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신문의 젊은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에큐메니컬 진영의 편집고문을 세운다고 해서 진보 신문이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에큐메니컬 신문을 시작하려고 하니 에큐메니컬 지도자들로부터 자문을 받으면서 가려고 한다”고 답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베리타스>의 논조를 가지고 물고 늘어졌다. 보수적인 신문사 기자로 활동한 사람이 진보 신문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문은 말로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라 논조로 보여주는 것 아니겠냐”며 “시간이 지나면 (에큐메니컬적인 논조가)자연히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기자가 기사를 하나 써냈다. 기사의 요점인 즉, 신문사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신문사를 편집고문들이 왜 도와주느냐는 것이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앞서 편집고문들이 신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로부터 “문제가 있는 신문사에 왜 편집고문으로 일하시냐”는 협박조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가뜩이나 좁은 기독교계에서 동종 업체 간 상생 발전을 꾀하지는 못할 망정 갓 생긴 신생 언론을 상대로 정체성을 운운하며 흠집을 내려고 한 것이다.
신문을 시작한 지 4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앞서 이 기자가 일하는 혜화동 부근의 신문사를 찾아가 편집장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 편집장은 지난 8년간 교회개혁을 외치는 진보 언론으로 그 정체성을 잡아갔다고 했다. 언론이 생겨 정체성을 잡아가기에는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다는 말이었다. 공감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신문사에서 <베리타스>의 정체성을 트집 잡는 기사를 썼다. 뒤통수를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정체성을 따지자면 교회개혁을 부르짖으며 진보 언론을 표방하는 이 신문에 할말이 더 많다. 이 신문의 편집장은 과거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의 기관지 기자로 수년간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으며 현재는 그보다 더 보수적인 교단으로 알려진 고려 재건파 소속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줄곧 보수적 색채가 강한 교단지, 교회에서 보수 신앙 훈련을 받아 왔다는 얘기다. 정작 흥미로운 것은 본인 스스로도 진보가 아니라는 말을 곧잘 한다는 것이다.
지인들에 따르면 그가 합동 교단지를 관둔 것은 그가 지닌 진보, 개혁 성향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진보가 아니라고 거침없이 말하며 교회개혁 세력으로만 입지를 굳히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런 성향을 알고보니 진보를 외치던 전 편집장과 마찰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알만 했다.
그러나 보수 중의 보수인 고려 재건파 소속인 이 신문사의 사장은 편집장과 달리 진보를 부르짖고 있다. 한 신문사의 사장과 편집장이 서로 엇박자를 놓고 있는 것이다. 지난 8년간 만들어 왔다던 그 정체성이 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상당수 독자들 조차 이 신문의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얼마 전에는 한 편집고문으로부터 전화 한 통화가 걸려왔다. 신문을 잘 만들고 있다고 격려한 이 편집고문은 보도가 미흡한 파트에 신경을 좀 써달라고 따금한 충고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목적도 방향도 없는 정체성 모를 모 신문사 보단 나은 모양이다.
제 눈의 들보를 먼저 보지 않고 남의 눈에 티를 빼려고 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