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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진] 새로운 시간, 새로운 삶

윤응진·한신대 기독교교육학 교수

대학교회설교
1998. 1. 11.
새로운 시간, 새로운 삶
시편 73: 1-20, 고린도후서 5: 17-21


1. 신동엽이 꿈꾼 '새해'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기세가 서슬 시퍼렇게 살아 있던 1960년대 말에 요절한 민족시인 신동엽은 암담한 시절에 '새해'를 맞으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새해
새 아침은
산 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대화
우리의 눈빛 속에서
열렸다.

보라
발 밑에 널려진 골짜기
저 높은 억만 개의 산봉우리마다
빛나는
눈부신 태양
새해엔
한반도 허리에서
철조망 지뢰들도
씻겨갔으면,

새해엔
아내랑 꼬마아이들 손 이끌고
나도 그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
달나라나 한 바퀴
돌아와 봤으면,

허나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는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 짓는다.("새해 새아침을")

그렇습니다. 올해에도 "새해/ 새 아침은/ 산 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습니다.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았습니다.
새 아침은 기다리지 않아도, 추구하지 않아도, 갈망하지 않아도, 준비하지 않아도 그냥 던져지는 복조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금가루 흩뿌리는/새 아침은", 곧 분단의 철조망이 사라지고 광활한 우주로 뻗어 나가는 꿈이 실현될 새로운 시간은 "우리들의 대화/우리의 눈빛 속에서" 그리고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했음을 감지합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새로운 꿈을 담은 대화, 새로운 아침을 갈망하는 그 눈빛 속에서 군화발로 짓이겨진 한반도에 새로운 시간이 은밀히 그러나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신동엽이 꿈꾼 새해, 새 아침은 아직도 우리 앞에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을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새해'에 역설적으로 이미 신동엽의 꿈, 우리의 꿈이 실현되어 가고 있는 징조들이 우리들에게 물밀듯 다가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다만 환상의 종말, 거품의 제거 이후에 남는 허탈감 때문에 우리는 정작 새로운 아침이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외면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2. 히브리 시인의 새로운 소망

히브리 민족이 노래한 탁월한 신앙의 시를 쓴 한 시인은 그의 새로운 시작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시편 73: 1-2)

이 시인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가 어둠의 시간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3)입니다.
시인은, 악인들은 오만하고 폭력을 행사함에도 불구하고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르며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12) 그래서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13) 악한 자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반면에, 깨끗하게 살려고 애쓰는 시인은 오히려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그를 벌하신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의인의 길을 버리고 악인의 길을 따라 가고 싶은 강한 충동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마침내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17) 시인은 성전에서 비로소 악인의 종말을 앞당겨 보면서 악인의 길로 기울던 마음가짐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어느 절기 행사에 참여하여 야훼 하나님께서 지난 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회상하는 기회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파노라마에 비추어 볼 때에 악인의 부귀영화가 영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20) 하나님의 "새 아침"이 오면, 악한 자들의 부귀영화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고난의 길을 달려 온 의인이 하나님의 평화에 참여할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역사에 대한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거시적인 측면에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1)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회복하게 됩니다. 더 이상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시인은 유혹과 방황을 벗어나 하나님의 "새 아침"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도 악한 자들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그들처럼 말하면서 살고싶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에게 새로운 시간일 수 없었습니다. 운명처럼 감수해야 하는 시간, 순응할 수밖에 없던 그 시간은 어두움의 시간이고 옛 시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옛 시간의 긴 터널을 빠져 나와 새로운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전혀 새롭게 이해된 시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깨달음, 하나님의 역사 개입과 그 결과를 앞당겨 보는 '신앙의 눈'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옛 시간에 속한 자들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고난을 겪을 지라도 오히려 하나님의 "새 아침"에 참여하는 삶을 살고자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자 갈망합니다. 그는 어둠의 역사 한복판에서 '이미' 새로운 시간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의 몸과 마음이 다 사그라질지라도 늘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반석이므로 그는 두려움이 없다고 노래합니다. 그는 이제 악한 자들이 누리는 부귀영화로부터 초연한 사람입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주께서 이루신 일들을 전파하"(28)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생각, 새로운 관심, 새로운 꿈을 지닌 신앙인의 모습을 만나고 있습니다.

3.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삶

오늘 우리가 경청한 고린도후서를 집필한 사도 바울도 바로 그러한 신앙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처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고후 5: 17- 18) 그는 이미 같은 편지의 4: 16에서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아마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이미 성장기에 있는 청년이 아니라 나날이 늙어 가는 자신을 확인해야 하는 나이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음을 감격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온갖 박해 가운데에서 겪는 고난의 연단을 통해서 육체는 쇠잔해질지라도 그의 인격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이 경험은 그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누구든지" 체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새로워 짐"은 결코 자연스런 인격 성장이나 수양을 통한 정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분명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제 조건이 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전제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옛 시간 안에 머무는 우리에게 '이미'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옛 인간들과 옛 세계는 그를 거부하였으며 결국에는 십자가로 추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작은 무리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가 "우리들 안에"오시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자세에 머물지 않고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삶을 실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하기를 기다리는 데에서 머물지 않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옛 시간에서 형성된 낡은 인간성, 낡은 가치와 관점, 낡은 생활 방식과 행동 방식들을 헌옷처럼 벗어버렸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태도, 이기적인 행동방식으로부터 탈출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관점과 사고방식, 신앙방식, 생활방식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된 것은 노력없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옛 시간, 옛 세계, 옛 인간성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투쟁을 통하여 가능하게 된 혁명적 "변화"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삶으로의 철저한 변화! - 이 존재의 놀라운 변화야말로 크리스머스 이후의 시간 안에 있는 신앙인의 새로운 실존의 특징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강조하여 말합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 나라 혁명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까지 감수하면서 옛 시간을 다스리는 악한 세력과 싸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옛 시간을 다스리던 악한 세력에 굴종하거나 순응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간,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여 스스로 철저히 변화된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종교적 경건이나 어떤 공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절"(20)로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새로워짐은 그 자신의 인격의 변화에 머무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혁하는 "하나님의 일꾼"(6: 4)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세상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순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를 변화시키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보다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금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축복해 주기를 갈망하게 되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관, 이데올로기, 생활양식을 변화시키려 도전하기보다는 순응하고자 원하는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아침을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위험한 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위험한 모험'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와 짐"이 의미하는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바울이 살던 세상보다는 삶의 조건이 훨씬 개선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박해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박해를 받지 않는 것이 단순히 세상이 하나님 나라에 상응하도록 변화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 진 피조물"로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4. 새로운 시간, 새로운 사명

새로운 시간은 새해를 여는 보신각 종소리를 통하여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워지려는 인간들이 없이는 새로운 시간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새로운 소망의 징조를 찾기가 어려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크리스머스 '이후'의 시간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하나님은 한반도를 뒤덮고 있는 어두움과 죽음의 역사를 빛과 생명이 넘치는 역사로 변혁시키기 위하여 '이미' 크신 손길을 펼치셨습니다. 꿈처럼 정권교체의 갈망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옛 시간 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들의 심판이 임박하였음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둘러싼 축제는 이미 정당성을 상실하였습니다. 지금은 심판의 시간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마저도 하나님 대신에 물질과 권력을 숭배하던 길에서 돌아서야 하는 심판의 시간입니다. 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된 사실이 알려진 후에 기독교계 어느 주간신문의 토픽 표제는 "내려주시던 축복 왜 중단하셨나?"였습니다. 외채를 얻어다가 흥청거리며 소비 향락을 즐기던 시절에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선전했던 교회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당혹스러움 속에서 심판이 시작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금송아지를 둘러싼 축제를 주관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판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축제를 벌이던 히브리인들에게 내려졌던 심판과 다름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깨달음만이 우리의 방향전환의 첫 출발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암담하고 추운 역사의 겨울 한복판에서 우리의 방향전환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은총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심판은 우리의 멸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시간은 심판과 동시에 구원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지금은 서로를 향하여 "네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저 히브리 시인처럼, 사도 바울처럼 철저히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사고방식, 그리고 새로운 신앙방식과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절망감만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1998년 한해를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새로운 세계를 이루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희망을 전하는 사명을 다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새로운 시간으로 초청하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사명을 안겨주십니다.

저는 말씀을 마치면서 암담한 일제치하에서 살아가던 윤동주의 "서시"를 함께 경청하고자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올 한 해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할 수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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