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회설교
2003.3.9.
바벨탑은 무너져야만 한다!
(창세기 11:1-9)
1. 들어가는 말: 어떤 죄가 문제되는가?
이번 주부터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 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상기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께서 대체 무엇에 저항하다가 그런 고난을 받으셨는지를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은 인간들을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죄악의 정체에 대해서는 매우 도덕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체 그 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어떤 죄에서 인류를 구원하려 하였을까요?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확대되고 마침내 심각한 파국을 초래하는지에 대해서 가장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은 창세기 3-11장 사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른바 '원역사'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원역사(Urgeschichte: 역사이전의 역사)란 실제 발생한 구체적인 역사라기보다는, 인간의 역사가 있는 곳에서는 늘 반복되는 일종의 역사 모델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원역사는 인간의 죄악이 점점 더 증대되고 확대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가인의 형제살인죄로 이어지고, 그것이 라멕에 이르러서는 무제한적인 보복을 위해 폭력을 사용할 것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제 바벨탑 설화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하나님께 대한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반역으로 확대됩니다. 바벨탑 설화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의 총체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벨탑 설화의 의미를 되새겨 봄으로써, 사순절 주간에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범죄적 사고방식과 태도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바벨탑 설화의 이해
고대 바빌론 지역에는 이미 기원전 2천년 대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꽃피었습니다. 도시국가가 형성되었고, 도시 중심에는 벽돌로 만든 지구라트(탑을 지닌 신전)가 건설되었습니다. 이 지역에 고대 바빌론 제국이 세워졌습니다. 제국의 6대 왕인 함무라비(기원전 1728-1686)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후에, 법과 질서 수립을 위해 함무라비 법전을 편찬하였습니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입니다. 이 제국의 중심도시인 바빌론은 세계의 심장부로 간주되었고, 세력의 중심이었습니다. 바빌론의 문화는 이웃 나라들에까지 흘러 들어갔습니다.
바벨탑 설화는 이러한 바빌론제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제 성서 본문으로 돌아가서, 성서기자의 눈에 바빌론 제국의 바벨탑이 왜 문제가 되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에 따르면, 인간들이 동쪽으로부터 대규모로 이주해 오다가 시날(페르시아만에서 볼 때,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갈라지는 곳에 형성된 평원, 현재 이라크 지역에 속함) 땅 한 들판에 이르러 정착하였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 나타난 한 무리의 인간들은 도시를 이루고 강력한 단결력을 과시하기 위해 하늘에 닿을 탑을 세우려 했습니다.
우선 그들은 벽돌을 만들어내는 법을 개발하였습니다. 인간들은 자연을 가공하여 그들의 욕구에 알맞은 도구로 변형시킬 수 있는 과학적인 기술을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기술로 그들은 도시를 더 잘 건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모든 힘들은 중앙으로 집중되어야 했습니다. 바벨탑은 이러한 힘의 통일성의 표식이었습니다.
기술을 개발하고, 그 기술의 도움으로 인간의 힘을 한 곳으로 집중하는 것은 유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이름을 떨치자(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만들자, Wir wollen uns einen Namen machen)"라는 그들의 결의입니다. 바로 이 말에 늘 인류의 역사를 위태롭게 하였던 위험한 요소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만들자"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말은 오늘날 흔히 "우리는 유명해지기를 원한다"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표준새번역판은 본문을 이런 의미로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명예욕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명예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인류의 역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들에게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였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서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하고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셨습니다(출 3:14).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표준새번역판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그러나 독일 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 현존한다. 나는 너희를 위해 현존할 분으로서 너희를 위해 현존할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의 본질, 즉 그가 누구인지를 해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2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의 이름을 '아담'('사람')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아담'이란 흙을 뜻하는 '아다마'에서 유래하였으므로, 결국 '인간'이란 '지상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43:1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너의 이름을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내가 너에게, 네가 누구인지 말하였다: 너는 나의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피조물이며, 흙에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과 결합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빌론 도시를 세우는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스스로!) 만들자."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 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척도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무엇이 인간을 구원하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인간을 어떻게 단결시킬지 요령을 알고 있다. 기술과 조직력이 수단이다."
세계도시 바빌론과 바벨탑 건설의 동기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자들이 자신들의 통일된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술과 조직력을 동원하여 인간은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르려 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바벨탑 건축 동기가 지닌 범죄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서기자는 고도의 문명을 구가하던 옛 제국의 실체를 그렇게 파악하였던 것입니다. 바빌론 제국이 이룬 발전과 위대한 업적들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결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본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5)고 합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암시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지어놓은 위대한 작품, 즉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라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건축물들을 보려고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룬 위대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게 하찮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같은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단결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방종이 가져올 위험성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염려하십니다: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6) 인간들의 방종을 방치해 둘 경우, 타락은 더욱 진척될 것이며, 결국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처벌은 더욱 혹독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예방조처를 취하기로 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언어를 혼란시킴으로써 인간들의 통일성을 깨뜨리십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도시와 바벨탑을 세우는 일을 중지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의 언어를 흩어놓았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종류의 언어들을 만들어내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언어로도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사가 소통하는 대화가 아니라 다만 독백처럼 각자 지껄이는 소음만이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더 많이 말하면 할수록, 서로에 대해 더욱 더 낯설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인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그의 이웃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가혹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매일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서를 기록한 히브리 신앙인은, 고대 바빌론제국의 문명을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여야 하는 이상형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문명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파헤침으로써, 그 문명으로부터 결별하는 것만이 인간 구원의 첫발을 내딛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 히브리 신앙인을 신학자들은 야훼스트, 즉 'J(문서) 기자'라고 부릅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다윗과 솔로몬 왕국이 세력을 떨치던 때였습니다. J(문서) 기자는 고대의 바벨탑 설화를 통하여 아마도 당대 제왕들의 통치방식에 비판적인 문제제기를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솔로몬의 독재정치는 당대로 끝이 나고, 그가 죽은 후에는 신하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분열됨으로써, 대제국으로 발전되는 길이 막히게 됩니다. 히브리 신앙인의 눈에는 아마도 왕국의 분열이 히브리식 바벨탑 건설을 방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여겨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
바벨탑 이야기는 고대 바빌론이라는 장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대의 전설이지만, 동시에 늘 새롭게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고대 바빌론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인류의 역사의 표본적인 사례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원역사는 인간의 죄가 점점 더 증대되고 확대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들이 기술과 조직력을 앞세워 시도하는 독자적 세력 확대에 대한 추구가 어떻게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역사에서 인간들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은 그 인간들을 보호하고 돕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들과 새로운 시작을 감행하십니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에는 은혜의 말씀이 없습니다!
바벨탑 이야기 뒤를 잇는 것은 노아의 아들인 셈의 족보입니다. 그 족보 끝 무렵에 아브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인간의 역사에서 셈족을 선택하셨고, 그 가운데서도 아브람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이어지는 족장들의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의 인간구원 프로젝트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구원의 역사에 참여한 첫 사람이 바로 아브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지상에 사는 모든 민족(12:3)을 축복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원역사의 보편적 시야가 갑자기 좁혀지고, 모든 관심이 한 개인에게 집중되는가 했더니, 또 다시 시야가 온 인류를 향해 넓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구원사의 절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운명론적인 수난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능동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예수께서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럽과 근동지방을 지배하던 로마 제국의 모습이 고대 바빌론 제국과 흡사하였습니다. 아니, 엄청난 폭력을 사용하는 철권통치를 통해 모든 인간의 생각과 삶의 스타일을 획일화함으로써 세계를 통일시키려 했던 로마제국은 고대 바빌론 제국보다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구조악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행세하려 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습니다. 역사이래 예전에 없었던 통일이 이루어졌으며, 마침내 '로마의 평화'가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억압과 착취로 유지되는 거짓평화였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로마제국도 '바벨탑'을 높이 쌓아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로마 제국이 추구하는 '바벨탑'에 저항하여 예수께서는 온 몸을 저항하였던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려 무릎을 꿇었을 때, 로마제국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무효화되었습니다. 바벨탑의 토대를 위태롭게 하는 예수야말로 정치적으로 위험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 특히 대제사장은 스스로가 쌓은 바벨탑을 보전하기 위해 예수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제국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식민지 유대 땅의 실권을 유지하려던 대제사장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에서 자신의 권위와 권세가 무효화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구실로 예수를 처형하도록 빌라도에게 넘겨 버렸던 것입니다.
고난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포기할 수 없었던 일은 바로 저 바벨탑들을 허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행동하려는 인간들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범죄행위에 맞서서 그는 투쟁하였던 것입니다. 그 투쟁에서 고난받고 살해당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함으로써 예수께서는 그 바벨탑의 그늘에서 억압받고 착취받던 희생자들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 주간에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감행하셨던 바벨탑 허물기에 동참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맺는 말: 바벨탑을 허물라!
바벨탑은 오늘날도 도처에 있습니다. 스스로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 전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시도야말로 바벨탑 쌓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과 다른 입장에 있는 다른 나라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독선과 오만은 끝이 없습니다.
미국의 편에 서면 옳고 미국에 저항하면 악하다는 위험한 이분법을 사용하면서, 부시는 국제사회를 미국이 주도하는 단일체제로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라크와 북한의 대량학살 무기 개발을 구실로 전쟁을 감행하려는 미국이야말로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량학살 무기들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새로운 무기들을 개발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예산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지니고 있는 무기는 평화유지용이고, 다른 나라가 지니고 있는 무기는 공격용이라는 논리가 얼마나 거짓인지는 현대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이라크 공격이야말로 현대판 바벨탑을 쌓기 위한 것입니다. 온 세계를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성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횡포인 것입니다. 미국식 바벨탑도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아니,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미국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조지 부시 미대통령의 전쟁몰이에 대해 저항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미국의 노선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미 의사소통에 장애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고는 하나, 이미 부시의 말과 전혀 다른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40년 간 백악관 출입기자로 활약해 온 헬렌 토머스(82) 기자는 얼마 전 열린 올해의 기자상 시상식 연설에서 미국 지도층의 타락과 기자들의 비판의식 저하를 나무라면서 "부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는 부시가 9.11테러 이후 만연한 공포를 이용해서 일어선 사람이라고 혹평하면서, "우리는 길을 잃었다"고 개탄했습니다. 아울러 부시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 부시에 대해서는 "자기 파괴적인" 인물이라 평했다고 합니다. ({한겨레신문} 2003.1.30. 9면)
미국의 저명한 투자가인 조지 소로스는 이라크 침공을 추진하는 조지 부시 대통령과 보좌진이 '제국주의적 시각'과 '국제협력 혐오증'을 지녔다고 비판하였습니다.({한겨레신문} 2003.3.3. 25면)
지난 3.1절에 한국에서는 교회가 주관하는 전혀 다른 성격의 집회들이 두 곳에서 열렸습니다. 미국을 구세주로 착각하는 보수진영의 집회는 참으로 통탄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미국에 대한 비판의식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이 당당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와 사회를 지배하던 그토록 견고하던 미제국주의의 아성이 이처럼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식 바벨탑을 무너뜨리기 위한 저항에 적극 동참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우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벨탑은 멀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없이 우리자신이 우리 스스로에 대해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속에도 바벨탑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나를 순종하기보다는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우리의 태도 속에도 바벨탑이 쌓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할 때, 하나님의 뜻은 고려하지 않은 채, 나의 뜻만을 관철시키려 할 때, 거기에도 바벨탑이 있습니다.
사순절 주간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이름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이름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즉 바로 이 이름 안에서 서로 사귀고 섬길 때, 우리 가운데에 있는 바벨탑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이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처럼, 그의 고난에 동참하여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바벨탑들을 허물어 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참된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며..... 그렇게 사순절 주간을 살아갑시다. 그리고 이라크와 북한의 형제자매들의 생명을 지켜주시기를 하나님께 함께 간구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