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신명기 28:15-19, 58-68
설교문
1.
사도신경을 라틴어로 credo라 합니다.
영어로 “I believe.”, “내가 믿습니다.”이죠.
라틴어 credo는 cor와 do의 합성어입니다.
Cor는 cordia “심장, 마음, 심령”을 뜻하는 단어이고,
Do는 “고정시키다, 위치를 정하여 세운다, 의뢰한다, 준다.”의 뜻입니다.
Credo는 심장 또는 마음을 주어 고정시키고 의뢰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신앙고백을 드리는 것은
나의 심령을 예수께 고정시켜 살겠다는 약속을 드리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한 고백과 같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께 고정시켰으니
예수께서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신앙고백으로 계약을 맺습니다.
계약을 히브리어로 berith라 합니다.
Berith는 “쇠사슬로 묶음”입니다.
노예를 도망치지 못하도록 쇠고랑을 발목과 손목에 채우는 것에서 파생한 단어인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예수님과 제자로 계약맺음이 이와 같다는 것이죠.
쇠사슬로 묶여진 관계가 계약관계로 끊어지지 않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서로 묶여지면 같이 갈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되죠.
계약은 어린 소의 코를 뚫어 고삐를 코에 거는 “코뚜레”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코뚜레로 주님께 고삐를 맡기면,
주님께서 “가자” 하면, 가자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2.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의 신앙생활, 한국교회의 행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행위를 살펴보면서,
코뚜레 되어 주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인지 의심이 생깁니다.
코뚜레 하는 척, 흉내만 내고
귀걸이를 귀를 뚫지 않고 나사로 걸듯이
하루만 코에 고삐를 걸었다가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떼어낼 수 있는 나사로 만든 코걸이 고삐, 결국 가짜 코뚜레를 한 것 같아 보입니다.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 회퍼 목사님은 성숙한 신앙, 제자의 길을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서서처럼 사는 것이 제자의 도라는 것이죠.
이 말을 되새김질 해보면, 우리나라의 선비사상과 통합니다.
“군자(君子)는 혼자 있을 때에도 삼간다.”
이것이 선비사상이요, 선비의 자존심입니다.
왜 혼자 있을 때에도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했습니까?
“내가 알고, 하늘이 안다”는 것이죠.
내가 나를 속일 수 없고, 하늘도 속일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선비로서 정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세가 윤동주 시인이 고백의 시로 쓴 서시의
하늘 향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려 노력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Credo, 예수께 자신을 고정시킨 삶이요,
하나님께 코뚜레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3.
이 길을 걷는데,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봄이 되면 산행을 하면서 절을 찾게 됩니다.
절의 입구에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시는 사당이 있습니다.
부처를 모신 대웅전을 가려면, 반드시 경유하게끔 되어 있죠.
사천왕을 모신 사당 문에 들어서면,
동서남북의 사천왕의 형상이 무시무시하게 표현된 것을 만나게 됩니다.
부처를 모신 절터에 악한 기운이 깃들지 못하도록
사천왕을 무섭게 표현하여 물리치려는 것인데,
불자들이 불공을 드리러 와 부처를 만나기 전에 무서운 형상의 사천왕으로 자신의 불심 약한 것을 뉘우치고, 자비를 베풀지 못한 잘못을 먼저 뉘우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 예수님에 대한 성도들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믿으시죠?
우릴 사랑하시어 외아들까지 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시죠?
우리의 어떤 잘못도 용납하고 포용하며 씻어주시는 하나님이라 믿죠?
탕자 된 아들이 돌아오도록 문을 열어두고 기다리는 아버지 같은 하나님임을 믿죠?
아들을 우리 죄를 대신하도록 대속의 희생양이 되게 한 하나님입니다.
긍휼과 자비가 한없으신 하나님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부르짖을 때 응답하십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구원과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이해하고
좋은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용서하는 하나님으로 믿다보니
하나님 앞에서 점차 버릇없어진 것 아닌가 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하나님 이해는 달 보기 같습니다.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합니다.
달은 우리에게 커졌다가 작아지는 다양한 모습을 보입니다.
달이 우리에게 보이는 부분은, 늘 빛의 부분입니다.
마치 끈에 매달려 원심력으로 도는 공이 늘 같은 면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보이는 면만을 달의 전부라 할 수 없죠?
달의 뒷부분, 지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하여야만 온전하게 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4.
달의 밝은 부분, 우리에게 보이는 부분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복 주시는 하나님, 지키시는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 만월 같이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하는 하나님이라 한다면,
달의 뒷부분, 보이지 않는 부분의 하나님은?
어쩌면 보고 싶지 않고, 경험하고 싶지 않은 하나님으로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입니다.
구약성경이 고백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묵상하고 묵상하면,
창조주, 구원주, 생명의 주, 전능하신 하나님, 축복하시는 하나님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신명기서는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서와 같습니다.
Credo라 할 수 있습니다.
내용은 가나안 약속의 땅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계시한 것입니다.
여기를 보면,
기억하시는 하나님,
계약과 약속을 잊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억하고 알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을 아십니다.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신명기 4:23-24에서는
“소멸하는 불과 같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했고,
신명기 7:21은 “두려운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복 뿐일까요?
저주도 경고로 약속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여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 28:15-19)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핵인 십계명을 생각해 봅니다.
안식일을 지켜라, 부모를 공경하라 외의 8계명은 하지 말라 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이 “하지 말라”는 계명은
축복하던 손을 바꾸어 저주하게 되는 일을 막는 계명입니다.
“너는 조심하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킬까 두려워 하노라.”(신 6:15)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입니까?
5.
문제는 한국교회는 이 하나님이 두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종이호랑이로 여기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고 두렵습니다.
무서워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너무 겁이 없습니다.
목사는 어린이 설교를 잘한다고 여겼습니다.
어느 날, 어린이 교회학교 선생이 아이들에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오신다. 얘들아, 조용해. 떠들면 목사님이 혼 내.”
설교 시간에 아이들이 조용한 것이 설교를 잘 해서가 아니라, 목사가 무서워서 였음을 알게 된 것이죠.
“난 무섭지 않은 목사야.”해도,
아이들은 믿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그래, 억지로 목사가 자신을 무섭지 않다고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은 목사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므로
아이들을 목사를 무섭게 여긴다면, 하나님도 무섭게 여길 수 있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호랑이 한 마리가 출출하여 소 한 마리 잡으려 사람 사는 동네에 왔습니다.
한 집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호랑이가 들어보니, 할머니가 우는 아기를 달랩니다.
“애비 온다.”
아기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죠.
어떻게 눈치 챘는지,
“호랑이 왔다.” 했는데도 아기의 울음은 멈추질 않습니다.
호랑이는 자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었죠.
그러자 할머니가 “옛다. 곶감이다.” 하니, 아기 울음이 뚝 멈춥니다.
호랑이는 “나보다 무서운 놈이 곶감인가 보다. 다음에 만나면 조심해야 겠다.” 생각했죠.
마침 소도둑이 호랑이를 소로 착각하여 호랑이 등에 덥석 뛰어내렸습니다.
호랑이는 감히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겁 없는 녀석이 있다니!
놀라면서 틀림없이 곶감이라 여겼습니다.
“이크! 잘못 걸렸구나. 도망치자”
36계를 놓았는데, 소도둑은 올라탄 것이 호랑이였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떨어지면 죽겠다 싶어 더욱 강하게 호랑이 목을 껴안게 되었죠.
호랑이는 숨이 막히면서 정말 곶감은 무섭다고 더 빨리 달리며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팔도강산을 12바퀴나 돌아, 팔의 힘이 빠진 소도둑이 떨어지자,
호랑이도 살았다고 어흥 거리며 숲 속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6.
머리카락을 세시는 하나님,
우리의 걸음을 헤아리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
사랑이긴 해도, 두렵지 않은가요?
예수께서 공생애 시작 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돌을 떡으로”는 재물의 문제요,
“성전에서 뛰어내려 얻는 이름”은 명예의 문제요,
“천하만국 다스림”은 권세, 권력의 문제였습니다.
사람의 보편적인 욕망의 표현인데, 예수님은 다 뿌리쳤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을 통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 전에 우리가 열망하는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죠.
그런데 주께서 폐기한 것들, 주께서 뿌리친 것들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된다면,
과연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있을까요?
한국교회 강단을 볼까요?
축복, 성공, 출세, 명예, 권력, 재물을 얻고 쥐고 누리는 길을 제시하고 있죠.
제일이 되는 길, 남을 딛고 올라서는 길,
3박자 축복의 길이라든가,
지금은 없어진 크리스탈 교회를 세우고 불가능은 없다고 한 로버트 슐러 목사의
성공 비법을 가르치는 달콤한 말씀들은
환각제나 마약 같은 것을 투약한 것이 아닌가요?
그러면서 정작 그리스도의 쇠사슬에 묶인 사람으로 사는 삶은 외면한다면
잘못된 길 위에 있는 것이죠.
성경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무서운 하나님이라 합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알라!”
이 믿음이 바른 믿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