도 없고 위협할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메시야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혁명 아래 복종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권력은 더 이상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하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재물은 더 이상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누어주기 위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소유의 독점 및 횡포의 철폐 - 이것이 크리스머스 이후에 요청되는 하나님의 혁명의 현실입니다! 미리암이 기다리는 크리스머스는 바로 이러한 혁명을 실현시킬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보수주의와 개량주의는 설자리를 잃고 맙니다. 미리암의 노래는 급진적인 변혁, 곧 하나님의 철저한 혁명을 앞당겨 "축하"하는 신앙인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이 노래를 외면하고는 크리스머스를 바르게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회들과 교회지도자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아무리 철저히 계획하고 경건하게 크리스머스를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바로 이 하나님의 혁명 앞에 스스로를 내 맡기는 결단없이는 그 기다림은 무의미합니다. 정치가든 종교지도자든 봉사하는 권세가 아닌 억압하는 권세를 지니고 있다면, 부자든 종교단체든 나누어 줄 재물이 아닌 축적할 재물을 지니고 있다면, 성탄절은 이미, 그리고 아직도 거부되고 있는 것입니다.
대강절에 그리고 성탄절에 백화점에는 하나님 나라의 '여전사' 미리암의 자리가 없습니다. 싼타클로스에 대한 환상이 소유욕과 소비적 탐욕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좌파 게릴라' 미리암의 설자리는 교회 안에도 없습니다. 백인 미녀 마리아의 잔잔한 미소로 미리암의 분노와 꿈, 신앙과 열정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미리암은 결코 순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하나님의 나라 혁명의 도래를 목격하였으므로, 정치적으로 철저한 비판의식을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신뢰 때문에 그녀는 현실을 철저히 비판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리스머스가 오기 전에 순진한 마리아의 이미지를 깨뜨려 버리십시오! 그리고 미리암과 함께 크리스머스를 기다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혁명을 축하하고, 그 혁명에 연대하고 참여하는 진실된 마음으로 '메리 크리스머스'의 인사를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힘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는 좌파의 자리에 서지 않고는 미리암의 꿈을 말하지 마십시오! 미리암의 꿈을 노래하지 않고는 메리 크리스머스를 말하지 마십시오! 서구 신학자들에 의해 조작된 마리아의 이미지와 장사꾼들에 의해 조작된 크리스머스 축제는 미리암에 대한 박해이며, 성탄에 대한 모독일 뿐입니다. 미리암의 노래를 거부하고 모독한다면, 성탄종을 울리지 마십시오! 만일 우리가 미리암의 꿈을 거부한다면, 성탄절이 오기 전에 차라리 교회를 떠나는 것이 정직한 태도일 것입니다! 미리암의 꿈을 불순한 혁명 책동으로 매도하는 교회들은 차라리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최초의 성탄 캐롤인 미리암의 노래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미리암의 꿈에 연대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미리암의 노래에 연대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투스와 헤롯의 칼에 맞서서, 그리고 백화점과 교회에서 울리는 크리스머스 캐롤의 소음에 맞서서, 미리암의 노래를 전승하기 위하여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주께서 자비를 기억하셔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