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여호수아 1:6-8, 이사야 46:3-4, 누가복음 11:2-4
설교문
1.
설날 아침입니다.
복(福) 많이 받으셔요.
올 해에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경제적으로는 복(福)자의 축복되어, 많이 나누는 복 있는 사람이 되고,
가정적으로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평안과 평화를 누리고,
직장, 사회, 인간관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눔으로 인정받고 존경을 얻는 한 해 되길 축원합니다.
초등학교가 개학이 되고,
초롱초롱한 눈망울, 잔뜩 기대와 나름 긴장한 1학년들
뒤에 늘어선 젊은 엄마와 때론 할머니들의 호위 속에 입학하는 광경을 보다 보면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갔다는 생각을 가지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언제 어른이 되나 기다리는 자라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는 수많은 변신이 있죠.
부부관계에 대하여 아내에 대하여 토끼 같은 마누라가 여우가 되더니 점점 곰으로 변하고 요즘은 호랑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세상에 나돕니다.
남편은 반대로 호랑이였는데 순한 양으로 변신했다고 합니다.
호르몬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세상 살아가는 지혜라 여깁니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이 학생들에게 질문했답니다.
“부모님들은 왜 너희들을 사랑하실까?”
선생님이 기대한 답은,
“우리들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요.” 이었습니다.
그런데 1학년, 어린 학생의 답은 천연덕스러운 말투로
“그러게 말입니다” 이었답니다.
이 장면은 배꼽을 잡을 엉뚱한 면이 있지만,
이 시대의 세대 사이의 생각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 있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을
어른들은 주장하는 사람이 많으면 일이 되지 못한다 라 알아왔는데,
요즘 어린 학생들은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해석한답니다.
2.
오늘은 설날입니다.
설날은 가족과 친척들이 모이는 날입니다.
귀성열차, 고속도로가 초만원이 되고,
고향 찾는 길이 평소보다 2-4배의 더 많은 시간이 걸려도
기어코 고향을 찾는 그 마음속에는 가족에 대한 정과 사랑,
고향의 힘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가족, 식구(食口)에 대한 말씀을 나눕니다.
우리나라는 가족 부르기를 식구(食口)라 하죠.
함께 한 상에 둘러앉아 한 된장찌개에 숟가락을 넣고, 한 김치 접시에 젓가락을 나누는 관계를 식구(食口)라 합니다.
식구의 풍경은, 농경사회의 대가족제도의 훈훈하고 정감 어린 식탁이 그려집니다.
할아버지 상이 따로 차려지고,
아버지 밥그릇은 이불 속에 따듯하게 보관된 놋그릇이나 도자기 그릇으로 구별되고,
자녀들은 치열한 반찬 쟁취(?)를 위한 치열한 눈치 싸움 벌였던 식탁이었던 때가 있었죠.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어야 식사가 시작될 수 있었고,
어른이 수저를 놓아야 비로소 식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예의와 질서를 배웠던
식탁의 풍경이 식구(食口)라는 단어에서 떠올려집니다.
보글거리는 된장찌개, 땅에 파묻은 김장독에서 방금 꺼낸 시원한 김치 국물, 따끈따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흰 밥, 몇 가지 밑반찬 곁들여 왁자지껄 이야기 꽃 피우는 3대가 어울리는 식탁의 그림에 따사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죠.
불과 20-30년 사이에 사라지고 만
우리 문화의 오래된 정겨운 식구들의 밥상동동체의 모습입니다.
밀려온 아파트 문화, 개인주의적 성향의 핵가족 제도, 산업화와 제3의 물결이
수천 년 동안 이어졌던 우리 민족의 삶의 중심에 있었던 식사(食事) 풍경을 바꾸었습니다.
컴퓨터 채팅으로 올빼미 체질이 된 21세기형 자녀들에게
19-20세기의 농경사회의 새벽을 깨우는 체질이 남아있는 부모세대는
정 진홍 교수의 표현으로 보면, “괴물”로 비쳐지고 있답니다.
과연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우리 시대에 “식구로서의 가족”이 남아 있나요?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가 미국에 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면
아들은 전화요금을 누가 내는지부터 묻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낸다고 하면,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오래 통화하지만
아들이 내야한다고 하면, 용건만 말하고 빨리 끊으라고 재촉한다고 했습니다.
토인비가 1970년대 초,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한국의 가족제도가 부럽다” 했습니다.
대가족제도의 긍정적인 면, 인류문화의 전승, 질서 유지, 윤리 도적의 가르침, 효도가 존재하며 가족의 사랑이 넘치는 식구로서의 가족관계를 부러워한 것입니다.
세계적인 석학이 부러워했던 것이 오늘 우리에게 존재할까요?
우린 식구를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시대를 식구 상실 시대라 한다면 틀린 진단일까요?
3.
식구는 밥을 함께 먹는 것으로만 멈추질 않습니다.
식구는 한 사람의 보호막입니다.
식구는 치유자, 위로자, 인생의 위기와 시련의 때에 기댈 언덕입니다.
식구는 고난의 때에 피난처입니다.
식구는 외로움과 고독과 어려움을 해결하는 해결사요
식구는 분노, 화, 한을 녹이는 용광로입니다.
식구는 고통, 눈물, 슬픔을 품는 화로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구의 역할이 있는데
이 식구를 상실하게 되면, 보호막이 사라지니,
상처 입은 맹수가 되기가 쉽고,
외톨이가 되어 은둔형 외톨이가 되거나 묻지마 사고를 치는
사회적 소외자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병리현상에 그대로 노출되고 맙니다.
우리가 설이나 추석에 기를 쓰며 고향을 찾고, 친척을 만나며,
가족이 모여 밥상을 차려 음식을 나누고 떠들며 웃고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꽃 피우는 이유는,
식구를 확인하고
식구가 베푸는 능력과 힘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며느리들의 고생과 고통도 있지만,
친정에서 해소되기도 하니 상쇄된다고 정리합니다.
일반적으로 명절은 식구확인의 장입니다.
4.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생각해 봅니다.
성경의 하나님 이해는 변화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렇다”라고 완전하게 정의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성경의 순서대로 보면,
창세기 1장에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입니다.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이 첫 소개입니다.
다음으로는 심판주이신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축복의 하나님인데, 전능(全能)의 하나님이라 자신을 소개합니다.(창 17:1)
출애굽기에서는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며, 구원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 전쟁의 신입니다.
신명기에 이르면 축복의 하나님이지만, 분노하고 질투하는 저주의 하나님도 됩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선 이스라엘은 하나님(신)의 권위에 압도당합니다.
복을 주시니 감사하지만, 저주도 하시니 무섭고 두렵기만 합니다.
그래서 경외(敬畏)합니다.
좋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마음입니다.
레위기의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사실 부담스럽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기 위해서 격식에 따라야 합니다.
복잡한 제도와 법칙을 까다롭게 지켜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과는 다른 행위들이 여간 불편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까달스럽게 따지는 이들이 있으니 불편하더라도 잘 지켜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이니
좋으면서도 다른 면에서는 신경 쓰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것이 편합니다.
성전 안에만 계시면 더 좋습니다.
하늘 보좌 높은 곳에 앉아만 계시는 것이 여러 면에서 좋습니다.
가급적 멀리 계시다가 필요할 때만 가까이 오시어 문제해결만 하면 좋겠다고 여깁니다.
이런 생각이 하나님 고백에 투영되는 것이죠.
신명기 8:2-6을 보실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자, 어떤 하나님입니까?
사십 년 지켜 주셨지만 징계하는 하나님입니다.
좋지만, 또 한편 조심스럽고 무섭기도 합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항상 같이 있으면 숨이 막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불꽃같은 눈으로 살피는 하나님이 함께 할 때,
무언지 모르지만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하며, 눌립니다.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고맙고 힘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고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며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이 요구가 쉬운가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함께 하심은 감사지만,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명령입니다.
“율법 바르게 지켜! 그래야 너와 함께 하며 널 지킬 거야!”
자꾸만 불꽃같은 눈길이 뒤통수를 따릅니다.
5.
그런데 이사야 때의 하나님은?
이사야 46:3-4을 봅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서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완전히 어머니 같은 하나님입니다.
신명기나 여호수아의 하나님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사야 49:15을 볼까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역시 어머니 같은 하나님입니다.
시편 16:1, 8의 하나님은?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식구(食口)의 하나님입니다.
시편 23편의 목자이신 하나님도
식구(食口)의 하나님이죠.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시 27:5)
어머니의 치마폭 속에 숨기시는 하나님도,
식구(食口)의 하나님입니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11:2-4 주기도에서 부르신 하나님은,
마태복음 6:9-13의 주기도의 하나님인 “하늘에 계신”이 없습니다.
그냥 “아버지”, “아빠”입니다.
눈앞에 계신 아버지,
식구(食口)이신 하나님을 부른 것이죠.
신관(神觀)이 변한 것입니다.
이젠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우리의 식탁에 동참하여 함께 밥상공동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식탁에서 우리들의 이야기, 우리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으시는
식구(食口)이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만찬 식탁을 나누는 식구(食口)이신 하나님임을 보여주셨죠.
6.
식구(食口)이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잃어버린 세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식구(食口)이신 하나님이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참 평안과 평화를 얻게 됩니다.
식구(食口)이신 하나님이기에
때론 잘못한 때에도 상황을 이해하시며 용납하고 용서하고 포용합니다.
식구(食口)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진실 된 사랑의 맛을 맛보며 삽니다.
오늘 설날,
우리의 식탁(食卓)에서 함께 식사(食事)하시는 주님을 경험하며 감사와 기쁨을 나눕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