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1998. 12. 20
성서본문
이사야 9:1-7, 누가 2: 1-7
설교문
1. 싼타클로즈의 전설
크리스머스의 핵심 캐릭터로 우리는 '싼타클로즈'를 떠올립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에 정작 '아기 예수'보다는 '싼타클로즈'가 주연이 되고 만 셈입니다. 그러나 '싼타클로즈'의 유래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싼타클로즈'는 서기 4세기초에 소아시아(현 터어키)의 류커아의 수도 뮈라의 주교였던 성 니콜라우스의 전설을 이용하여 미국에서 개발한 캐릭터입니다. 아직도 유럽에서는 싼타클로즈보다는 성 니콜라우스를 기리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은밀히 도왔다는 니콜라우스는 그리이스 정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성인으로 되어 유럽에 소개되었습니다. 1087년에는 로마 카톨릭측 신앙인들이 니콜라우스 시신을 터어키에서 도굴하여 이탈리아 바리로 비밀리에 옮겨 바실리카 산의 니콜라우스 성당 안에 안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니콜라우스 숭배가 본격적으로 유럽에 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세 유럽에는 이미 2,000여개의 니콜라우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니콜라우스는 대중적인 인기를 지닌 수호성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농경민족인 게르만인들은 최고신으로 '우둔'이라는 신을 섬겼습니다. '우둔'은 겨울과의 싸움에 힘을 주며 축복하는 多産의 신이었으며, '동지제'는 우둔을 위한 축제였습니다. 이러한 게르만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우둔에 대한 숭배를 니콜라우스에 대한 숭배로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니콜라우스 숭배에서 기독교적 요소와 이교도적 요소가 결합됩니다. 오늘날도 유럽에서는 '니콜라우스 축제일'(12월 6일)에 짚으로 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전통이 남아 있습니다. 니콜라우스 축제일에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은 19세기초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네델란드의 니콜라우스 축제: 스페인으로부터 중세 주교가 Black Peter(흑인들)와 함께 배를 타고 도착한다. 흑인들은 어린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준다. 성자는 아동의 행적이 적힌 책을 읽고 선물을 준다.
현대의 싼타클로즈는 미국에서 약 100년전부터 개발된 캐릭터인데, 20세기 초 코카콜라를 통하여 빨간 옷을 입은 싼타의 모습이 전세계에 선전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싼타클로즈의 전설이 발생한 것입니다. 미국이 만들어 낸 싼타클로즈는 유럽의 수호성자 니콜라우스와도 다른 캐릭터입니다. 싼타클로즈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수호성자로 창조된 것입니다. 이제는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에도, 한국에도 크리스머스만 다가오면 싼타클로즈는 상품 매상을 올리기 위한 단골 모델로 등장합니다.
이처럼 싼타클로즈와 크리스머스는 실제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싼타클로즈 없는 크리스머스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린이들은 북극에서 순록이 끄는 썰매에 선물을 잔뜩 싣고 날아오는 싼타클로즈를 기다리면서 크리스머스 이브를 보냅니다. 어린 시절 그러한 환상을 지닌 채 잠자리에 들어가는 경험은, 그런 환상이 비록 크리스머스와 관련이 없는 것이라 해도, 아름다운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2. 싼타클로즈 환상의 종말
크리스머스 분위기를 내는 카드는 으레 싼타클로즈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는 싼타클로즈가 크리스머스의 주인공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아기 예수 없이도 크리스머스 축제는 즐길 수 있지만 싼타클로즈 없는 크리스머스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싼타클로즈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캐릭터로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예를 들면, 96년 크리스머스 시즌에 인터넷에는 '싼타클로즈'관련 사이트가 이미 51만 3천 1백89건이나 올려져 있었습니다.
싼타클로즈가 이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를 누리게 되니까 문제가 제기되기도 합니다: 인터넷의 사이트에는 싼타에 대한 고소장이 올려졌습니다. 이 고소장에는 싼타가 어린이의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주장이 실려 있습니다. 그 증거로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애인지 나쁜 애인지. 오늘밤에 다녀가신대" 라는 가사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크리스머스 이브마다 어린이들 방에 무단침입해 '안면 방해'와 '무단 주거침입'까지 자행하고 있다는 혐의도 추가되고 있습니다.(http://www.cs.nps.navy.mil/people/support/akin /Funny/ALC UvsSanta. html) (한겨레신문 96. 12. 25. 7면.)
다른 한편,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학생들은 지난 95년 성탄절을 맞아 산타클로스가 세계의 모든 기독교도 가정을 방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는 이른바 '산타클로스 수학'을 풀었습니다.(한겨레신문 95. 12. 26. 6면):
이 수학풀이에 따르면 산타가 탄 썰매가 무게 32만 1천t, 빛의 속도의 3천배인 초속 1천46km로 달린다고 가정할 경우 순록 21만 4천 200마리가 썰매를 끌어야 하고, 산타는 초당 8백 22.6가구를 방문해야 된다고 합니다.(케임브리지/ AP 연합)
이러한 계산은 싼타클로즈의 전설이 얼마나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싼타클로즈의 전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과학시대에 살아가는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싼타클로즈의 전설은 농담거리로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크리스머스의 참뜻이 자동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환상은 종말을 고하지만 아직 새로운 비젼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들만이 아니라 아이들도 이제는 싼타클로즈의 환상을 오랫동안 즐길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일찍 어른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싼타클로즈는 정말 있나요?" - 이렇게 묻는 아이들의 나이가 해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어린 마음을 들뜨게 했던 환상에 대한 의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제 막내 아들도 지난해부터 그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럼, 있고 말고!" 아이는 다시 묻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이 그러는데, 선물을 준 사람은 싼타클로즈가 아니고 엄마 아빠라던 데요?" 저는 그래도 아이의 환상을 지속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올해에도 아이는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아이가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나 되었으니 환상이 무너지는 아픔을 경험해도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심스럽게, 엄마 아빠가 싼타클로즈 역할을 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싼타클로즈는 정말 있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성 니콜라우스가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는 것과, 모두가 니콜라우스처럼 살아간다면, 거기에 싼타클로즈가 있는 것이라고, 이제는 엄마 아빠가 싼타클로즈 역할을 했듯이, 네가 싼타클로즈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환상이 깨어지는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안타까워하면서, 빈 공간에 새로운 희망을 채워넣어주려 했습니다.
저는 주일학교 반사로 일하던 시절에 크리스머스 축하행사에서 연출했던 극본의 내용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제목은 "울고 간 싼타"(주태익 작?)였습니다. 내용은 어느 마을의 아이들이 어느 해 크리스머스에 싼타에 대한 색다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지금까지 싼타에게서 선물을 받기만 한 것이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싼타에게 선물을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크리스머스 이브가 되었습니다. 싼타는 어느 집을 방문하여 몰래 선물을 놓고 나오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집에 사는 어린이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어린이는 싼타의 선물을 사양합니다: "할아버지, 이제 이 선물은 더 가난한 친구에게 나눠주셔요. 그리고 이제 제가 드리는 선물을 받으셔요." 그 다음 집에서도, 그리고 그 다음 집에서도 싼타는 여전히 같은 일을 겪게 됩니다. 마침내 싼타는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내가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제 나는 편히 쉴 수 있겠구나."
이 연극 내용이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 내용이 저에게 준 감동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싼타클로즈에 대한 환상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언젠가 깨뜨려져야 합니다. 이 환상이 깨뜨려지지 않는다면 남에게서 선물을 기대하기만 하고 베풀 줄은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싼타클로즈에 대한 환상은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을 본받아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는 새로운 희망으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3. 첫번 성탄의 현실
크리스머스는 또 '다른' 의미에서 환상의 종말과 새로운 희망의 시작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이사야의 예언에는, 기원전 8세기초에 강대국 앗시리아에 의하여 억압받는 이스라엘의 고난의 현실과 하나님의 통치로 인한 새로운 미래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배자들은 국가 안보를 위해서 강력한 국방력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강대국 앗시리아의 군사력에 의하여 이스라엘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환상에 불과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환상이 종말을 고했을 때, 이스라엘은 "어둠"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강대국의 억압과 착취 아래에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새로운 미래를 보여줍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2절) 이 새로운 미래는 과거의 그릇된 사고방식과 태도, 그릇된 행동과 정책에 의하여 시작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빛은 오직 그 모든 옛 것들을 철저히 버릴 때에 비로소 가능해 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빛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중심의 옛 환상이 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희망이 솟아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이 좌절되고 고난의 아픔만이 남게 될 때, 고난을 초래한 환상들을 깨뜨리고 새로운 미래의 희망을 약속하십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4절에서 앗시리아 제국에 의한 멍에, 곧 조세부담과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이 "주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해방을 경험할 것임을 노래합니다. 여기에서 이사야는 기드온을 통하여 야영하던 미디안 군사들을 쳐부순(사사기 6: 33이하) 해방사건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 때 기드온이 이방인들의 억압에 대항한 해방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던 것은 강력한 군사력과 교묘한 전술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수의 정예부대만으로 성취한 기드온의 승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예언자는 야훼 하나님에 의한 궁극적인 승리를 앞당겨 바라봅니다: 즉 "침략자의 군화와 피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 입니다. 전쟁 자체가 사라지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 평화의 시대는 한 왕의 탄생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왕은 "기묘한 모사, 전능한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기묘한 모사'란 '불가사의한 일을 계획하는 분'(Otto 카이저, {이사야 I} 국제성서주석, 한국신학연구소, 1989)으로 번역하면 보다 뜻이 명확해 집니다. 이 왕은 하나님이 그의 생각을 지배하므로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는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뜻만을 실현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평화의 왕이 될 것입니다. 그 왕은 공평과 정의로 세계를 다스릴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우리는, 기원전 4년경 유럽을 통치하던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아니라 그가 다스리던 작은 식민지 땅 유대지방의 한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한 아기가 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갈 왕이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경청합니다. 아우구스투스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퇴함으로써 홀로 천하 제일의 권력을 장악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주어진 칭호가 아닙니까? 그것은 '전능한 자'라는 뜻을 담은 신적인 칭호였습니다. 그가 칙령을 내려 호적등록을 시행하게 하였습니다. 호적등록은 세금징수와 중앙집권적 권력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이 엄명을 거역하지 못한 한 유대인이 임신한 약혼녀와 함께 거주지 나사렛에서 고향땅 베들레헴으로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여행길에 그 유대인은 첫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아기는 눕힐 곳이 없어서 마굿간 구유 위에 눕히고 말았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왕좌에 앉은 황제와 그의 명령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구유에 눕혀진 아기! - 이처럼 극적인 대비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초대교회 신앙인들은 저 막강한 힘을 지닌 황제에게서가 아니라 저 초라한 말구유에 누인 아기에게서 새 역사를 열어 갈 평화의 왕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새역사의 시작을 깨닫는 이 위대한 신앙고백에서 과거의 환상이 산산조각 납니다.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던 지배 이데올로기, 시대정신, 가치관, 사고방식이 모두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폭로됩니다. 강자의 폭력이 세상을 지배할 수 밖에 없다는 환상이 종말을 고하는 곳에,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새로운 미래의 희망이 싹트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어서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크리스머스의 기적입니다! 이것이 첫번 성탄절에 시작된 하나님의 혁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크리스머스에 시작된 하나님의 혁명의 표징으로 '구유에 뉘어 있는 갓난아기'(누가 2: 12) 외에 다른 표징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외면 받은 천덕꾸러기로 태어났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천덕꾸러기로 살아가는 목자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말구유에 뉘인 아기, 그리고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목자들의 방문 - 이것은 화려하거나 낭만적인 풍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첫 성탄의 광경입니다. 외면 받고 쓸쓸했던 성탄! - 이것이 하나님의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 하나님께만 영광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2: 14)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성탄광경은 우리가 지니고 있던 크리스머스의 환상을 송두리째 깨뜨립니다. 거기에는 화이트 크리스머스도, 징글벨 소리도, 아름다운 트리들도, 진수성찬을 차린 축제도,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들의 방문도 없었습니다. 빨간 코를 지녔다는 루돌프 사슴도, 싼타클로즈도 없었습니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화려한 조명도 없었습니다. 성탄카드도, 성탄 케잌도 없었습니다.
마태복음의 보도에 의하면, 그 아기 예수를 찾아 축하한 방문객들은 오직 외국인들이었고, 예루살렘 시민들과 헤롯대왕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지배 질서가 무너질까 봐 불안해했으며, 심지어 아기 예수를 암살하려 시도했습니다. 아기 예수는 태어나자 마자 이집트로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조들이 탈출했던 그 땅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크리스머스의 현실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여는 희망은 그렇게 힘겨운 과정을 거쳐서 현실화됩니다.
4. 크리스머스의 환상이 실종된 성탄절
벌써 성탄절이 눈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백화점에는 예년과 같은 크리스머스의 축제 분위기가 없습니다. 거리에서는 아직도 캐롤이 울리지 않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머스"의 감미로운 노래도, "징글벨"의 경쾌한 리듬도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크리스머스 카드들도 상점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싼타 클로우즈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릴 꿈을 지닌 어린이들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선물은 고사하고 세끼 식사를 해결하는 문제가 시급한 과제로 된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IMF 사태는 풍요와 소비의 축제가 되어 버린 크리스머스 시즌의 열기를 허락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머스와 관련된 환상들이 실종된 계절에 우리는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크리스머스 축제의 열기가 사라진 시간에 맞게 되는 이번 성탄절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참된 의미 깊은 성탄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크리스머스 축제의 환상이 사라진 시간에, 성탄절의 참된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는 셈입니다. 아기 예수의 성탄은 절망하는 사람들, 희망의 징조마저도 바라볼 통찰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입니다. 아기 예수는 우리의 절망의 끝에서 비추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빛입니다. 절망하는 사람들과 함께 절망하고,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난받을 때, 우리는 첫번 성탄에 태어나는 아기 예수에게서 희망의 빛을 본 목자들의 감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이 고안한 크리스머스 축제의 환상이 종말을 고하는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성탄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증해 주고 정당화 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하나님의 혁명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소비와 소유의 축제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사람들 사이에 아기 예수의 성탄과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싼타 없는 크리스머스, 축제분위기 없는 크리스머스 - 여기에서 우리는 아기 예수의 성탄을 진정으로 의미깊게 축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가난한 목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성탄절의 진정한 기쁨과 희망과 감격을 나누고 싶습니다: 메리 크리스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