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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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베리타스 DB |
그런데 만유의 신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이렇게 우리가 뭔가 성의를 표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호의로 대하고, 성의가 부족하면 냉대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원시적인 종교심이 과학의 시대라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신자들의 신앙 의식 저변을 장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용왕 신앙의 후유증이 그 알맹이만 바꾸어 구조적으로 기독교 신앙에도 이식되어 나타나는 셈이다.
이에 따르면 화산활동이나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동네 사람들은 뭔가 신을 노엽게 한 것이 된다. 성서의 일각에서도 이런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성서가 기술되고 전승된 고대의 세계관이 워낙 이런 종교적 공포심을 배경으로 형성된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증명하기 불가능한 신의 노여움을 달래 주고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명목 아래 사람들이 용을 쓰듯 벌이는 예배의 열심이란 게 있다. 실제로 많은 경건한 신자들의 노골적인 의식 또는 희미한 무의식 가운데는 개인의 사적인 경건 차원이 아니라 그럴듯한 건물에 그럴듯한 상징적인 분위기를 갖추고 가급적 많은 인원이 회집하여 반듯한 형식을 구비한 채 드리는 예배가 많을수록, 그리고 잦을수록 신의 호의와 축복을 견인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예배 중에서도 새벽 예배가 응답의 약발이 세고 신령한 기쁨의 강도도 가중되는 듯한 인식이 종교적 인습처럼 대중의 저변에 확산되어 왔다. 시편의 다윗이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한마디 노래한 것과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기도했다는 복음서의 두어 군데 기록이 그 성서적 근거의 전부다. 열심히 헌금을 바치고 교회의 이런저런 행사에 충성되게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호의를 최대한 이끌어 내기 위한 적절한 마중물처럼 인식되곤 한다. 행여 이런 쪽으로 미흡하거나 부실하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징계라도 받지 않을까 은근히 불안한 분위기가 조장되기도 한다. 이 모두 용왕신의 잔재와 무관치 않다.
이런 용왕 신앙의 후유증은 하나님을 인정투쟁의 볼모로 잡아 두고 마치 뭔가 부족하여 인간들의 섬김을 강요하는 포악하고 인색한 신의 이미지를 걸치고 있다. 좀 더 점잖게 변론하는 분들은 하나님이 성육하여 이 땅에 자신을 낮췄다고 우리까지 낮추면 어떻게 하느냐며 우회적으로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며 특별한 호의의 은총이라도 기대하듯 다소 분방한 언행들에 핀잔을 준다. 하나님이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우리는 기를 쓰고 '안 괜찮다'며 자꾸 자책하고 자학한다. 그걸 무마하느라 관성적으로 멋들어진 말들을 꾸며 하나님을 칭송하고 온갖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여 그의 존엄함을 찬양하기 바쁘다.
하나님은 자족적인 존재로서 우리의 이런 요란한 호들갑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만유의 주님이신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로 하나님께 정보를 제공하며 고자질하고 온갖 예쁜 짓을 도맡아 하느라 여념이 없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뭘 자꾸 가져다 바치는 건 그만 하고 이 땅에 공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길 원하는데, 우리는 하나님한테 그 공의의 책임을 떠넘기면서 여전히 그 앞에 아부 아닌 아부를 늘어놓고 아양 아닌 아양을 떨면서 그럴싸한 신학적 담론과 신앙 고백적 언어로 점잖게 분칠하기 바쁘다.
성육하신 예수님은 너희가 구하기 전에 아버지께서 다 아신다고 말씀하셨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그 주권적 통치와 의가 뭔지 여전히 헷갈려하면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어록을 문자적으로 내세워 세세하고 오밀조밀하게 간구하는 일에 열중한다.
하나님이 씨족공동체 시대에 살던 사람들과 소통하실 적에 그들의 씨족신처럼 운신하며 그들의 언어 반경과 인식의 한계 내에서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 사람들은 그들의 당대 언어로 그런 신을 경험하며 고백했다. 야곱은 제 고향을 떠나 먼 나그네 여정에 들었을 때 낯선 곳에 잠자고 깨어난 뒤에야 자신이 의지하던 그 신이 제 고향을 수호하는 씨족신의 지경을 넘어 외지의 낯선 땅까지 관장하는 하나님이란 걸 깨달았다.
그 하나님은 인간의 신학적 인식의 진화 과정과 맞물려 꾸준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면서 더러 예스러운 전통을 다시 끄집어내기도 하지만 제의법을 넘어 도덕법으로, 자국민 선민주의를 넘어 이방인까지 포용하는 개방주의로, 특수한 경험을 넘어 보편적 인식으로, 만유의 세계로 진보의 궤적을 개척해 나가셨다. '전사'(warrior)로 대적들과 앞서 싸우시고 다른 신들과의 비교나 경쟁에서 '질투하시는 여호와'의 이미지는 만민을 구원하시는 우주적 하나님의 '열정'으로 재편되어 나갔다.(헬라어 zelos에는 '질투'와 '열정'이 한 덩어리의 개념으로 엉켜 있다.)
바벨론 포로기를 전후한 역사 경험과 시편의 탄식 시, 욥기와 전도서 등을 통해 그 하나님을 극적으로 만난 많은 신자는 공동체의 연좌제적 틀을 깨고 제 존재의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하고 하나님 앞에 치열하게 탄식하며 항의하는 당돌한 주체로서 자신의 삶에 개입하는 앎의 반경을 확장시켰다. 예수님은 탐구자와 구도자로서의 제자도를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세 마디에 압축시켜 따르는 이들을 향해 기존의 질문을 넘어선 질문, 기존의 해답을 넘어선 해답을 기대하셨다.
이제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만유의 주님으로 그를 섬기는 우리의 자발적 열심에 고요한 미소로 화답하신다. 소박한 우리의 경배와 은밀한 간구에도 고요한 미소로 화답하며 네 생명 속에 뭣이든 수행할 만한 역량도 제공했고 격려할 만큼 했으니 이제 네가 모험하고 개척하며 스스로 감당해 보라고 권고하시는 듯하다. 그동안 많이 받아먹는 시늉을 해 주었으니 이제 그만 가져다 바치고 제 재량껏 선한 일에, 그 나라와 의를 이루어 내는 좋은 사업에 흔쾌히 투자하고 증여하라고 속삭이시는 듯하다. 무엇보다 생명을 북돋우고 살리는 일에 사랑의 에너지를 발현하여 협력하고, 피곤한 사람들 자꾸 새벽에 깨워 시끄럽게 울부짖게 하다가 일터나 학교에 나가 닭처럼 조는 우스꽝스러운 짓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시는 듯하다.
하나님이 그동안 역사를 통해, 자연을 통해, 성경을 통해, 그만큼 가르치고 보여 주고 암시했으면 이제 그만 당신을 놓아 주고 스스로 어른이 되어 그렇게 배우고 깨닫고 발견한 진리를 열심히 실천하며 서로 다투지 말고 즐겁게 잘 살라고 권면하시는 것 같다. 웬만한 재롱은 가끔 재미있게 봐 줄 만한데 그것을 제 인정 욕구와 성취 동기에 짬뽕시켜 당신을 인정 투쟁의 볼모로 삼는 것은 좀 심하다고 역시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우리의 신앙적 엄숙주의에 퉁을 놓고 농담 한마디 건네실 기세다. 이제 고대와 중세와 근대의 하나님을 놓아 주면 어떨까.
그 하나님과의 오래된 추억을 소중히 여기고 가끔 재생시키는 건 좋아도 그런 주관적인 취향을 자랑 삼아 설교의 위엄을 부리며 폼 잡고 하나님을 더 웃기게 하는 일은 조금씩 절제했으면 좋겠다. 그 여유 있으신 하나님은 잠잠히 말씀하신다. 그동안 나는 많이 먹었으니 이제 너 먹으라고. 내가 아주 멀리 떠나도 너와 함께 있을 테니, 이제 내 이름 그만 부르고 나 좀 놓아 주라고. 내 이름 없는 곳에서 나를 좀 참신하게 다시 탐구하고 발견해 보라고. 이제 걷지만 말고 좀 날아 보라고. 그만 학대하고 향유해 보라고. 너희들의 요란한 고백과 춤과 노래와 충성과 헌납이 없이도 나는 애당초부터 스스로 만족하는 충만의 존재였노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