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54:7-10
“네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다시 불러들이겠다. 분노가 북받쳐서 나의 얼굴을 너에게서 잠시 가렸으나 나의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긍휼을 베풀겠다. 너의 속량자인 나 주의 말이다. 노아 때에, 다시는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내가 약속하였다. 이제, 나는 너에게 노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너를 꾸짖거나 벌하지 않겠다. 비록 산들이 옮겨지고 언덕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은총이 너에게서 떠나지 않으며, 평화의 언약을 파기하지 않겠다.” 너를 가엾게 여기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아멘.
고린도후서 1:3-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위로로, 우리가 당하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견디어 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분이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같이, 위로에도 동참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2:20-26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에게로 가서 청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로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그 말을 전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아멘.
설교문
성가대 찬양 감사드립니다. 제가 설교할 때마다 성가대와 성가대의 음악을 칭찬하곤 합니다. 성가대의 찬양, 여러분이 부르시는 찬송도 아름답지만 우리 교회의 공간이 이렇게 아름답고 음향이 좋아서 이 안에서 울려 퍼지는 찬양과 기도소리가 더욱 아름답습니다. 예배 드리면서 미리 준비된대로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 들으며, 함께 호흡하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매 주일예배마다 자발적인 아름다운 질서가 이 공간을 꽉 채워줍니다. 감동으로, 감사로 함께 드리는 질서있는 아름다운 믿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언론에 보도된 작은 음악회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2007년 1월 12일, 미국 워싱턴 DC의 작은 지하철 역사에서 아침 7시에서 8시 반 사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러시아워에 작은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이 음악회는 워싱턴 포스트가 미국 사람들의 문화, 예술에 대한 감수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사전 광고 없이 개최한 것이었습니다. 매우 추운 날씨에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바하의 작품 6곡을 45분 동안 연주했습니다. 7시에서 8시 반 사이에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은 약 2,000명이었답니다. 연주를 시작한지 3분이 지나자 한 중년 남자가 연주를 잠깐 보다가 가버리고, 4분이 지나자 바이올린 케이스에 동정어린 1달러가 처음으로 놓입니다. 6분 후에는 한 중년 남자가 음악을 한참 동안 듣다가 지나가고, 10분 후에는 한 꼬마가 엄마와 함께 음악을 듣다가 지나갑니다. 연주하는 동안 바이올린 케이스에 돈을 놓은 사람들은 모두 20명으로 그 금액은 총 32달러였답니다.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 아무도 연주자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연주자는 아주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조슈아 벨(Joshua Bell)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이틀 전에 보스턴에서 연주회를 했는데, 100달러나 되는 티켓이 모두 매진될 정도였습니다. 그의 악기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바이올린으로 알려진 스트라디바리우스였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연주자가 350만 달러나 하는 최고의 악기를 가지고 워싱턴 DC의 역사에서 연주를 했으나, 그를 아무도 몰라보고, 20명으로부터 고작 32달러를 받은 것입니다. 평범한 미국 시민들의 예술 문화 감각을 알아본 워싱턴 포스트의 이 기사의 제목은 "아침 전의 진주(Pearls before Breakfast)"였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음악, 시, 소설이라 해도 제대로 평가 받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적재적소에서 전달되어야 합니다. 아무 곳에서나 노래하고 연주한다고 해서 감동이 주어지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 재능, 모든 축복은 그것이 발휘되는 적합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적정시간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은 다양하고 아름답습니다. 이것들을 어디에서 펼치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복음은 훌륭하지만, 그것도 알맞은 장소가 아닌 아무 곳에서나 이것을 전달한다면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말씀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앞에 놓고 죽음과 부활, 죽음과 생명에 관한 짧은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청중은 수난절을 앞두고 명절에 예배하러 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들 몇명"이 있었다고 써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그 동안 늘 유대 백성들 앞에서 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장면에서는 유대인들이 아닌, 유대인들이 말하는 이방사람들, 예수님의 복음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겨졌던 외부인인 그리스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는 유대 백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된다는, 다시 말해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 나라 축복의 대상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또 말씀의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썩어서 열매를 맺고, 땅에서 죽지 않으면 한 알이 그대로 있다는 얘기를 그리스인들에게 하고 계십니다. 죽음과 생명 이야기를 유대사람들이나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에서 온 사람들은 소크라테스 이후로 생사에 관한 문제를 이렇게 생각하고 배워왔습니다. 즉 인간의 몸은 온 우주인데, 인간의 몸이 죽으면 몸 안에 갇혀있던, 혹은 몸 안에서 살고 있던 인간의 혼이 해방되어 영원한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몸과 혼, 영육의 이원론을 헬라 철학이 가지고 있었고, 이 철학을 로마사상이 그대로 흡수했습니다. 그래서 그레코-로만 문명세계에서는 죽음은 몸의 죽음이고, 구원은 몸 안에 갇혀있던 혼의 영원한 해방, 영혼의 불멸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특이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데, 예수가 말하는 죽음과 생명은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는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예수라는 사람의 생사관, 땅의 나라와 하늘 나라 이야기란 무엇일까 궁금해하면서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앞에 두고 예수께서 죽는 것과 다시 사는 것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주시는데, 아주 단순 소박하게 설명하십니다. 죽음과 생명 이야기, 이 땅 나라와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시지 않고, 식물의 열매의 운명과 결부시켜서 설명을 하십니다. 알곡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입니다. 알곡이 사람으로 치면. 그것은 영과 육이 합해져 있는 총괄적인 인간입니다. 알곡은 그냥 있으면 한 알곡으로 족하고, 알곡이 땅에 떨어져서 땅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 알곡은 썩습니다. 썩으면 썩어서 없어져야 하는데, 썩으면서 알곡에서 뿌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줄기가 자라고, 줄기에서 열매를 주렁주렁 맺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예수님은 생사관 설명의 기초담론으로 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한 알곡이 되어 십자가라는 땅 속에 가서 죽으면, 뿌리가 내리고 줄기가 되어 다시 열매를 맺는데, 예수와 함께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알곡처럼 부활의 영광을 누린다는 얘기를 하시려고 알곡 이야기를 하십니다. 알곡 속에는 몸과 혼이 같이 있지, 분리된채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알곡은 살아있는 몸이므로 알곡에서 뿌리와 줄기가 나는데, 이것은 알곡 본래의 모습이고, 그 다음에 열리는 알곡은 썩어진 알곡과 종류와 모습은 같지만, 그 질은 전혀 다릅니다. 한 알곡이 썩어서 죽으면 없어지는 것 같지만, 똑같은 알곡에서 또 다른 알곡으로, 하지만 변화된 알곡으로 주렁주렁 열립니다. 사람이 죽으면 썩습니다. 혼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썩는데, 우리 몸이 알곡처럼 땅 속에서 썩으면 뿌리가 내리고 줄기가 져서 다시 열매를 맺는데, 영과 혼을 가진 육의 몸으로 부활을 합니다. 단, 전혀 "변화된 몸"으로 부활을 합니다. 예수님이 이 의 양면이니까 구분하지 말라, 땅은 죽고 하늘은 산다고 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사시면서 열심히 일하시죠. 그런데 흔이들 생의 마지막이 죽음이라는데, 없어진다고 하는데, 왜 열심히 일하며 사십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몸의 행위입니다. 몸의 마지막은 죽음이냐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몸의 삶의 마지막은 물론 죽음이지만, 죽음은 또 다른 영원한 생명, 부활을 낳는 한 "과정"이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죽고 썩은 몸이 기적적으로 부활함이 아니라, 썩지않을 새로운 몸으로, 눈물과 고통과 죽음이 없는 전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 속에서 또 다른 생명을 찾게해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인간의 생명도, 그리고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이라면, 아마도 사는 보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은 생명을 낳기 위한 한 계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본래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예언자들, 제사장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 세상을 다스리셨읍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늘인 자기가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와야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래서 성탄 때 예수께서 하늘을 담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지막에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십니다. 예수는 몸도 혼도 삼일동안 죽음의 세계에 계시다가, 변화된 몸으로, 썩지않는 혼과 몸을 가진 몸으로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그 부활의 기쁨을 은혜로 주십니다. 그 부활의 주를 부활절 날 우리가 축하합니다. 중요한 메시지는,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은 죽기 전의 몸과는 질적으로 다른, 눈물도 죽음도 없는 그런 변화된 몸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세상입니다. 우리의 몸까지도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몸은 죽음으로 끝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그러하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으셔서, 죽음 속에서 부활이라 이름하는 새로운 생명을 이끌어주시겠다고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을 위해서 오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이 세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를 어떻게 믿습니까? 부활 생명은 아무데서나 생기지 않습니다. 아까 지하철 역구내의 음악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음악가는 극장에서 연주를 해야 합니다. 부활 생명은 아무데서나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부활 생명이 싹 틀 수 있는 장소, 곧 십자가에서 만 생길 수 있습니다. 그곳이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장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살고있는 교회만이 부활을 경험하는 장소입니다. "고난의 예수, 부활의 그리스도",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생겨나는 장소가 십자가입니다. 진실된 교회는 십자가 정신으로 뭉친 교회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걸머진 교회 만이 부활을 노래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모신 가정 만이 부활을 노래하는 가정이 될 수 있고, 십자가 정신으로 뭉친 나라가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을 노래하는 나라일 수 있습니다. 장소를 정확히 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만 부활이 가능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부활하여 그리스도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오늘 그 예수 그리스도을 우리의 주님으로 믿고 모시려고 합니다.
조슈아 벨이 캐주얼한 차림으로 연주했을 때에 사람들이 그를 몰라봤습니다. 그를 알아보았다면 32달러만 나왔겠습니까? 예수께서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 한 것입니다. 들어도 모르는 세계, 보아도 인지하지 못하는 세계. 우리가 바로 이런 땅에, 이런 세계에 살면서, 예수님 말씀을 들을 때 꼭 기억해야 할 사실 한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세상의 역사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인간의 삶의 하나 하나 경험을 통하여 감지하고 인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고 살아가기 십상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찾아오면 그 사람속에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때, 지혜를 짜내어도 모를 때, 하나님의 계심을 아는 방법 하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배고픈 자, 가난한 자에 대한 말씀을 하셨지만, 이를 지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을 때가 있는데, 이 때는 굳이 하나님 생각을 하지 않아도, 일단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목 마른 자에게 물 한 모금 주는 것이 인간의 마음의 상식 아닙니까? 그것을 까닫고 싶어할 때, 굳이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만 하지 마시고, 차라리 한번 하트스토밍(heart-storming)해 보십시오. 이해가 안 될 때는, 가슴을 여세요. 하트스토밍도 하고, 브레인스토밍도 같이 하세요. 말씀을 읽고 의문이 있을 때는 가슴을 열어보세요. 씨앗이 썩으면,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는 그 속에서 생명을 만들어냅니다. 고난은 우리 역사의 현실입니다. 아픔은 우리 인생의 현실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이, 그런 고난이 끝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치유를 만들어내는 것, 죽음이 현실이지만 그 안에서 부활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 그게 바로 우리의 궁극적 희망이자 목표입니다. 그 목표를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단, 장소를 명확히 하라고 하십니다.
십자가 안에서 부활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거룩한 집"이라고 고린도 후서가 말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 몸과 몸의 역사을 움직여 주십니다. 우리의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고난의 역사도, 슬픔의 역사도, 그리고 반대로 기쁨의 역사도, 해방의 역사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몸으로 오셨습니다. 죽음은 극복의 대상이고, 죽음은 부활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공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며 사십시오. 나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갑시다. 그리고 죽지않는 생명을 다시 삽시다.” 이것이 주님의 축복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