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17:1-8, 출애굽기 2:23-25
설교문
1.
지난주일, 제직수련회 강사로 강의하고 온 소감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강의를 물음으로 시작했어요.
“작년, 재작년에도 제직수련회를 했고, 십 년도 넘게 연례행사로 했고,
강사 목사님들은 틀림없이 제직으로서 청지기 직분을 순종하며 충성하면,
신앙이 자라고, 교회는 성장 부흥할 것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했죠?”
모두가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지난 1년 동안 자신의 신앙생활이 변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느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솔직히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은 손들어 보셔요.”
2/3이상이 손을 들었답니다.
진심으로 잘못된 것 바꾸어 변하길 원하느냐 물었더니,
“아멘!”으로 응답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압니다.
변하지 않을 겁니다.
수십 년 동안을 지켜 본 경험으로 보아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 것처럼, 제직들도 올 한 해 동안 별로 변하지 않겠죠.
수십 년이 지났지만 왜 제 자리 걸음일까?
오히려 퇴락한 느낌입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런 물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한국교회의 한 단면을 보면서
설교 제목을 얻었습니다.
“자라야 하는 신앙, 자라지 못한 신앙”
2.
신앙은 생물(生物)과 같습니다.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살아있기에, 끊임없이 자라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요한 1서 3:9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했습니다.
신앙이란,
씨앗 하나,
그것도 하나님의 씨를 하나님께로부터 분양 받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씨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생명이시니, 생명을 품는 것이 신앙이죠.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니, 사랑을 품은 것이 신앙입니다.
품은 씨앗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품은 것이니 당연히 발아(發芽)하여, 싹을 내어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씨앗은 자라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 없는 성장이란 속 빈 강정일 뿐입니다.
만약 잎만 무성하게만 자란다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예수께서 저주했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꼴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4을 보셔요.
예수님 자신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말한 밀알 하나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 알의 말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씨알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만 위해 산다는 것이죠.
죽는다는 것은 많은 열매를 얻는 희생인 셈인데, 열매를 맺어 이타적 존재가 됨을 말합니다.
잎만 무성하게 자라는 것은 씨앗이 한 알 그대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상징적으로 자기만 위하는 신앙이라는 것이죠.
세계교회사에 유래가 없는 초고속 부흥 성장한 한국교회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자람은 주님이 원하는 자람이 아닙니다.
꽃을 피워 열매를 맺어 나누는 자람을 주님은 원합니다.
이 자람은 이타적 존재가 되는 것이며, 이렇게 삶의 영역이 확장되는 것이
하나님의 씨가 자라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씨를 나누어 받은 성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다니는 신도입니다.
우리가 모여, 교회를 세우고, 교회들이 모여 한국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과연 지금의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이 질문은 한국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자신의 신앙은 어떻다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죠.
마침 2013년 2월호 기독교사상에 게재된 글이 공감되어 인용합니다.
“기독교인 종교사회학자의 말이다.
현재 남한에서는 4,000만 명의 비기독교인인 동포들이 800만 명의 기독교인을 싫어하고 있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동포들의 개신교 혐오증이 극에 달한 것이다.”로 시작된 글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혐오증의 대상이란 말이죠.
계속해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진단합니다.
“문제는 유독 교회만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은 온 세상이 자기들 것인 냥 착각하고 있다.
타 종교인들에게도 무례하며 공격적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은 계속 추락할 것이요, 기독교인의 수는 점점 어 줄어들 것이다.”
지난 1월 20일 설교에서 W.C.C. 10차 총회를 앞두고 성공개최를 위한 공동선언문이 상징적인 현실표현이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회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채 교회 자체의 확대재생산에만 몰두하면서 대 사회적 이미지가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
“한국 개신교 신자들은 시민사회에 나가 시민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채 일반 시민들보다 더 탐욕스러운 행태를 보임으로서 동시대인들에게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된 근본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한 마디로 교회에 대한 개념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무엇이며, 신자는 누구인지, 새로운 시대에서 교회와 기독교인의 존재방식과 선교과제가 무엇인지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교회성장학을 교회의 지상과제로 수입하여 가르침으로 한국교회를 극단적인 이기적 집단으로 망가뜨렸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목회자, 신학, 교인들 모두가 배가 맞았기에 생긴 일입니다.
교회란,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공동체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특단의 조처인 셈이죠.
그런데 교회가 세상 안에 그냥 머물러, 세상을 오히려 병들게 하는 존재가 되었다면,
근본으로부터 수술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장 빈 목사의 글입니다.
장 목사님은,
역사적 예수님,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할 교회인데
예수님이 없는 교회요, 그리스도를 다르지 않는 교회를 교회라 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옳은 지적입니다.
기고 글을 읽으면서 강 목사는
좀 더 근원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크게 병들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서구교회의 공동화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회개하여 고치며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 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에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신앙고백에 있다고 믿습니다.
성령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에 있다고 믿습니다.
동시대인들이 혐오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걱정하면서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어떻게 보실까 상상하면서 두려운 마음이 됩니다.
4.
우화(寓話)를 만들었습니다.
들어보시죠.
“이빨 빠진 호랑이와 늑대 이야기”입니다.
호랑이 왕국 이야기랍니다.
세월을 막을 수 없는지,
나이 든 호랑이의 이빨이 빠졌습니다.
언제 빠졌는지 몰랐는데,
어느 날엔가 웅크리고 잠든 호랑이의 벌려진 입에
이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누가?
늑대입니다.
늘 호시탐탐, 호랑이 자리를 노려보던 늑대들은
열심히 자신들의 개체수를 늘였습니다.
호랑이 왕국의 2인자 노릇으로
꽤 많은 재물도 축적했고,
제법
스스로 만족하는 튼튼한 성(城)도 건설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세웠다는 교만과 자만으로 콧대도 높기만 했죠.
그 동안 이빨 빠진 호랑이는 침묵했습니다.
늑대는 이제 호랑이 왕국이 자기의 세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늑대들은 호랑이 앞에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우리들이 세운 성을 보라!
자랑했습니다.
그 성의 이름이?
바벨론 말로 ‘신(神)의 문(門)’이라는 뜻을 가진
‘바벨’이라 하죠.
바벨을 통해 1인자의 자리를 넘겨받으려는 계획이었죠.
늑대들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업신여겼습니다.
아무 힘도 없다고 판단했죠.
늑대들은 호랑이에게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 챘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호랑이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늑대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비통한 울음이었습니다.
또 한 편, 이빨 없다고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경고의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늑대들은 이빨 빠진 호랑이의 반응을 자기들의 힘을 과시할 기회라 여겼어요.
오히려 호랑이처럼 목소리를 높이면서,
힘을 합하여
‘바벨’이라 이름 지은 자기들의 성을 더 높이 쌓아 올렸습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늑대들을 내려 보며
이빨 없는 입, 울부짖던 입이 아니라
오른 발을 들어
한 번!
바벨 성을 내리쳤을 뿐입니다.
단 한번 내리친 호랑이의 오른 발에는
감추어져 있던 강하고 강한 발톱이 있었죠.
늑대들이 자랑하던 바벨 성은 한 번으로 족했습니다.
두 번이 필요 없었어요.
단 한 번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큰소리치던 늑대들은, 꼬리를 말고 흩어졌습니다.
‘신(神)의 문(門), 바벨’이라 명명(命名)하여
최고의 자리, 1인자의 자리로 들어가는 통로로 삼으려 했던
늑대들의 도전과 교만한 꿈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었고,
서리 맞은 배추 잎이었습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는 허탈했습니다.
옛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락하고 악하기만 한 늑대들을 심판한 큰 사건이 있었죠.
그때는 호랑이는 자신의 강력한 이빨로 다 죽였습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오직 한 마리만 남기고, 다 물어 죽였던 그 이빨.
스스로 심판의 결과에 대해 자책하면서
다시는 이빨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호랑이가 나도 책임을 지자고
이빨을 다 빼버렸죠.
진심으로 고통을 함께 나눈 것이죠.
그런데
또 같은 결과가 된 것입니다.
5.
우화(寓話)는 우화이죠?
지금 한국교회의 행태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빨 빠진 호랑이 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요 모욕입니다.
아!
두려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은 다시는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종말의 심판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모를 리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아, 어리석은 인간아,
아, 어리석은 한국교회야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참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른 발을 들어 바벨탑 쌓은 것을 허물어 버리시지 않을까요?
6.
이 시점에서 아브라함의 소명과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연결해서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봅시다.
두 중요한 사건에서의 관심은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분, 하나님
아브라함이 믿고, 어떤 말씀이든지 그 말씀에 순종한 하나님과
출애굽의 하나님을 비교해 봅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내며 “떠나라”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창세기 17장에서는
99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全能)의 하나님이다.” 소개하고
“네 후손을 번성케 하겠다. 네 후손에게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겠다.”
구체적으로 복의 내용을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언약)한 복은,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이후의 족장들, 이삭, 야곱, 요셉 설화들의 주제는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이삭의 아버지 신앙을 이은 순종,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의 뜻인 하나님께 맡김,
요셉의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
이 모든 것이 복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자,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7.
출애굽기는 창세기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 소개됩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을 복을 약속하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님이란 복을 주시는 하나님과는 다른 모습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출애굽기 2:23-25은
왜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구원, 해방, 자유의 역사를 이루셨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근원적인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내가 고통 받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었다.”라 하십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주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는 것입니까?
어떤 신이라 자신을 소개하고 있나요?
복을 주기 위해, 제사만 받는 신이 아니란 것이죠.
“고난 받는 자를 돌보는 신입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하나님을 비교해 보면, 신관의 변화가 있습니다.
창세기의 하나님 이해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복을 약속하고, 조상들은 제사를 드립니다.
출애굽기의 하나님의 관심은 이웃에게로 향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제 넌 나를 향한 제사만이 아니라,
네가 날 제대로 믿는다면,
너도 나와 같이
이 세상에 고난 받아 부르짖는 이웃의 고통을 돌보며
거기에 해방과 자유와 구원의 손길을 나누는 자로 살아라.”
자기의 복 중심의 신앙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관심하는 영역으로 신앙의 확장, 삶의 확장으로
자라는 신앙이어야 함을 말씀한 사건이 출애굽인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신앙에서
이웃, 세계, 평화, 자연, 생태계, 생명, 정의 등
삶의 영역의 확장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자라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내가 고통 받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었다.”라 한 것입니다.
이타적 신앙,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
한 알의 씨앗으로 죽어 많은 열매를 맺어 나눔이요,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살기이며,
부패하고 불의한 것들을 변화시키는 소금으로 살기입니다.
분명합니다.
자라지 못하는 신앙은 열매 없이 자기만을 위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입니다.
이런 한국교회는 그루터기만 남기고 잘릴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느 자리일까요?
우리와 동시대인들이 종교를 선택하고픈 기독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자라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의 관심 영역인 이타적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만을 만나고 있나요?
이제 한 걸음 더 내디디어 출애굽의 하나님도 만나고 따라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라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창세기로 멈추질 않고
출애굽의 하나님을 소개함으로
신약의 성육신(成肉身) 사건, 교회의 본질과 연결되게 한
성경의 깊은 뜻을 마음에 담아봅니다.
호랑이 심판 앞에 직면한 한국교회를 살리는 방향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