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잠언 8:22-31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 받았다.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주님께서 아직 땅도 들도 만들지 않으시고, 세상의 첫 흙덩이도 만들지 않으신 때이다. 주님께서 하늘을 제자리에 두시며, 깊은 바다 둘레에 경계선을 그으실 때에도, 내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구름 떠도는 창공을 저 위 높이 달아매시고, 깊은 샘물을 솟구치게 하셨을 때에,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물이 그분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고, 땅의 기초를 세우셨을 때에, 나는 그분 곁에서 창조의 명공이 되어,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그분이 지으신 땅을 즐거워하며, 그분이 지으신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아멘.
사도행전 17:24-27
2부: 이윤선 집사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5:1-8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아멘.
설교문
성가대 찬양 감사 드립니다. 찬송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희들이 찬송하고,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함에 있어서 찬송이 몇 년 전에 만들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찬송을 들으면서 제가 감동을 받으며 그 작사자가 오늘의 나를 위해서 가사를 만들었고, 작곡가가 나를 위해서 곡을 붙였구나 라고 느끼면 그 찬송이 은혜롭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읽으면서 시간적인 면들은 따지지 않고, 이 말씀이 바로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은혜의 말씀이구나 라고 감동하면 그 말씀이 오늘의 말씀으로 살아 움직입니다. 저는 여행을 다니면서 이렇게 느끼곤 합니다. 비엔나 쉔베르크라는 왕궁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서 그 건축물이 몇 년 됐는지 묻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역사 기록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이 너무나 감동스러워서, 수백 년 전 이 건물이 만들어질 때 나도 그때 그곳에 함께 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사를 읽고 건물을 봤더니 건물이 옛날 것이 아닌 지금 나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불국사나 경복궁 등에 가셔서, 이 건축물이 옛날 것이 아니라, 이 건물을 지을 때 육신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나도 마음으로 함께 동참했다, 나의 혼이 함께 했다고 생각하면서 바라보시면 정말 감상을 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역사 이해방식일 것입니다. 살아가는 인생의 역사에 있어서도 과학적으로, 산술적으로 연도를 정할 수 있지만, 감격과 감성으로, 또 신앙의 결단으로, 합리적 이성의 결단으로 옛날 성현들이 했던 말씀을 받아 오늘 살아가는 삶의 지침으로서 아름답게 노래하고, 먹고, 마시며 살아있는 말씀으로 재생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지혜이자 축복입니다. 성경말씀도 수 천년 전에 쓰여졌는데 왜 지금 우리에게 귀감이 될까요? 성경 속으로 여행을 떠나면 됩니다. 성경말씀 속으로 찾아가면 됩니다. 가서 그 말씀을 쓰신 분, 당시 상황을 다 끄집어내서, 그 속에 들어가서 말씀의 세계를 구경하고, 쓰신 분의 생각을 읽고, 말씀의 행간을 읽으면 이 말씀 속에 나도 있었다, 이 말씀이 지금 나의 생활을, 삶을 이끌어 줄 말씀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솔로몬 왕의 예를 들겠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임금 중의 하나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의 예술, 문화와 삶의 기쁨, 만족, 행복을 누린 왕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 솔로몬 왕이 하는 고백 하나를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아까 읽으신 잠언의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왕궁을 짓고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면서 너무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아주 먼 옛날 옛적에 천지창조를 하시기 전에, 제가 먼저 있었지요. 그 때 하나님이 빛을 만들라 하실 때 제가 심부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무 한 그루 심으실 때 제가 묘목을 날랐습니다. 하나님이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세우시기 전에 제가 하나님을 모시고 다녔습니다. 저는 창조 이전부터 태어났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했길래 저를 이 창조의 동반자로 삼아주십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습니까? 전혀 아니지요. 솔로몬은 하나님과 사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옛날 천지창조 얘기가 남의 얘기가 아니고 자신이 그 곳에 있었다고 느낄 정도로, 착각할 정도로 옛날로 돌아갑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 저는 천지창조 이전부터 있었고, 하나님이 저를 그 동반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라고 믿고서 창세기를 다시 읽어보십시오. 오늘 솔로몬이 말한 잠언 이야기도 다시 읽어보십시오. 우리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옛날 옛적으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옛날로 가서 그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 오늘 밥상에 놓고 지성으로, 감성으로, 신앙으로 요리를 맛있게 해서 아름다운 요리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주님이 구름으로 떠도는 광경을 볼 때 내가 그 때 옆에 있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았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가진 재능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최대한 발휘하셔서 많은 시간 여행을 하십시오. 천지창조에도, 몇 백 년 전에도 가 보십시오. 다 우리 것입니다. 이렇게 느낄 때의 고백을 신앙고백이라고 이름합니다.
모든 사건이 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받아서 소화할 수 있고 감동받을 수 있으면 그것이 위대한 사건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사건이 바로 신앙적 사건이고 생명의 사건입니다. 우리 인간 역사에 이르는 모든 역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질문 하나를 던지십니다. “사람아, 내가 인간을 만들어 놓고 얼마나 좋았길래 참 좋았다고 했겠느냐.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축복은 이것이다. 천지창조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내가 사람을 만들었다. 그 이전부터 그대를 택했다. 예정했다. 그러니 와서 내가 만든 모든 역사를 보아라. 다 네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역사, 하나님의 역사가 다 우리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지나간 역사를 섭렵할 수 있는 능력만 인간에게 주었겠느냐. 앞으로 있을 내일의 역사도 그대들에게 탐닉해보라고, 미리 갖다 끌어다 맛 보라고 내가 능력을 주었고, 결단의 감성까지 주었느니라.” 여러분 죽은 다음의 일 잘 모르시지요. 내일의 일 모르시지요. 성경 말씀에는 그 일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미리 시간 여행을 해서 미래를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그 얘기 중의 하나로, 우리의 삶이 지금은 아프고 눈물 흘리고 힘들지만, 먼 훗날에는 눈물도 없고, 불행한 것도 없고, 죽지 않는 나라를 주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그 나라 여행하고 싶으시지요. 한 번 죽어봅시다. 그리고 가 봅시다. 갈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안에 주셨습니다. 막상 간 다음에야 그렇구나 하지 마시고, 지금 오늘 과거라 이름하는 역사도 여행하시고, 내일이라 이름하는 종말도 여행해 보시지요. 그래서 과거와 미래를 다 끌어다가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오늘이 너무나 귀중하고 훌륭한 순간입니다. 제가 이런 용어를 하나 쓰고 싶습니다. 우리는 “통시대적 역사”에 산다. 과거도 통하고, 미래도 통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 중의 하나는 우리에게 이런 역사와 삶을 주신 하나님과 접목해서 사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오늘 그 아들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우리한테 전해주면서 “나하고 함께 살자, 접목해 살자”고 하십니다. 접목은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이라고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하나님 세계의 태곳적 옛날도, 앞으로 있을 먼 훗날의 미래 종말도 우리가 사랑의 접착제가 되어서 경험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도바울이 여행을 시작합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예수의 선포자가 되어서 전도의 길을 갑니다. 그 곳은 헬라 문명의 중심인 아테네, 그리스가 만들어 놓은 헬라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이 끝나고 바로 알렉산더의 헬라 제국이 시작되고, 알렉산더가 죽으면서 동시에 로마 제국이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이 여행했던 2,000여 년 전 아테네의 모습은 로마 제국이 되어 헬라의 수도였던 아테나가 시골 동네로 전락한 다음의 모습입니다. 가 보았더니 옛날 전통을 따라서 아테네에 엄청난 문화가 있었습니다. 신을 모시는 신전의 문화였습니다. 신전을 보고 사도바울이 아고라라 이름하는 광화문 광장 같은 곳에서 토론도 하고 선포를 합니다. “아테네 철학, 문화, 사상과 신, 모든 것을 다 쥐었다고 자랑하던 아테네, 이곳에 수많은 신전이 있는데 왜 이렇게 신전이 많은지 모르겠다. 내가 통시대적 사람의 눈으로 봤더니 여러분이 가진 신전 속에는 신이 없다. 왜 신전에 신이 없느냐. 사람이 만든 신전이 많은데 가봤더니 신의 모습이 안 보이고 건물만 보인다. 가죽만 보이고 속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믿는 하나님, 과거, 현재, 미래를 총괄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이 만들어놓은 신전에는 계시지 않다.” 아마 이 얘기를 듣는 많은 사람들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럼 네가 믿는 신은 무엇이냐 했더니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은 예수, 또 다른 이름은 부활의 주님이라고 답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알 수 없는 신입니다. 부활이라는 상상도 못 할 얘기를 바울이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 부활하느냐. 죽음이란 혼이 몸에서 떠나는 것인데, 죽었던 인간이 어떻게 살아난다고 하느냐.” 알 수 없는 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도 바울이 혼났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세월이 지나 아테네에는 역사 유물을 자랑하는 신전은 그대로 있고,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믿는 정교회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오늘 요한복음에서 포도원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이 장면은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포도원의 농부이시다. 나는 하나님께서 기르신 포도나무 줄기다. 그대들은 내 줄기에 붙은 포도나무 가지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여러분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실 텐데, 내용은 이러하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열매를 맺는다. 포도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붙어있는 가지가, 인간이 맺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포도열매다. 포도열매를 맺는 자들은 그대들이지 내가 아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것을 얘기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실제 누리는 것은 예수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축복의 역사를 직접 주시지 않고 예수라는 줄기를 통해서 주시는데, 그 조건은 포도나무 줄기에 가지가 매여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도열매를 맺는 주인공이라고 하십니다. 포도가 자라기 위해서는 나무를 심고, 햇빛, 물, 공기가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을 농부인 하나님이 관리하십니다. 포도나무를 통해서 영양분을 먹은 가지가 포도를 맺습니다.예수님은 영양분 공급자입니다. 우리와 접목한 사랑의 화신입니다. 우리에게 접목만 하면 포도열매를 주렁주렁 맺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포도열매를 많이 맺으면 수확해서 신나게 먹고 마셔라. 하늘을 향해서 땅에서 마음껏 축제를 벌여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축제가 인간의 역사입니다. 축제가 하나님이 함께 하고 싶으신 삶의 역사입니다. 포도열매가 많이 맺으면 포도 열매 먹으면서, 포도주 마시면서 옛날 창조얘기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이루어질 종말 완성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하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감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포도원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전을 보고 신전에 신이 없다고 합니다. 포도나무는 있는데 열매가 없다면, 이유는 가지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줄기에 접목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양식을 받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한 원로 인류학자인 클리프 기얼츠(Clifford Giertz)라는 사람이 발리에 대해 쓴 책의 내용입니다. 인도네시아 발리의 전통, 춤, 예술, 미술작품이 아주 독특하고 아름다운데, 이 분이 음악과 예술을 매우 좋아해서 발리에 가서 살면서 발리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합니다. 역사를 보니 19세기 발리의 왕이 솔로몬처럼 문화에 심취해서 발리 문화를 양성하는 데에 큰 투자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왕은 엄청난 전제군주였습니다. 백성들의 착취를 일삼으면서 이러한 문화적 표현을 통해서 백성들을 마사지 해주었습니다. 이 분의 표현입니다. “좋은 것도 많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발리 국가는 적어도 19세기에는 극장국가였다. 극장식 문화와 예술로 백성들을 마사지 하면서 통치했다.” 극장국가라는 말을 썼습니다. 한 편으로 이해가 갔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혁명가가 울려 퍼지고, 아리랑 축제가 온 국민을 동원해서 펼쳐집니다. 거대한 매스 게임이 진행됩니다. 그 극장국가의 매스인 사람들은 배고픕니다. 힘듭니다. 눈물 흘립니다. 그러면서 매스 게임을 진행합니다. 바로 우리 북쪽의 형제자매들입니다. 현대판 극장국가가 북쪽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본 것은 이러했습니다. "아테네 예술, 신, 건축 모두 훌륭하지만, 이 곳은 신전국가에 다름 없다. 살아있는 신과 인간의 만남이 없는 것 같다. 나무는 있는데 앙상한 나무만 있고 가지가 없어서 포도열매가 없는 것 같다." 비록 아테네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세상의 역사 굽이굽이마다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단 하나입니다. 온 세상의 역사는 신이 있으면 신전이 있고, 신전이 있으면 신과 인간이 함께 접목되어 찬송이 있고, 감사가 있고, 삶이 있고, 눈물이 있고, 웃음이 있고, 아름다운 축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경동교회는 아름다운 축제의 신전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 신전은 살아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전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있는 신전입니다. 하늘이 땅을 품듯이, 땅이 하늘을 품듯이, 하나님이 인간을 품고, 인간이 하나님을 품고 함께 노래하는 축제를 벌이는 곳이 아름다운 성전 공동체입니다. 찬송이 있는 곳, 감사가 있는 곳, 웃음과 사랑이 있는 곳, 사랑의 접목으로 오늘 우리가 살아있는 성전 됩시다. 과거의 하늘, 미래의 하늘 다 품고 삽시다.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를 품고 살아계십니다. 예수를 통하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삽시다. 보람되게 삽시다.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