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50:5-9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옷처럼 해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아멘.
빌립보서 2:5-11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2:12-19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를 두고 기록한 것이며, 또 사람들도 그에게 그렇게 대하였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을 증언하였다.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아멘.
설교문
성가대의 호산나 찬송 감사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입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해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받은 권투선수를 위해 김포공항에서부터 시청 앞까지 시민환영행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종이가루를 날리던 것이 아주 굉장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외국에서 귀빈이 오시면 카퍼레이드도 하고 시청 앞에 모여서 엄청난 환영 행사를 엽니다. 입성이 굉장히 중요한 행사인 것은 사실입니다. 엄청난 사건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이 됩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도 똑같은 입성 행사가 있었습니다. 예수라 이름하는 사람이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그런데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입성하는 사람의 신분은 사람은 사람인데, 하늘에서 왔다는 사람입니다. 하늘 사람, 이름은 예수. 사람들은 너무 흥분하고 기대에 차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가에 뿌려두고, 큰 소리로 환영을 합니다. 이 모든 환영의 뜻을 합해서 호산나라는 말 속에 담았습니다. “입성하시는 예수님, 우리를 살려주세요,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주세요, 호산나.” 호산나 음성이 2,000년 전 오늘 예루살렘 성전 입구를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을 했을까요? 지금 우리로서는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입성하신다니 얼마나 고마웠을까 생각하겠지만, 당시로서는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도 않았고, 부활하시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런 흥분이 없었을 것입니다. 단, 사람들에게 두 가지 상황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은 이 때쯤 되면 주로 목요일, 금요일을 중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옛날에 모세를 통해서 이집트의 식민지 치하에서 해방되어 광야와 홍해를 건너왔을 때의 기쁨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축제의 기간입니다. 출애굽하기 전 날, 천사의 지시에 의해서 양을 잡아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의 아이들은 천사들이 죽이지 않고 그냥 지나쳤고, 피를 바르지 않은 집의 아이들은 다 죽었습니다. 바로 왕이 이 사건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라 합니다. 문설주에 피를 발라서 구원을 받은 날, 유월절. 피를 바른 집은 천사가 지나갔다, “pass over”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유월절"의 의미입니다. 모든 백성을 위해서 양이 피를 흘려서 백성을 구원시켰습니다. 피 흘린 짐승, 번제물로 바쳐진 고마운 짐승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사실을 유월절 축제 때 축제로 회상합니다.
그때 오늘로부터 일주일 전, 예수께서는 예수살렘으로부터 약 3km 정도 떨어진 남쪽의 작은 동네를 방문하셨습니다. 동네의 이름은 베다니라고 합니다. 그 동네에는 예수께서 정말 사랑하시던 두 여인인 마리아와 마르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을 먹여 살리고 집안의 어른 노릇을 하던 남동생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당시에는 일을 남자가 하고 여자는 일을 할 수 없었고, 남자가 벌어다 주지 않으면 밥도 굶어야 하고 물도 마실 수 없었기 때문에, 나사로의 죽음은 엄청나게 큰 손실이었던 것입니다. 이 가족이 동네에서 얼마나 칭찬을 받았으면 나사로의 장례를 치를 때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와서 슬피 울며 옷을 찢으며 곡을 했겠습니까. 성경 말씀에 보면 예수도 마리아의 우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미어져서 우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우셨을 정도면 그 슬픔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와있는 마리아와 예수의 대화입니다. 마리아가 말합니다. "예수님, 미리 이 곳에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 나사로가 안 죽었을 텐데요. 안타깝습니다. 이제라도 구해주시면 되겠지요?” 예수의 말씀입니다. "네 오라버니는 죽지 않고, 자고 있다. 살아날 것이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마리아가 말합니다. “아니, 이미 죽어서 땅에 묻힌 지 나흘이 되었고 썩은 냄새가 나는데요.”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 살 것이다. 내 말을 들어라. 나를 믿으면 죽은 자는 살고, 산 자는 영원한 생명을 사는 동안 경험할 것이다.”
예수께서 무덤 문을 열고 죽은 나사로에게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와라! 나사로야, 일어나라!" 손, 발, 얼굴이 천으로 덮여있던 나사로가 그것을 다 풀어헤치고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 사건이 베나디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이일 이전에 내뱉은 가엾은 마리아의 말입니다. "선생님, 우리 오라버니가 산다고 하시는데, 제가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습니다. 평생 들어온 신앙의 가르침으로, 마지막 날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주님께서 오실 때, 죽은 사람들도 살아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날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읍니다. “그 때가 아니라, 지금 살아날 것이다. 죽은 자가 사는 것을 살아서 본 너희들은 약속된 영생을 조금씩이나마 지금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온 세상이 끝나는 날 부활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생 들어온 부활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가 살아난 사건을 눈으로 보고 경험한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가졌겠습니까?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우리가 바라던 메시아다, 세상을 새로 만들고, 죽은 자도 살려내고, 모든 사람들을 다시 태어나게 할 약속된 메시아, 이 분이 바로 그 분이시다.” 이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고 유월절 축제를 위해서 모였던 예루살렘 온 시내에까지 퍼졌습니다. 그 분이 오늘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인원이 모였을 것입니다. “메시아, 주님, 호산나, 제가 아픕니다, 살려주세요. 제가 배고픕니다, 목마릅니다, 죽겠습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호산나.” 호산나 음성이 아마 하루 종일 이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죽은 자도 살고, 낡은 것은 무너지고 새 것이 될 것이며, 새롭게 역사를 만들어 갈 예수께서 지금 오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시는 장면이 어떠합니까? 빌립보서의 말씀입니다. “가장 높은 분이 높은 지위를 마다하고, 호산나에 응답하시기 위해,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해 낮은 신분이 되셨다.” 한번 생갓해 보시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하늘의 아버지와 똑같은 신분을 포기하고 낮은 곳에 오셔서 말 구유간에서 태어나십니까. 말을 타고 군인들과 함께 입성해야지, 어떻게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골고다의 언덕에서 강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합니까.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님니까? 크리스마스는 훌륭한 날이지만, 하늘은 정말로 비참하게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말구유에 겨우 태어나셨으니까요. 하늘 아버지의 아들 예수가 훌륭한 왕이셨지만, 그 왕은 겨우 나귀를 타고 오셔서 마지막 금요일 골고다 언덕에서 죽임을 당하십니다. 아까 카퍼레이드의 종착점이 시청 앞이라고 했습니다만, 예수님의 종착점은 죽음의 골고다 언덕입니다.
언덕에 가시기 전에 오늘 입성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는 여러 계층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나라는 없지만 신앙으로 뭉쳐야 한다는, 순박한 이스라엘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사람들입니다. 또 나라가 독립해야 한다며 무기를 들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젤롯당 사람들이었죠. 한 편에는 이제는 틀렸으니 영혼을 맑게 하고 수도하며 사는 것이 좋다는, 쿰란이라는 공동체를 가졌던 에세네 파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일같이 성전에 와서 예배를 인도하는 성직자들도 있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메시아께서 새로운 임금으로 오시므로, 이 분은 틀림없이 우리 다윗 왕이 세웠고, 지금은 로마 군대가 빼앗아 주둔하고 있는 그 왕궁에 오실 것이다. 다윗이 만들었던 왕궁,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실 왕궁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곳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로마 군대가 두려워서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을 거부하려고 그러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하나가 있었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가라". 하나님이 몸담고 있는 곳에 가라는 것이죠. 그 곳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예수의 종착점은 성전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가봤더니, 만민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집, 거룩한 집인 하나님의 집이 완전히 장사판이 되어버려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으로 예수께서 하신 일이 바로 성전 청소입니다. 그리고 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자. 내가 3일만에 다시 지으마. 새로운 성전을 만들자.” 왜 예수는 왕궁에 가지 않으시고 성전에 가셨을까요? 사람들은 매우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구한말에 일본 군대가 와서 경복궁에 있던 우리 민비를 살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3.1 운동 때 봉화의 깃발을 들고 경복궁에 가서, 일본 식민지가 집권하는 본래의 우리 왕궁이라 이름하는 곳에 가서, “우리가 우리의 독립된 왕궁을 세우자”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 오시기 587년 전, 바빌론에 의해 이스라엘 왕궁이 망할 때 민비 시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왕이었던 시드기아 왕은 자신의 두 아들이 참수당하는 장면을 직접 봅니다. 이 왕 자신은 바빌론 군대에게 두 눈이 빠져서, 줄에 묶여서 강제 송환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이 세운 왕궁, 솔로몬이 있었던 왕궁, 그 왕궁에 다시 오셔서 예수님, 호산나, 회복하십시오” 하고 절절한 심정으로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곳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왕궁입성을 바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예수님은 성전을 복원해야겠다고 하십니다. 성전이 어디입니까? 종교 시설입니까? 예수께서 성전에 오신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께서 왕궁에 가셔서 로마 군인들을 내쫓고 잠시 동안 독립국가를 선포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성공했더라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수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독립 만을 예수께서 가져오셔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독립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도” 구원하고, 역사적으로는 아무 관련이 없는 한국"도" 구원하고, 그래서 세계 만방을 구원하러 오셨는데, 이 예수가 왜 이스라엘 왕궁에 가시겠습니까? 왜 예수께서 성전에 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하나님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성전에 가십니다. 가셨더니 이 성전이 기도가 없는 장사하는 소굴, 더러운 타락만 난무하는 곳이 되어버려 있었습니다. “이것을 바꿔야겠다. 하나님께서는 타락 속에 계셔서 괴로우시다. 하나님을 하나님대로 회복시켜드려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해야 겠다.” 예수님은 그래서 성전에 가신 것입니다. 구약에 나와있는 이스라엘의 성전은 종교시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 민족과 지리와 역사를 초월하여 어디서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그 성전의 역사적 건물인 그 장소를 이곳 서울에 가지고 오진 못했지만, 성전의 뜻을 가지고 와서 이렇게 경동교회라는 성전을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성전이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면 성전도 따라 움직여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가는 곳마다 성전이 있다. 내가 성전이다. 나는 새로운 성전이다. 나는 이 성전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시작해야겠다.” 이런 뜻으로 성전에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설교하신 분이시고,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 나라 화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다. 예수님은 새 예루살렘이다, 새 역사다. 이렇게 믿으셔야 합니다.
유럽의 유명한 문호인 요한 볼프강 괴테가 있었습니다. 철학자 니체가 괴테의 작품을 읽고,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괴테는 한 문예인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괴테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이다”라고 말합니다. 괴테는 문화입니다. 하나의 세계입니다. 문명입니다. 하믈며 예수가 누구입니까? 예수를 말구유간에서 태어나셔서 오늘 나귀 타고 입성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예수를 그러한 한 사람으로만 보는 너무나 좁은 시각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 아니, 하나님 나라 자체입니다. 예수의 말은 하늘나라의 말이고, 예수 자체는 새로운 세상이고, 그 분과 함께 살면 성전이 새롭게 건축되고 그 곳에서 나라가, 백성이, 제도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성전으로 계십니다. 예수님도 성전입니다. 그 곳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움직이며 살자. 구석 구석까지 가서 나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만들자. 내가 하나님 나라다. 나를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 하나님과 함께, 나와 함께 이 나라를 만들자.” 그래서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입성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받은, 살아있는, 작은, 그러나 움직이는, 생동하는 성전입니다. 오늘 신앙의 자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오심을 맞아들입시다. 우리가 성전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죽지 마십시오. 성전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성전은 새 나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새성전 만든 역사는 오늘 입성일부터 시작해서 금요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무한한 고통의 과정을 겪으십니다. 부활을 잉태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모두 일주일 동안 이러한 고난 속에서 살아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가정, 새로운 나라를 원한다면, 한 번 낡은 것은 망가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못된 것은 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버리고, 회개하는 과정을 고난이라 이름합니다. 일주일 동안 한번 고난당해보십시다. 그리고 다음 주일날 부활의 생명으로 만납시다. 부활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약속하십니다. “나와 함께 이 일주일을 함께 살자. 부활의 아침, 만나자.” 기쁨으로 만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