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2.5.26
성서본문
요한 13:1-15
설교문
1. 들어가는 말: 5월의 두 얼굴(생명의 계절, 그리고 생명을 파괴한 역사)
5월은 진정 '계절의 여왕'이라 불릴 만 합니다.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인 한신대학교 캠퍼스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그 이유를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언제 겨울이 있었는가 싶게 초여름의 생명력이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5월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명을 꽃피우는 5월에 우리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을 제정하여 지킵니다. 어린이날은 자라나고 있는 새싹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기 위한 날입니다.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은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분들의 수고를 기억하고 격려하기 위한 기념일들입니다.
그러나 오월에는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였던 달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수십 년 동안 이 땅에 생명의 문화대신에 죽음의 문화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5월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총칼에 의하여 무참하게 짓밟힌 달이기도 합니다. 22년이나 지났지만,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이 겪는 고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은 5월 항쟁의 희생자들이 겪는 고통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5.18 당시 충격으로 정신장애를 앓게 된 환자들이 자살하거나 병사하는 등 당시의 고통과 충격은 아직 진행형이다."({한겨레신문}, 2002.5.18. 15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계절을 주셨는데, 이 땅의 지배자들은 총과 칼로 생명을 파괴하는 데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생명의 계절에 생명을 파괴하는 이 엄청난 모순이 5월에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5월에 승리한 것은 지배자들의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역사는 지배자들의 폭력은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우리의 5월은 이름 없고 힘없는 민중들의 생명력이 역사를 새롭게 한다는 엄숙한 진리를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한국의 역사는 위대한 방향전환을 하게 된 것입니다.
2. '강아지 똥': 생명을 위한 희생
저는 5월이 다 가기 전에 여러분들께 동화 한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가 소개하려는 것은 권정생 선생이 쓴 "강아지 똥"이라는 제목의 동화입니다. 이 동화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돌이네 흰둥이가 골목길 담 밑에 똥을 눴습니다.
그래서 강아지 똥이 태어났습니다.
강아지 똥은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참새가 쪼아보고는 더럽다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소달구지 바퀴 자국에서 뒹굴던 흙덩이도 "넌 똥 중에서도 제일 더러운 개똥이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외톨이가 된 강아지 똥은 스스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 수 없을 텐데..."
봄비가 내리던 날, 파란 민들레 싹이 돋아났습니다.
민들레가 예쁜 꽃을 피울 거라는 말을 듣고 강아지 똥은 부러워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아지 똥은, 민들레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거름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강아지 똥이 민들레의 거름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들레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네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 속으로 들어와야 해. 그래야만 별처럼 고운 꽃이 핀단다."
민들레가 도움을 요청하자 강아지 똥은 너무 기뻐서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아 버렸습니다.
사흘동안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강아지 똥은 자디잘게 부서져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 민들레 뿌리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줄기를 타고 올라가 꽃봉오리를 맺었습니다.
이 동화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습니다: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요.
향긋한 꽃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어요.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 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어요."
권정생 선생은 처마 밑에 버려진 강아지 똥이 비를 맞아 흐물흐물 녹아 내리며 땅 속으로 스며드는 그 옆에서 민들레꽃이 피어있는 모습을 보고 이 동화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가 자신의 몸을 녹여 생명을 꽃피운다는 사실에 감동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한 아동문학가를 통하여, 흔히 왕자나 공주가 주인공인 동화의 세계에 이제 '강아지 똥'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아동문학계에 혁명이, 즉 철저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권정생 선생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출생하여 해방 이듬해 귀국하여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고단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한 때 걸인으로 살기도 했는데, 안동군의 한 마을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는 마을교회 문간방에서 지내면서 교회 종지기 일했습니다.
(그는 1969년에 동화 '강아지 똥'으로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아동문학가로 등단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매일신문과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1975년에는 동화집 {강아지 똥}으로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올해로 만 65세가 되었을 권 선생은 아직도 결핵으로 고생하면서 살아가는 가난한 노총각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어린이와 같은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분 자신의 삶이 강아지똥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고난을 거름으로 삼아서 마치 샛노란 민들레꽃을 피우듯 감동적인 글들을 탄생시키고 있습니다.)
'강아지 똥'은 실제로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꽃을 피울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민들레꽃은 강아지 똥의 희생으로 피어납니다. 아름다운 꽃은 냄새나고 더러운 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민들레꽃에서 강아지 똥의 희생이 향기를 내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꽃은 똥의 희생을 기억해야 합니다. 똥의 희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꽃은 배은망덕합니다. 그리고 똥의 희생을 강요하는 꽃은 오만합니다.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그러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바쳐진 희생은 숭고합니다. 꽃이 꽃으로 피어나는 아름다움은 강요되지 않은 희생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꽃 자신도 다른 꽃을 피우기 위해 또 다른 거름으로 희생될 준비를 갖출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꽃은 지고 만다는 사실 때문에 찬란한 것입니다.
3.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메시야
저는 동화 '강아지 똥'을 다시 읽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류를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슈퍼맨도, 슈퍼스타처럼 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최소한의 권위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전능함과 권위를 버렸습니다.
당시 사회 관습상 발을 씻어주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그런 일은 종들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예수님의 모습은 충격자체입니다. 어떻게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메시야가 인간의 발을 씻기 위해 무릎을 꿇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당시에만이 아니라 지금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당시 유대사회에서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인 랍비들을 인격적으로 섬기는 행위를 하도록 요구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그러한 자연스러운 관습을 깨뜨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행동은 관습적인 인식의 혁명적 전환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이었는지,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하여 제자들이 얼마나 당혹감에 사로잡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6)
예수: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7)
베드로: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8)
베드로의 태도는 겸손한 사양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예수님에게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32에서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비슷한 항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씀을 듣고 항의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에 메시야는 고난받고 처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지배자들 위에 군림하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베드로의 생각에 예수님은 섬김을 받아야지 남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권위와 영광을 얻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으므로, 수치와 고난을 겪는 주님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예수님께 대한 존경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함께 어떤 특권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가 숨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수치와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고난의 길을 걷기를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탄'이라고 꾸짖었습니다(마가 8:33). 그리고 지금은 발씻기를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경고하십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께 헌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생각에 동의하기는커녕 철저히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예수님의 행동은 인류를 위한 희생적인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배하고 섬김을 받는 메시야의 길을 포기하고 오히려 수치와 고난을 받는 약자의 모습으로 인류를 섬기는 메시야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사탄적인 교만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거부하는 베드로의 태도는 겉보기에는 겸손한 것이나, 실제로는 남을 지배하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완악함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발을 씻기는 관계를 맺지 않고는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씻김을 받았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세상의 위계질서와 도덕적 가치가 설자리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상식과 관습이 설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지니고 있던 기대와 환상도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일상생활 한 복판에서 철저하게 새로운 사고방식과 태도를 관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폭력 없는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긴 후에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12)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행동이 남을 지배하려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려는 상징적 행동이었음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십니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14-15)
제자들은 주님의 행동을 통해 깨끗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주님의 그 행동은 제자들이 실천해야 하는 모범례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섬김을 받음으로써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존재로, 즉 남을 섬기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실천하는 자만이 주님에 의해서 진실로 깨끗하게 씻긴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은 해방절인 유월절 이전에 또 다른 해방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제자들을 지배욕과 권력욕으로부터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겪음으로써 예수님은 인류를 궁극적으로 모든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스스로의 권위와 생명을 버림으로써 제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참된 삶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이러한 주님의 희생 위에 핀 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공동체는 스스로의 영광에 도취된 꽃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들은 썩어짐으로써 새 생명을 꽃피우는 밀알처럼, 스스로를 비우고 낮아져 섬김으로써 온 세상이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맺는 말: 생명을 위한 삶
최근에 어느 대통령 후보는 후보수락 연설 말미에 "국민을 하늘같이 떠받들고 국민을 위해 뛰라는 명령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간직하겠다"고 말을 한 뒤, 갑자기 연단 앞으로 나가 참석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고 합니다. 만일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대한민국에는 경사가 났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완벽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가인 그의 말과 행동의 진실성을 그대로 믿을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은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 위한 전략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국민을 위해 살겠다면, 도대체 그는 왜 그토록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모든 사람의 섬김을 받게 될 것이라 기대되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러한 욕망과 기대를 지닌 자가 국민을 섬기겠다니 이처럼 모순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5월은 그러한 정치적 욕망들 때문에 짓밟혔습니다. 이 아름다운 생명의 계절이 국민을 위한다는 구실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짓밟혔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치가들의 감언이설에 속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실로 국민을 위해 수치와 고난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자들, 진실로 이 땅에 생명의 문화를 꽃피우기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이 내 뱉는 말들은 진실성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영광을 받는 꽃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 결국 힘없고 가난한 국민들만이 희생을 감수하도록 강요하는 자들은 생명을 꽃피우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히 짓밟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권력욕의 찌꺼기를 제거하실 뿐만 아니라,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죄악을 폭로하셨습니다. 스스로 이웃을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강요하는 권력자들의 모든 그럴듯한 구실들을 무효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권정생 선생의 눈에 비친 '강아지 똥'처럼 예수님은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의 문화를 꽃피우셨습니다.
어버이날이 있는 신록의 계절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물하신 풍성한 생명을 지키는 길이 무엇인지 다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어버이들의 삶은 '강아지 똥'의 희생처럼 숭고합니다. 우리 사회가 이제는 어리석은 삶의 모델로 간주하게 되는, '남을 위한 희생'이야말로 자신과 이웃을 구원하는 삶임을,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참된 삶임을 우리는 다시금 확인하고자 합니다. 이 역사의 생명을 지탱하는 힘은 결코 생명을 파괴하는 지배자들에게서가 아니라, 힘없고 하찮아 보이는 '강아지 똥' 같은 민중들의 희생에서 오는 것임을 다시금 확인하고자 합니다.
-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강아지 똥'이 되어야 할까요?
- 우리는 누구의 발을 씻겨주어야 할까요?
우리 모두의 하루 하루가 생명을 꽃피우는 보람된 삶이 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