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예레미야 애가 5:1-5,9-10,21
“주님, 우리가 겪은 일을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 주십시오. 유산으로 받은 우리 땅이 남에게 넘어가고, 우리 집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가 되고, 어머니는 홀어미가 되었습니다. 우리 물인데도 돈을 내야 마시고, 우리 나무인데도 값을 치러야 가져옵니다. 우리의 목에 멍에가 매여 있어서, 지쳤으나 쉬지도 못합니다. 먹거리를 얻으려고, 쫓는 자의 칼날에 목숨을 내겁니다. 굶기를 밥먹듯 하다가, 살갗이 아궁이처럼 까맣게 탔습니다. 주님, 우리를 주님께로 돌이켜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셔서, 옛날과 같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에베소서 3:9-12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려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영원한 뜻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13:51-5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것들을 모두 깨달았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예”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예수께서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뒤에, 그 곳을 떠나셨다. 아멘.
설교문
94년 전 오늘 3.1절, 우리 조상들은 식민시절의 수난과 함께 예배를 드렸읍니다. 우리나라가 1910년부터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이로부터 5년 전 을사보호조약으로 인해 1905년 11월부터 이미 우리나라는 실질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 들어갔습니다. 고종의 장례 날이었던 1919년 3월 1일, 수많은 교회들과 여러 동네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만, 이 날 종로 2가의 태화관에서 33인의 민족 대표 중 29명이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이어서 탑골공원, 그리고 전국의 교회와 동네에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우리 교회사 기록을 보면 1919년 만세 사건이 있기까지 일본의 식민지 하에서 고생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고 분노에 차서, 각 교회의 설교 때마다 가장 많이 읽힌 성경이 예레미아서라고 합니다. 예레미아서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으로 읽었던 부분이 오늘 봉독하여 들으신 예레미아 애가서 입니다. 애가서는 “아, 슬프다”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독립선언서가 “오호, 통재라” 하며 시작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레미아 애가서는 우리 민족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식민지 치하 전, 후에 실제로 경험한 엄청난 아픔을 시, 수필, 문학의 형태로 고백하여 쓴 글입니다. 실로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은 거의 모두 식민지 시절에 쓰여진 것들인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아주 잔혹한 식민지 치하에서 경험한 것들을 낱낱이 고백한 것이 예레미아 애가서입니다. 오늘 댁으로 돌아가셔서 우리가 당했던 식민지 치하의 아픔, 분노, 좌절을 눈으로 그리며 예레미아 애가서를 한 번 읽어보십시오. 그 말씀이 정말 우리 가슴에 와 닿을 것입니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동북아시아 강대국들에 쌓여있습니다. 한참 왼쪽으로 가서 중동지역을 보면 지중해를 끼고 작은 이스라엘이 있고, 그 주변을 시리아, 터키, 요르단, 이라크,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까지 강대국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식민지 경험이 없었다고 해도,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를 비교해서 생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겪은 36년보다 이스라엘은 훨씬 오랫동안 강대국의 식민지 경험을 했고, 우리 두민족은 고난 속에서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서로 마음이 가까워져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구약 성경, 특히 예레미아서를 비롯한 예언서를 읽으며 그 내용이 마음에 크게 와 닿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역사적 맥락이 같음에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일제시대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민지 시절 이야기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 대신 전합니다. 이스라엘의 경험을 들으시면서 우리의 경험을 되새겨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레미아 애가서를 읽으셨지요. 이스라엘의 당시 역사는 이랬습니다. 솔로몬까지 아주 창대한 역사를 지닌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죽음 이후로 왕자들의 난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갈라집니다. 12개 지파 중 10지파가 합하여 북쪽에 왕국을 세우고, 2개 지파만 남쪽에 유다를 세웠습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은 이미 아수리아에 무너져서 식민지가 된지 오래고(BC 721), 남쪽의 유다는 어느 정도 버티다가 B.C. 587년에 바빌로니아의 속국이 됩니다. 오늘 예레미아 애가서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시대만 압축해서 말씀 드리려 합니다.
유다의 마지막 임금인 여호야긴은 18살에 왕위에 등극했습니다. 그 때가 B.C. 597년으로 속국이 되기 10년 전인데, 이는 마치 우리가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기 5년 전에 을사보호조약으로 이미 일본의 지배 하에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597년에 여호야긴이 왕이 된지 3개월이 되었을 때,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성전과 왕궁의 모든 보물을 약탈해갑니다. 왕을 납치하고, 모든 왕족, 귀족, 군 지도자들 전부를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고 갑니다. 예배 드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사장들도 포로로 끌고 가고, 선지자들을 전원 추방하고, 그 나라의 기술 인력들을 바빌로니아에 데리고 갑니다. 당시 유대 땅에 있던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분야의 모든 지도층 전원이 바빌로니아로 강제출국 당한 것입니다. 약 1만 명이 포로로 잡혀갔죠, 그러니 농사 짓는 사람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바빌로니아는 폐위당했던 여호야긴의 작은아버지, 시드기야를 꼭두각시 왕으로 세웁니다. 그런데 이후에 시드기야 왕이 이지트와 짜고 바빌로니아에 저항하는 운동을 지원해줍니다. 10년이 지난 뒤 바빌로니아의 화가 난 느브갓네살 왕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다시 침공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둘러싸고 예루살렘과 외부의 모든 무역과 접촉을 2년 동안 단절시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단절된 예루살렘에는 먹고 입고 마실 것이 없어집니다. 그 때와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예레미아 애가서 성경말씀 몇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주님, 살펴주십시오. 주님께서 예전에 사람을 이렇게 다룬 적이 있으십니까. 어떤 여자가 사랑스럽게 기른 자식을 (배가 고파서) 잡아 먹어야 한단 말입니까… 주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집전하는 제사장과 예언자가 칼에 맞아 죽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젖 먹는 아이들이 엄마 젖을 빨다가 젖이 안 나오니 어린 아이들의 혀가 입 천장에 붙습니다. 먹을 것 좀 달라고 아무리 해도 물 한 모금 하나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 차라리 굶어 죽기보다 한 칼에 맞아 죽는 게 편하겠습니다. 서서히 굶어 죽기보다 아예 다쳐서 한 순간에 죽는 것이 훨씬 행복하겠습니다... 젊은이와 늙은이가 길바닥에 쓰러지고, 처녀와 총각은 칼에 맞아 넘어집니다. 또 난자 당합니다. 주님, 어쩌려고 이러시지요. 주님은 계시는겁니까, 우리를 버리신겁니까. 주님은 약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뜻이 계십니까…” 이런 얘기가 예레미아 애가서 1장부터 5장까지 담겨 있습니다. 일본의 만행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36년으로 잔혹한 식민생활이 끝났습니다만, 그 당시의 애환의 모습은 한일 관계에서 지금까지도 역사왜곡의 모습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70년 동안 바빌론의 식민포로생활을 했으나 그 뒤에 페르시아, 그 뒤에는 헬라 제국, 또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는 와중에서 이스라엘은 이미부터 나라를 영구히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36년이 끝나고 1945년에 독립해서 비록 분단되었습니다만 대한민국을 이렇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2,500여년 동안 나라 없이 살다가 1948년에 현재의 이스라엘이라는 독립국가를 세웠습니다. 중동지역의 세계 흐름을 보면 이렇습니다. 지긋지긋하게 고생했던 이스라엘은 현재 이라크(과거 바빌론)와 강력한 군사적 안보 문제로 싸우고 있고, 이란(과거 페르시아 제국)과는 핵무기 공격과 관련한 갈등문제가 있고, 시리아(과거 아수리아)는 현재 멸망 직전에 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던 나라가 이제는 아랍권에서 군사강국으로서 독자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작은 나라로 식민지 치하에서 고생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이 땅에 자유와 평등과 행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처지에 와있습니다. 3.1절, 그 날로부터 94년이 지났습니다. 독립운동이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한참이 지난 뒤에 우리는 독립을 얻게 되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죠, 그런데 세계역사의 모든 제국주의는 예외없이 똑같습니다. 이제는 제국주의도, 식민주의도 없어야 합니다. 도대체가 우리 인류는 "애가서"를 얼마나 더 쓰면 되는 겁니까? 이제는 행복과 평화를 노래하고, 전 세계를 향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옛날을 거울 삼아서 새 날을 창조해가야 합니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하신 최남선씨는 훌륭하신 분이시지만,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최남선씨가 독립선언문을 기초하셨늠데, 1957년에 YMCA의 상징적 지도자였던 전택부 목사님을 만나서 나누었던 선언문 기초 당시의 이야기가 대담록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최남선씨가 하셨다는 얘기입니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는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사상에서 기독교적인 요소를 빼면 전혀 내 사상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내가 독립선언서에 담았던 독립, 자유, 정의, 평등 이 네 말은 기독교에서 왔고, 성서에서 배운 것입니다.”
최남선씨가 기독교의 용어를 써서 좋다기보다, 성경 말씀 속에 담겨있는, 종교와 상황을 초월하여 온 민족이 가져야 할 우주적 가치인 독립, 자유, 정의, 평등이 모든 사람에게 삶의 가치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최남선씨가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 가운데 예레미아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유이시다,” “하나님은 자기가 세운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으므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기의 권한, 존엄성과 인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인 신권을 인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얼 연유입니다. 인권은 곧 신권이고, 인도주의는 곧 신도주의입니다. 평등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입니다. 정의는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강물처럼 흐르는 삶의 방식입니다. 자유는 누구도 구속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94년 전에 읊었던 가치관이 아니고, 오늘도 유효한 우리의 가치관이고, 성경말씀에 쓰인 기본 가치관입니다. 이 가치관은 남쪽 사회에서 오늘날에도 실천되어야 할 가치관입니다. 또한 북쪽 사회에서도, 우리를 식민지 통치했던 일본에서도 지켜져야 할 가치관입니다. 온 세계가 이 가치를 존귀하게 여기며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94년 전 우리의 외침이었고, 또 오늘의 외침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예레미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하나 하십니다. “구하는 모든 이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마. 정의와 평등, 인권, 존엄을 선물로 주마. 굽히지 말고 이 선물을 실천하여라.” 우리는 오늘 94년 전을 기념하는 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이런 가치관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내일도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에게 지금까지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었는데, 이제 다 듣고 보니 무언가 깨달음이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제자들이 “네” 하고 대답합니다.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 성경말씀에 설명이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부연하여 설명하면 대체로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정의, 평화, 인권, 존엄이 옛날에 준 것이라고 해서 낡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옛날에도 숨쉬었듯이, 지금도 숨쉬고 있다. 내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도 자유의 나라, 정의의 나라, 평등의 나라, 인권의 나라이다. 여기에도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고, 이 하나님은 앞으로도 역사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나라가 아니라, 옛날 옛적 천지창조 때부터 있어온 나라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고난 가운데서, 기쁨 가운데서 여러분이 맛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옛날도, 지금도, 내일도 똑같이 역사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옛 것과 새 것을 찾아서 구분하며 배울 줄 아느냐. 1919년 너희들의 조상이 선포했던 가장 기초적인 가치,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오늘 너희가 살아야 할 새로운 메시지를 찾을 수 있느냐. 오늘 새로운 메시지를 찾았다면 그것이 이미 과거에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느냐?” 과거와 현재는 이렇게 기본 가치로 연결되어 잇습니다. 하나님은 옛날과 오늘을 연결시켜 주십니다. 과거의 의미가 오늘날에도 살아 움직입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이야기, 신약성서에 있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언제 말씀하셨든지 간에 오늘도 우리에게 구원으로 역사하십니다. 그 성경말씀은 그냥 글로 읽으시면 그냥 하나의 책입니다. 옆에 두면 귀한 장서고, 잘해야 거룩한 책, 성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은 존경 받고자, 잘 보존 받아야 할 책을 만들고자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은 옛날에도, 지금에도, 내일에도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살아야 합니다, 말씁대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의 주인인 하나님은 살아있으므로, 우리도 살아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삶으로 읽읍시다. 거룩한 책으로 읽지 마시고, 서적으로 읽지 마시고, 내 생명의 양식으로 말씀을 읽으시면, 이 말씀의 주인인 하나님이 오늘도, 옛날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새로운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말씀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드세요. 그 말씀을 마시세요. 그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