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2.2.24
성서본문
호세아 4:6-8, 마가 14:53-65
설교문
1. 신학교육주일에 즈음하여: 교권체제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저항
오늘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가 지정한 신학교육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학교육 주일을 설정하여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의 전통 위에서 신학교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한신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의 전통 위에서 세워진 교단입니다. 신학교의 전통이 교회를 형성한 것은 특수한 사례입니다.
본래 조선신학교는 "한국인에 의한 한국 교역자 양성과 세계수준의 신학교육을 목적으로" 1940년 4월 19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신학교의 탄생은 선교사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세계수준의 신학교육'을 실행하려는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 수준의 자주적인 신학교육의 꿈은 곧 난관에 부딪치고 맙니다. 한국전쟁 중에 발생한 교권다툼의 와중에서 조선신학교의 신학교육 노선은 미국에서 수입된 극단적인 보수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근본주의자들에 의하여 정죄되고 배척받게 됩니다. 결국 1952년 4월에 개최된 제37회 장로교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 졸업생들에게 목사 안수를 금할 것, 김재준 목사를 목사직에서 제명할 것, 김재준 목사의 사상을 찬성 지지하는 자는 처벌할 것등을 결의함으로써 조선신학교의 노선을 정죄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1953. 6. 10. 서울 한국신학대학에서 개최된 제38회 '호헌총회'에서는 학문과 신앙의 자유를 기치로 내세운 한국신학대학의 노선에 동의하는 교회들이 모여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출범시켰습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교단 창설의 목표로서, 율법주의에 저항하여 복음의 자유를 확보할 것, 불법한 교권에 저항하여 신앙양심의 자유를 지킬 것,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 자조의 정신을 함양할 것,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함으로써 전 세계 성도들과 연대할 것 등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처럼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조선신학교가 지향한 노선, 즉 미국 선교사들에게 종속되지 않는 자주적인 신앙전통 형성과 세계적인 수준의 신학전통 형성을 지향하는 노선에 동의하는 교회들로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범 자체가 자주정신과 자유정신의 구현이었으며, 따라서 선교사들과 보수적인 종교지도자들이 형성하였던 교권체제에 대한 저항과 거부였다는 점입니다. 즉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교권을 장악한 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받아 쫓겨난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교단창립 50주년을 1년 앞두고 있는 우리는 우리 교단의 모습을 냉철하게 재검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출범당시의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와 목회자들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 교단도 여타의 교단들과 다름없이 또 다른 교권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신학은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의 복음 위에 바로 서서 신앙고백하고 있는지,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한 비판적인 학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신학은 우리의 교단과 교회들 그리고 목회자들의 신앙과 실천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노선 위에 서 있는지 거듭 거듭 비판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학은 오직 비판적인 질문과 문제제기를 통해서만 교회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만일 신학이 교회의 시녀가 되고 만다면 신학교육은 아무런 희망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른 신학, 바른 신학교육은 늘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고난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미 성서 안에는 종교의 교권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전통이 뿌리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동시에 성서에는 바른 신학노선을 걸으려 했던 신앙인들의 고난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2. 죄의 실체: 제사장이 많을수록 죄도 많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호세아의 입을 통하여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제사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에게 짓는 죄도 더 많아지니, 내가 그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겠다."(호 4:7) 이 말씀의 뜻이 대체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주로 종교적 제의를 집행함으로써 중재역할을 하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존경받던 정신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제의의 형식에 백성들의 관심을 묶어둠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려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직화된 종교체제의 특권계급을 형성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이 이처럼 타락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하여 등장한 사람들이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제의적 형식이나 종교체제 자체의 유지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백성들을 계몽하는 데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종종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은 갈등구조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물론 제사장들과 결탁하여 예언자의 기능을 상실한 어용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예언자들은 종교적 형식이나 제의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실천하는 일에 관심하였습니다.
호세아도 그러한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 출신 예언자로서 북왕국의 흥망성쇠를 체험하면서 예언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기원전 750-725년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의 활동 초기에는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 마지막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후기에는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국운이 쇠하였던 시기이다. 공교롭게도 북왕국의 마지막 왕의 이름도 호세아이다. 왕 호세아는 기원전 724년에 앗시리아군에 의해 살해되고,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는 그 후 3년 간 더 버티었으나 721년 봄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는 당시 백성들의 죄상을 다음과 같이 폭로하였습니다(호 4:1-3) :
" .......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저주와 사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다.
살육과 학살이 그칠 사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탄식하고,
주민은 쇠약해질 것이다.
들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들도 다 야위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도 씨가 마를 것이다."
여기에서 백성들의 죄는 단순히 개개인의 도덕적 과오들을 합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본요구들과 모순되는 삶의 왜곡된 모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진실(신실, 성실)과 사랑(헤세드, 공동체에 대한 내적인 의무)의 결핍이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가 먼저 진실과 사랑을 약속하고 실천하였습니다. 바로 그 야훼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공동생활에 필요한 두 가지 기본원리'인 진실과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웃에 대하여 진실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교적 행사나 제사에는 열심이면서도 진실과 사랑은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이론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행위와 계약의 요구들을 통해 자신의 본질과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뜻에 합당하게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형제에 대한 책임 속에서, 진실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헌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행동'이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책임의식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죄의 목록을 통해 폭로되고 있습니다(2절). 진실과 이웃사랑을 저버린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의 행위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의 결과는 매우 광범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땅과 그 주민들, 자연 세계가 함께 멸망당할 것임을 경고하십니다(3절).
4-8절에는 제사장들의 죄악이 폭로되고 있으며 동시에 심판이 선언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위기 상황에서 제사장들과 어용예언자들은 백성들을 바르게 계몽하고 교육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특권유지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즉 진실과 사랑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교육하기보다는,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란 희생제물을 더 얻어먹기 위하여 백성들이 죄를 더 짓기를 소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8절)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이 많아질수록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더 모르게 되고 죄만 더 짓게 된다고 탄식하십니다. 제사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 이처럼 철저한 종교비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르크스가 "종교는 아편"이라고 비판하기 2500여 년 이전에 이미 호세아는 철저한 종교무용론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을 죄 속에 묶어둠으로써 속죄를 위한 기관으로서 종교적 제의의 중요성을 강화시키고, 그 결과 제사장들은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종교적 부조리가 철저히 폭로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사해준다는 제사장들의 제의자체가 오히려 죄를 만들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오늘의 제사장으로 자처하는 목회자들에 의해 한국백성의 죄가 더 증가하는 것은 아닐까요?)
3. 고난의 본질: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
오늘 우리가 경청한 두 번째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재판광경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를 로마총독에게 넘겨 처형하도록 요청한 인간집단은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놀랍게도 당시에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긴다던 종교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처형하도록 요청한 집단은 당시의 좌파세력이 아니라 우파세력이었으며, 사회변혁을 추진한 급진주의자들이 아니라 체제유지를 위해 발버둥친 보수주의자들이었으며, 우매한 백성들이 아니라 지배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식민지 유대 땅의 자치기구인 이른바 70인 의회(산헤드린 의회) 앞에 서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심판자들은 대제사장들을 비롯하여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던 사두개파 출신의 사제들이며, 장로들은 대토지 소유자들인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던 집단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도 당시에 대부분 사두개파 출신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식민지 유대 땅의 실권을 지니고 있던 토착세력들로서 종교적 사회적 체제유지에 관심을 기울이던 보수주의 집단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혁명적인 가르침을 전하고 다녔으니, 그들의 눈에 가시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처형할 의도를 지니고 처형구실을 찾기 위해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증언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재판을 주관하는 대제사장이 직접 나서서 예수를 심문합니다: "그대는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61) 침묵을 지키던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이요.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62)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대답을 꼬투리고 삼아 신성모독죄를 뒤집어씌우고 그것을 처형구실로 삼습니다.
우리는 이 재판광경에서 충격을 받습니다. 아니,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가운데 대표자격인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메시야를 처형하였다는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현실로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호세아의 입을 통하여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요?
종교적 특권만이 아니라 정치적 실권까지 한 손에 장악하고 있던 대제사장의 관심은 애초부터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지를 확인하려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함으로써 자신의 특권적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즉 그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 뜻에 복종하려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위와 심지어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메시야 처형! - 이 희대의 사기극을 증언하는 것이 바로 저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대제사장의 범죄를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이 주간에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초래한 장본인은 대제사장과 그의 무리들이며,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형당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한, 지배자들의 특권유지 시도! - 그것이 바로 메시야 마저도 살해한 범죄의 뿌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사장의 특권체제로 굳어진 이스라엘의 종교체제에 대하여 저항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밝히고 가르치기 위하여 헌신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예언자 전통에 서서 제사장 전통에 저항하였던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예수님은 모두 같은 성경말씀을 읽었고 같은 하나님을 섬겼지만, 신학적 관심과 노선이 달랐으므로 전혀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특권유지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였으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참뜻이 무엇인지 가르침으로써 백성들을 계몽하였고, 십자가의 고난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실천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하여 지배자들에게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절에 기억하여야 할 것은 바로 역사적 사실입니다.
4. 오늘의 고난의 현실: 예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폭력과 대량학살
예수님의 고난 이후에도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처형당했습니다.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다시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한다는 것은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역사 속에서 그러한 범죄행위는 지속되었습니다.
아우쉬비츠에서의 유대인 학살을 비롯하여 최근의 아프카니스탄 민중들에 대한 학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획되고 있는 부시행정부의 침략 스케줄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범죄행위는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량학살 무기를 생산,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무기를 팔아서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 행정부가 입만 열면 인권과 자유, 그리고 심지어 세계 평화를 논하는 것처럼 뻔뻔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는 미국 대통령들이 실제로는 세계 곳곳에 전쟁을 일으켜 대량학살 무기를 팔아먹는 장사꾼들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처럼 믿기지 않는 진실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그 나라의 대통령 가운데 가장 어리석고 위험한 인물이 조지 W 부시로 기억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선과 악을 말하는 기준은 결코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며, 예수님의 기준도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가 위협하고 실행하는 대량학살극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학살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앙의 토대가 된 보수적인 신학체계가 그러한 깨달음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그를 지원하고 있는 우익집단의 시각이 고난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지구를 위협하는 세력, 한반도를 위협하고 있는 세력은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학살을 감행하는 자들이며, 좌파세력이 아니라 우파세력이며, 급진주의자들이 아니라 보수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 고난의 현실을 초래하고 있는 장본인이 바로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정치인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국이 뒤집어쓰고 있는 기독교 문명의 껍질이 벗겨지고 미국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노근리에서, 아프카니스탄에서, 그리고 솔트 레이크의 동계 올림픽에서 미국을 지배하는 우상들의 모습이 폭로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울지라도 아무도 그들의 기만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심판받는 사람들 한 가운데에 서 있으며, 예수께서는 처형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처형당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가운데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학, 그리고 바른 신학교육은 바로 이 사실을, 이 고난의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할 때에 그리고 이 고난의 현실을 외면할 때에,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인간의 학문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고난을 초래하는 자들의 편에 서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바른 신학은 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도록 도와야 할 것이며, 세계를 변혁하기 위한 신앙인들을 지원하는 신앙체계로서 역할을 담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은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평신도들의 신앙과 직접 관련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밑바탕에 있는 신학체계는 어떤 것입니까? 저 대제사장과 부시가 지니고 있는 자기합리화 및 자기정당화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늘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촉구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신학체계는 교회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에 머무는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가 끝없이 스스로를 개혁하여 나가도록 촉구하고 인도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묵인하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현실을 변혁시키도록 촉구하는 것입니까? 대학교회는 이 점에서 바른 신학전통 위에서 성숙한 신앙전통을 형성하여 나가는 신앙공동체로서 우뚝 서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