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본문
이사야서 52:7-10
놀랍고도 반가워라! 희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복된 희소식을 전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면서, 시온을 보고 이르기를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구나.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의 소리를 들어 보아라. 그들이 소리를 높여서, 기뻐하며 외친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오시는 그 모습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함성을 터뜨려라. 함께 기뻐 외쳐라.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 주님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능력을 드러내시니,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아멘.
빌립보서 4:4-7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1:46-55
그리하여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아멘.
설교문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상상 한 번 해 보시죠? 하나님은 홀로 계시지 않고 하늘에 계시면서 땅에 있는 우리와 늘 교류하고, 교통하고, 소통하십니다. 하늘에 있는 성가대는 무슨 찬양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성가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하늘 성가대는 바로 이 시간에 이렇게 찬양을 부릅니다. 땅에는 평화입니다라고. 오늘 여러분께서 읽은 말씀입니다. “더 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 사는 자들의 고백의 소리입니다. 그랬더니 하늘에 있는 성가대가 하는 소리입니다.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입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 영광송을 드리고, 하늘에서는 우리에게 평화의 노래를 전해줍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너무 감격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찬양을 드립니다. 찬양의 첫 가사는 이렇습니다. <찬양하도다. 마리아가!> 우리의 언어로는 <마리아가 찬양 합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라틴어 표현 방식은 <찬양하도다. 마리아가>입니다. 찬양하도다라는 말은 라틴어로 마니피카트(Magnificat)입니다. 그래서 음악 하시는 분이나, 신학 하는 모두가 오늘 마리아의 누가복음 찬가의 제목을 마니피카트로 삼았습니다. 마리아는 하늘 성가대의 바람인 "땅에는 평화를"을 선물로 받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주님께 찬양을 돌립니다. 주님께 영광입니다. 이 찬양을 드릴 때 마다 하늘에서는 이 땅에는 평화가 임하도다하고 노래합니다.
사실은 영광송을 노래하고 듣는 사람마다 그 마음속에는 항상 평화가 있고, 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영광과 평화가 소통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개를 함께 묶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리아에게 하늘영광이 임하는데, 그 영광이 아기 예수로 태어날때 그 이름은 평화일 것입니다. 이 평화의 왕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온 누리에 전파 할 것인데," 저 같은 비천한 여성에게 이렇게 큰 영광을 주십니까"하며 감격하는 노래가 오늘 누가복음 2장의 마리아 찬가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릴 때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요? 혹시 아기가 태어나서 어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떤 평화의 나라를 만들거라고 확고하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제 추측입니다만 아무리 성령의 감화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마리아가 자신이 낳은 아들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해서 승천하시기까지의 역정은 생각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렇합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시고, 그 아들은 온 백성을 구할 엄청난 만왕의 왕이 된다고 확신했고, 그 이야기를 마리아가 스스로 자기 입으로 고백합니다. 또한 노래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찬양합니다. 주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오늘 성경에 있는 말씀을 당시로 돌아가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눈으로 다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이 성경말씀을 노래로 했을 때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노래를 했습니다. 그 당시 마리아도 유대백성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백성들은 수천 년 동안 꾸어오던 꿈, 즉 이런 꿈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 땅에 평화가 온다. 이 평화가 오면 사람을 짓밟고, 탄압하고, 억압했던 왕은 자리에서 쫓겨난다. 짓밟혔던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다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부당하게 배불리 먹었던 사람들은 먹을 것을 빼앗기지만, 열심히 일해도 배고팠던 사람은 먹을 것을 풍족히 받게 된다. 억눌린 사람은 위로를 받는다. 누른 자는 쫓겨난다. 그래서 만백성이 기쁘게 하나님을 찬양하게된다.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이 이루어 진다.바로 이런 이야기를 담은 평화의 노래입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은 엄청난 축하를 받고 태어났지만, 그 운명은 기구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역사를 밟습니다. 마리아가 그토록 좋아하고, 꿈꿨던 구세주 예수, 그는 왜 십자가에 죽어야만 했나요?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마리아가 미리 도대체 무슨 말로 하나님을 찬양했을까요? 예수님 당시 십자가는 중범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주는 사형틀 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 해적의 왕, 노예 중의 흉악한 노예는 사형 언도를 받으면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방식은 우선 광장에서 매를 맞고, 십자가 틀형을 어깨에 메고, 자기가 죽을 사형장까지 끌고 갑니다. 가서 못에 박힌 다음에 십자가를 세우지기 전에 딱 두 가지 내용을 십자가에 기록합니다. 예수님도 똑같았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힌 죄수의 이름과 죄명, 이 두 가지는 꼭 적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십자가가 들리기 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라틴어로 INRI 4글자이며, 이 말은 예수스 나자레누스 렉스 유대오름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의 머릿글자 입니다. 즉, 이름은 나사렛 예수,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 푯말을 십자가에 높이 달았습니다. 아하,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죽는구나. 이 죽음을 집행했던 로마의 빌라도 총독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은 로마황제 한 사람뿐이다. 결국 왕이라고 사칭한 나사렛 예수는 사칭 죄 때문에 죽는구나. 유대인의 왕이 죽는구나. 빌라도 총독은 마음껏 기뻐했을 것입니다. 나는 황제의 명을 받은 총독으로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구나. 유대인의 왕은 죽는다. 유대인의 평화는 죽는다. 암 그렇지, 남는 것은 오직 로마 황제가 지배하는 로마제국이 지배하기위해 내놓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 밖에 없구다라고.
예수의 죽음에 동조했던 유대백성들의 이야기도 한번 들어 보시죠. 유대 백성 중에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했던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은 아직 오지 않았다. 로마 황제도 왕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도 왕이 아니다. 우리는 왕을 더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사칭된 유대인의 왕은 죽는다. 그렇게 여겼죠. 그래서 마리아의 예언은 거짓이라고 믿었습니다. 또 다른 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열심당이라는 이름하는 젤롯당원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B. C 163-4년 어간에 헬라제국의 통치 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로마 제국으로 넘어 오는 그 중간기에 의병을 이끌고 혁명을 일으켜 유대나라를 몇 년 동안 독립국가처럼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줄여서 마카비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그 혁명을 마카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혁명이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핍박도 받았습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을 물리쳤던 것처럼 우리도 로마의 황제를 물리치자. 무장하고 의병을 일으키자. 그래서 유대교 신앙과 무장봉기를 함께 합한 계층들이 이들이었습니다. 이 계층이 젤롯당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고 다니니까 혹시 이 사람을 통해서 의병을 일으킬 수 있을까하는 꿈을 가졌지만, 결국 예수는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인 나사렛 예수는 죽는다. 우리가 꿈꾸던 유대인의 왕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찾을 수 없다. 유대인의 왕은 허구다, 죽는다. 유대 백성이 꿈꿨던 평화의 왕은 죽는다. 이래서 나사렛 예수는 존재 가치 없이 십자가에서 죽어 갑니다.
이 광경을 보게 될 33년 뒤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아기가 태어났을 때는 유대인의 왕, 평화의 왕이었지만 33년 뒤에는 처참한 비극의 현장이 벌어집니다. 여러분은 오늘 입장에서 마리아가 되어 마리아 찬가를 읊는 다고 한다면 어떤 심정이시겠습니까? 그런데 죽은 뒤 3일 만에 마리아도 모르게, "인간의 지혜를 뛰어 넘는" 사건이 생깁니다. 죽었던 나사렛 예수, 죽었던 유대인의 왕이 살아났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평화의 역사가 골고다 언덕에서 생겼습니다. 찬양하리로다.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이렇게 노래 할 수 있지요. 빌라도와 유대백성이 생각할 때 처참하게 죽은 평화의 왕이 부활의 주로 살아났습니다. 그 살아난 부활의 주가 300년 지난 다음에 로마제국에 들어가서 로마제국을 다 석권 할 것이라고 누가 알았을까요. 로마의 어느 학자가, 어느 왕이 이 사실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까? 유대인의 왕이 죽었죠. 그런데 죽었던 왕이 부활하여 300년이 지난 다음에 로마 전체를 "유대인의 왕"의 품안으로 끌어안습니다. 기독교가 공인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천 년 지난 다음 서울 장충동에 경동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이 죽은 왕이 부활하여 오늘 우리 모두에게 평화의 왕으로 군림 하신다는 사실을 누가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사람의 예측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와 희망이나 사고를 뛰어넘는 엄청난 하늘의 역사를 메시아를 통해서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마리아가 읽었던 성경이야기, 베드로가 고백했던 성경이야기. 똑같은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는 전혀 변화된 21세기 상황에서 이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지금도 메시아는 우리 모두의 구세주 이십니다.
사람의 한계가 얼마냐에 대해서 저도 가끔 생각할 때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최근 읽은 신문기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64년 경희대학교 총장이시던 조영식 박사가 경희대 학생 1000명에게 설문을 했더군요. 1964년도에 혹시 대학에 계셨던 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때 신학대학 1학년이었습니다. 경희대학교가 50주년이 되는 1999년은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 이 질문에 제일 많이 답(28)은 99년이 되면 300달러일거랍니다. 64년의 평균 GNP가 120달러였더군요. 그러니까 64년도 대학생들 생각이, 당시 청년 엘리트들 생각입니다. 50년이 지나면 300달러로 당시의 두 배가 넘을 것이다. 당시의 지혜와 미래학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얼마나 됐습니까. 만 불이 넘었습니다. 100주년이 되는 2049년은 얼마나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답니다. 이 질문에 29학생들의 대답이 500달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여러분 2049년이 되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미국 연구소 보고를 보니까 한 8만 불정도 될 것이라고 합니다. 될 수 있는지는 물론 그때 가봐야겠지만요.
33년 골고다에서 죽었던 "유대인의 왕"이 부활하여 313년 로마 제국을 영적으로 통치하는 구세주가 될 것이라는 것을 누가 예상했습니까. 오늘 전 세계에 국적과 인종을 불문하고, 예수라는 사람을 평화의 왕으로, 임금으로 추앙하는 수많은 기독교 신앙인들이 이렇게 많을 것이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습니까. 사람의 예상은 가치는 있겠지만, 영구불변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 찬가를 들으면서 생각해봅니다. 마리아는 온 땅에 미칠 새로운 기쁜 소식을 전해 줄 메시아를 예언합니다. 찬양을 합니다. 이 메시아는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도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로 군림 하십니다. 메시아는 우리에게 오셔서 평화를 만드신다고 하셨습니다. 평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폭정을 베푸는 로마의 황제는 물러갔으면 좋겠다. 임금님이 왕좌에서 물어난다. 그정도였을 겁니다. 그 안에서 고통을 받던 유대 백성은, 비천한 사람들은 다시 일어 날 것이다. 그것이 평화의 왕에 대한 꿈이었을 것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다음 여러분은 오늘 어떤 평화의 왕을 원하십니까? 우리는 오늘날 깊은 양극화의 숲에 빠져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메꿔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이 마리아의 찬가는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을, 오늘 또 빌립보서가 주는 "기뻐하라"는 말씀을 합해서 마리아 찬가는 ‘오케스트라’라고 생각하고 다시 보십시다. 마리아 찬가에서 말하는 평화의 왕은 저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라고 생각합니다. 임금님 보고 너는 임금의 보좌에서 내친다고 왜 그랬을까요? 오케스트라에 참여하는 모든 악기는 각자 제각기 자기 특유의 소리를 냅니다. 똑같은 악기가 없습니다. 소리가 다 다릅니다. 큰 소리, 작은 소리, 무거운 소리, 가벼운 소리 여러 가지 소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악기는 자기 소리를 충실히 내야 합니다. 단, 어느 한 악기가 왕이라고 해서 모든 소리를 독점하면 안 됩니다. 어느 작은 악기가 작다고 해서 자기 소리를 비참하게 죽이면 안 됩니다. 소리를 내고, 제대로 내되,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서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것입니다. 악기소리의 중요한 점은 화음이 중요하지 자기 소리 자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자라고, 가난하다고, 높고 비굴하고, 교만하고 비참하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각자 주어진 소리를 내십시오. 그러나 화음을 내십시오.
그 말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말하는 국민통합과 같습니다. 화해입니다. 하나로 합한 화음입니다. 상생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오늘 예수께서 21세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러 오셨습니다. 부자가 돈이 좀 있다고 예수께서 시샘하느라 가진 것을 다 잃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각자의 축복을 최대한 발휘해서 악기 소리를 내라고 하십니다. 그 소리는 화음으로 악기를 부른 모든 사람이 서로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답니다. 화음의 소리가 우리가 정치적으로 말하는 아마 민주주의 사회일 것이고, 오늘 마리아에 입을 빌리면 모든 사람이 기뻐하여 "우리에게는 평화로다. 평화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 그렇게 영광의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상태의 세계가 평화의 세계일 것입니다. 아마 이런 세계를 마리아는 구체적으로 꿈꾸지는 못했으나, 예수께서 오시면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쁜 소식을 전하실 것이고, 그 소식이 오늘 우리에게 행복과 축복을 줄 것이라 확신했을 것입니다.
화음된, 화해된, 통합된, 그러면서 각자 다르지만 서로 합하여 평화를 이루는 이 아름다운 평화가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질 평화입니다. 이것이 저는 우리가 꿈꾸는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에서, 무용에서, 사고에서, 스포츠에서 어느 영역에서든지 이 평화가 오늘 주님을 통해서 이루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나라도 오케스트라이고, 우리 가족도 오케스트라입니다. 직장도 오케스트라입니다. 교회도 오케스트라입니다. 우리 화음으로 소리 냅시다. 아름답게 냅시다. 기쁨으로 냅시다. 모두 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그 예수께서 로마제국주의 그리고 유대주의도 넘어서 온 백성에게 오셔서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이 함께 찬양해야지요. 기뻐 춤춰야지요. 하늘 성가대의 평화 있으라는 찬양을 들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 영광을 노래한 만큼 예수께서 이런 분이시고, 그 분은 자비하셔서 온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분으로 오십니다. 오늘 오십니다. 맞아들이시지요. 화해하며 화음내며 기쁘게사십시다. 주님이 지휘하십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