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따람 공동체] “나는 믿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인가?”

2013년 1월 13일 주일예배 설교자 강석찬 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15:1-6, 히브리서 11:1, 19

설교문

1.

아르키메데스가 수학공식을 풀기 위해 몰두했는데
목욕하다가 공식을 풀게 되자 너무 기뻐 그냥 뛰어나오며 “유레카” 외쳤다고 하죠?
목사는 설교 제목을 정하느라 늘 골몰한답니다.
유레카는 아니지만, 큰 깨달음으로 설교제목을 정했습니다.
설교가 목사인 “나”로 전하는데,
성도 여러분은 자신을 향한 것으로 듣길 바랍니다.

튜빙겐(Tubingen)대학,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Moltmann)교수가 쓴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제목이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 였습니다.
몰트만 교수의 자서전을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첫 문장이,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라는 제목에 대하여
“이것은 얼마나 이상한 질문인가?”로 시작됩니다.
몰트만 교수의 글을 축약하여 그대로 옮깁니다.
누가 이같은 질문을 내게 물었는가?
나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내 이름을 붙여야 하는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확신을 갖게 된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왜”라는 것은 역사의 의미에 대한 신앙을 물으며,
신앙은 그 역사가 참인지 하는 이유를 묻는다.
왜 나는 크리스천인가?
나는 참으로 크리스천인가?
신앙과 의심이 내 안에서 갈등을 빚어내므로 반복해서
“주여, 믿습니다. 나의 불신앙을 도와주소서.” 부르짖어야 한다.
루터는 ‘크리스천은 언제나 만들어지고 있다’라 했다.
그리스도인이 됨은 되어지는 것(becoming)이다.
되어짐은 계속적인 회개요 새로운 방향에로 새 출발 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의에로,
노예됨에서 자유에로,
의심에서 신앙으로,
과거로부터 미래에로 향하는 것이다.
몰트만 교수는 자신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합니다.
1926년 함부르크에서 출생하여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배우기를 원했는데
세계 제2차 대전에 독일 공군보조원으로 파견되었다가 1945년 2월 영국군 포로가 됩니다.
1948년 4월 본국귀환까지 벨기에,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의 포로수용소를 전전합니다.
이 과정에서 몰트만은 독일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잔혹한 범죄가 폭로되고,
아우슈비츠(Auschwitz) 등의 수용소에서 희망을 포기하고 죽어간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때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몰트만 교수는 시편 39편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습니다.
시편 39:2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독일어로는 강하게 “나는 내 근심을 속에서 삼켰나이다.”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 39:12)
이 시들이 자신의 고난에 대한 대답으로 들었고,
이 말씀이 자신의 눈을 열어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계신 하나님을 보게 하였다고 고백합니다.
희망의 신학을 펼치는 시작이라 했습니다.
수용소 예배실에서 깊은 절망의 나락에 빠지는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들어 올리는 경험이 희망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심령의 칠흑 같은 밤중에 희망의 힘으로서의 하나님 체험, 이것이 20대 초 감수성 많은 시기에 몰트만을 깨어준 희망의 틀의 경험이었습니다.
1960년대 말 희망의 신학,
1972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책 출판의 근거가 된 경험이었는데,
몰트만 교수는 본회퍼 목사님이 감옥에서 쓴 글
“오직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를 인용합니다.
왜 나는 크리스천일까?
몰트만 교수는 마지막에 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그 분 안에서 내가 처참하게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처참 속에 계신 것을 발견한다.
그 분 안에서 나는 믿고 살 희망의 힘을 발견한다.”

2.

몰트만 교수는 하나님 체험, 고난 속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희망을 얻었으므로 자신을 크리스천이라 하였습니다.
완전하게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지는(becoming) 존재라 합니다.
그런데 몰트만 교수의 자전적 글의 제목이 목사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크리스천일까?
목사가 자신을 봅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나는 목사의 가정에서 출생했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로 이어진 목사의 가계를 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65세가 되도록,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매 주일 성수주일 합니다.
나는 매일 기도하며, 책상머리에 둔 중보기도표로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나는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설교 준비를 합니다.
나는 입만 열면 신앙에 대한 말을 하는 편입니다.
나는 생각도 온통 믿음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난 경험도 있습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씁니다.
나는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감사하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쌓아둔 것도 없으며,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하며 삽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나입니다.
나는 이런 조건들을 통해 크리스천이라 불릴 만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 모든 것들로 판단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불릴 만합니다.
그런대도 목사 자신에게는 오랫동안 끊임없이 질문되어지는 물음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만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잘 알죠?
우리는 교회를 잘 다닙니다.
믿습니다 라고 말도 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크리스천이야, 자신을 자신만만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왜 인가요?
자신이 그려놓은 크리스천에 대한 정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3.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선언에 속합니다.
이 선언은 “나는 믿습니다.”입니다.
“나는 믿습니다.” 고백하는 선언은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사건입니다.
이 고백의 사건은 자신의 전 존재가 달라지는 분기점입니다.
바뀜, 새롭게 되기입니다.

비유적으로 이런 설명이 가능하겠죠.
인생열차가 있습니다.
칙칙푹푹 레일을 따라 달립니다.
레일은 자신이 만든 길이며, 인생열차를 운전하는 기관사는 자신입니다.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의 설계 계획대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갈림길 표시등이 나타납니다.
왼쪽 길 방향은 자신이 세워둔 목적을 향한 것인데,
오른쪽으로 향한 표시판은 이 방향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합니다.
이 길이 구원의 길이요, 이 길이 복이라 합니다.
이 오른쪽 레일을 만든 분은 예수입니다.
오른 쪽으로 방향을 바꿀지, 자신이 설정해둔 방향으로 그대로 갈지 결정해야 합니다.
인생열차는 에너지가 있는 한 멈추질 않습니다.
계속 앞으로 진행하는데,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의 말을 믿으면, 방향을 바꾸는 것이죠.
예수를 기관실에 태워 길 안내를 받아야 할 겁니다.
방향 바꾸기, 이것이 회개입니다.
나의 길을 포기해야 합니다.
나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는 들어설 수 없는 길이기에 인생이 바뀌는 결단입니다.
자, 예수의 말을 믿고 믿음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예수의 길 위에 갈림길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안내 표시판이 나타납니다.
기관차 운전에 돕는 자로 탄 예수가 세워 둔 안내판이 있는가 하면,
반대 방향을 향하는 훨씬 더 크고, 화려하며, 번쩍거려 잘 보이는 표시판이 있습니다.
갈림길에 세워진 오른쪽 안내판이 십자가면
반대편에 세워진 안내표시판은 성공, 자기이름 높이기입니다.
사랑과 희생의 길 안내에는
욕심, 채움, 쌓음이 유혹적인 안내입니다.
가난, 낮아짐, 섬김, 겸손의 쉽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부자, 높임, 섬김 받음, 군림의 매혹적인 조건입니다.
용서, 포용, 평화를 향한 좁은 길의 건너편에는
복수, 배척, 권세 잡음의 넓은 길 안내표시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늘 오른쪽은 생명적입니다.
이에 대하여 왼쪽은 유혹하는 표시판으로 끝은 심판과 죽음이지만 가려 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오른쪽 레일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떤가요?
왼쪽 길에 치우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이 들어 오른쪽으로 왔다가는 왼쪽 길의 매력에 이끌리는 우리가 아니던가요?
오른쪽으로 가라고 가르치는 동승한 예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삶이라는 무게가 자꾸만 왼쪽을 향하게 합니다.
오른쪽 길이 너무나 힘이 드니까, 왼쪽에 치우칩니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 오른쪽으로 가려도 애를 써 보지만, 늘 모자랍니다.
도저히 미치질 못합니다.
자유하지도 못하고, 버릴 줄도 모릅니다.
비우지도 못하고, 담아두고 속앓이 합니다.
크리스천으로, 믿음으로 모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야 하는데
예수는 1% 자신이 99%로 삽니다.
이런 내가 크리스천일까요?
그럴듯하게 무늬만 예수 닮기인데도 크리스천일까요?

4.

여기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해 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75세부터 오른쪽 레일로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75세 이전과 이후를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에는 75세 이전에 대해서는 단지 조상들과 아브라함이 살았던 곳만 나옵니다.
하란, 갈대아 우르 지방입니다.
이곳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을 말합니다.
곧 바벨탑을 쌓는 곳입니다.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인간 중심의 세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곳을 떠납니다.
그리고 소명(召命)이후의 아브라함의 삶을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다.”(창 12:4)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창 12:7)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 12:9, 13:4)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창 13:18)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창 15:6)라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17:1-5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게 하고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고 완전하라.
내 언약을 너와 나 사이에 둔다.”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을 위하여 기도하고(창 18:23-33)
창세기 22장에 이르러 가장 중요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문제를 받습니다.
“네 독생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창 22:2)
아브라함은 그대로 행함으로 “이제사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창 22:12)
인정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에게서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요구하든지 순종했습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소위 크리스천이 되는 길이로구나 깨닫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자로서, 예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 올바른 걸음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에 대한 정의(定義)입니다.
이 정의에 따라 목사인 자신을 보니까,
나는 1% 뿐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나는 한참 모자랍니다.
나는 용기도 없습니다.
나는 부끄럽기만 합니다.
나는 늘 가슴이 답답합니다.
오른쪽으로 가야 되는데, 왼쪽을 지향하는 내가 괴롭습니다.
이래야 된다는 것은 아는데 못하는 자신이 창피합니다.

5.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너는 내 것”이라 한다는데 있습니다.
이사야 43:1을 보시죠.
“야곱이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볼 때 부정적 시각을 갖습니다.
비커에 떨어드리는 잉크 한 방울로 자신을 봅니다.
1%이지만 전체를 덧칠하는 존재로 여깁니다.
어물전 망신시키는 꼴뚜기로,
맑은 물 흐리는 미꾸라지 한 마리로 자신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릅니다.
우리를 모를 리 없습니다.
우리가 1%뿐인 모자라는 존재라는 것 잘 압니다.
그런데 주님은 1%의 가능성에 희망을 두십니다.
왜?
작고 보잘 것 없는 1% 믿음이지만,
주님께서 99%를 채워 100% 크리스천으로 사용하시겠다고 합니다.
로마서 9:20-21을 보십시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그래서 이제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주님께서 채워주시어
어둠에 빛을 발하는 존재로 사용하시면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부패한 곳에 생명의 기(氣)를 집어넣는 존재,
그루터기에 새싹을 내어 큰 나무가 되고 열매 맺어 나누는 것을
나의 삶의 희망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인가?
예, 내가 믿기에 크리스천입니다.
우리는 믿는다는 고백에는 하나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둔 세상의 작은 빛으로,
부패한 곳에 생명의 바람으로,
썩어 잘려진 작은 그루터기에 새 잎을 내는 새 순으로
희망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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