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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의 길위의신학] 교회 개혁과 에로티시즘의 상관관계

차정식·한일장신대 교수


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교회 개혁의 3중적 층위
 
"성은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할까"라는 제목의 김선주 칼럼(한겨레신문 5월 7일)을 읽으면서 내심 교회 개혁의 과제가 에로티시즘의 문제와 무관치 않다는 직감이 생겼다. 그것은 공적인 문제의 현상을 심층 욕망의 차원에서 분석해 보려는 시도와 잇닿아 있다. 이즈음 교회 개혁의 담론은 가히 홍수를 이루고 있는 추세다. 머지않아 교회 개혁의 담론과 주장들이 개혁의 대상으로 부각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교회 개혁의 필요성과 문제의 층위를 준별해 보니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는 인습의 문제다. 사람들이 기존의 관행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편한 게 좋은 것이라는 구태의 문제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보더라도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지 않거나 못한다. 그렇다. 개혁의 걸림돌로서 인습은 인식론적 장벽의 측면이 강하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여, 왜 그렇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한 다수의 인식이 합세하면 여론이 되고 그것이 개혁의 발진 기지로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둘째는 제도의 문제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정하고 투명한 기준으로 교회의 제반 업무를 합리적인 기틀 위에 정비해야 하는 제도의 변혁이 필수적인데 목사 장로들을 비롯한 기득권자들의 담합으로 요령부득이라는 탄식이 들려온다. 거대 조직으로 부상한 교단의 총회나 연합기구 역시 다채롭고 역동적으로 다수의 여론을 수렴할 만한 합리적인 논의의 절차나 제도적인 채널이 턱도 없이 미진하다는 걸 모두 안다. 게다가 대화의 기술조차 전혀 훈련이 안 된 이들이 목청을 높이며 세몰이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구조에서는 기존의 부족한 제도 장치마저 무기력해지기 십상이다. 
 
셋째로 내가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싶은 것은 욕망의 층위이다. 욕망은 인간의 동물적 생명 에너지이면서 동물 이상의 목표를 추구하는 선한 '의욕'의 밑절미이다. 그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긍정적 의욕이 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발현되면 '탐욕'으로 전락한다. '탐욕'-'욕망'-'의욕'의 간격은 유동적이고 사람의 주관마다 많은 편차가 있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 간발의 층위는 사안마다 달라지면서 오락가락한다. 

만화경의 욕망, 그 빛과 그림자
 
교회 개혁이 안 된다고 부르짖으며 절망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그 문제의식과 해결 방안에는 이 세 가지가 두루뭉술하게 섞여 있다. 그러나 개혁의 당위적 목표와 실천 방법을 강조하는 길목에서 셋째 요인은 대체로 탐욕에 물든 교회 지도층과 기득권 세력을 질타하는 선에서 고착되는 경향이 있다. 그 탐욕이 어디서 발원하는지, 그것의 중립적 양태인 욕망이 어떤 경위로 창발적 의욕의 에너지로 선순환되기보다 다수의 교인들에게 해를 끼치는 탐욕의 폭력으로 발현되는지에 대한 인간학적 고찰이 결여되어 있거나 미약하다는 것이다. 
 
가령,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일구었다는 모 목사가 그 교회의 자산을 빼돌려 자식들 사업에 부당하게 투자하고 물의를 일으켜 왔음이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이에 대한 개혁 세력의 숱한 질타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의 당사자들은 요지부동으로 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 내면의 정당성을 시위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를 질타하는 입장의 목소리들은 그 인간적 심리의 저변에 그 목사가 정신없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교회를 키우는 동안 그 자식들에게 변변한 '애비 역할'을 못했다는 죄책감과 이로 인한 욕망의 결핍증이 작동하고 있는 점에 세심하게 착안하지 못한다. 
 
또 갖은 성추행과 성폭력으로 대형 교회 목사직을 물러나서도 여전히 구설수에 오르는 또 다른 목사의 인간적 욕망이 언제, 어떤 계기로 교회 여성들을 성적 쾌락의 미끼로 삼게 되었는지 밀도 있는 정신분석적 고찰이 부재하다. 그 정상적인 관계의 파트너인 아내와의 욕망 회로에서 그의 충족 채널이 여차여차한 상황에서 왜 부실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그 저변의 복잡한 내막을 세세히 파악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 이를 일반화한 '탐욕'이란 개념으로 싸잡아 매도하기에 앞서 해명되어야 할 탐욕의 심리적 진화 과정이란 게 있다는 것이다.
 
죽어라 헌신하고 고생해 가면서 수십 년의 목회 끝에 꽤 튼실한 규모의 교회를 일군 목회자들이 물질적 방종과 무절제, 교권이나 돈과 관련된 눈먼 탐욕의 미끼에 쉽사리 휘둘리는 병폐는 그들의 자수성가에 대한 보상 심리와 소싯적부터 겪어 온 핍진한 삶의 결핍을 곱빼기로 충족받으려는 병리적인 판타지의 작동을 무시하고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 교회 세습의 어설픈 작태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불우한 인간적 욕망의 틈새에 깃든 그 측은한 그늘이 포착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인 대중의 절대 다수가 열심히 책을 보고 의식의 각성을 통해 인식론적 전환을 이뤄 교회 내의 잘못된 관행과 구태의연한 인습을 넘어선다 할지라도 개혁 운동은 여전히 미완료 시제로 계속된다. 또 아무리 훌륭한 제도로의 구조적 변환이 이루어지더라도 이전의 성공한 개혁은 오늘날 또 다른 개혁의 과제로 전이된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간이 자꾸 바뀌기 때문이고, 아무리 집단 무의식의 동형 구조를 전제하더라도 인간의 욕망은 개별적으로 신체의 내부에서 제각각 꼼지락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호한 욕망에의 배려
 
따라서 인간론의 하위 장르로서 욕망론적 고려의 섬세한 개입이 없이 교회 개혁 역시 아무리 성공한 사례에서도 미진하거나 실패할 공산이 크다. 마치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환상적 기대가 인간론적 변수에 대한 무지와 오판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유사한 이치이다. 따라서 제도의 변혁과 인습의 청산을 논하면서 그것을 감당할 개혁 주체와 개혁 대상은 인간론적 공통분모에서 끊임없이 욕망의 교집합을 산출해 내고 그 에너지의 합리적 배분과 충족, 슬기로운 조율에 터하여 적군을 줄이고 아군을 늘려 나가는 뫼비우스적 역동이 필요하다. 
 
분노와 결기의 에너지는 파괴와 해체에는 능하지만 참신하게 건설하는 데는 젬병이다. 아니, 노골적인 분노의 폭발이 파괴할 대상을 제대로 파괴하는 경우도 드문 것 같다. 여전히 내부의 적이 문제시되고 끓어오르다가 지리멸렬해지는 개혁 에너지의 저변에 작동하는 사람들의 감추어진 문제, 아무도 건들지 않고 속으로 복류하는 복잡 미묘한 인간적 욕망의 문제에 대한 심층적 배려가 생략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에는 반드시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 두 종류만 있는 게 아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욕망이란 게 있다. 헌신과 희생으로 칭송받는 갸륵한 개혁의 전선에도 세밀하고 복잡한 인정 욕구의 지형은 작동한다. 개혁 대상과 그 주체의 양측에 두루 포진하여 총천연색으로 발광하는 그 욕망의 스펙트럼은 인간의 이름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잡다한 혼종체이다. 그런데 그 심연의 뿌리까지, 끝까지, 때로 우리 사회의 관례상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고 공인하는 금기까지 건드려 가면서 우리는 치열하게 대화하지 않는다. 아무리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집단에서도 서로에게 불편한 암묵적 금기를 위반하기란 쉽지 않다. 이미 금기가 아닌 것조차 건드릴수록 덧나거나 어색해지는 경우도 있다. 섹슈얼리티와 에로티시즘의 미학도 욕망의 최첨단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여전히 쉬쉬하며 가급적 회피하려는 대상 중 하나이다. 김선주는 앞서 예시한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성에 대해 나이 불문하고 호기심을 갖고 살지만 실제로는 성과 관련된 문제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일상을 산다. 그러나 한 겹 들여다보면 세상은 온통 섹시코드의 범람이다. … 부부 간에, 애인 사이에, 친구 사이에, 부모 자식 사이에도 그것은 홀로 알아서 처리할 문제일 뿐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못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건강한 방법인지 알 길이 없다."
 
혹여 목사들의 문제와 교회 개혁의 심층적인 성감대가 이런 쪽에 결부되어 있는 게 아닐까. 보수 진보 진영 가릴 것 없이 그 구체적인 인간들을 압도하는 욕망의 코드는 전능한 위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그 핵심 직전까지만 이야기하고 그 은밀한 핵심 부위의 욕망이 개별 인간의 반복적 일상에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언급은 되도록 발설을 꺼려하거나 우회적으로 암시만 하면서 변죽을 올리다 사그라진다. 이런 점에서 돈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혁파하기 위해 교회 내의 공론화 작업이 여전히 소극적인 이유도 대강 그 내막이 감지된다. 여전히 갸륵한 헌신과 희생의 신앙적 이념과 세속적 탐욕의 진창 사이에 이항 대립을 위주로 언급될 뿐, 그 사이에 범람하는 대다수의 복잡한 현실을 대강 넘어간다. 
 
행복하게 숨 쉬는 연습
 
나는 최근에 두 권의 책을 냈다. 한 권은 공저로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다채롭게 모색하는 주제를 다루었고, 다른 한 권은 단독 저서로 성서의 이면에 작동하는 구체적인 인간들의 욕망 코드를 '에로티시즘'이란 주제로 엮어 살펴보았다. 둘 다 만만치 않은 주제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두 가지 관심사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생긴다. 한국교회의 개혁에 대한 주장들은 익히 들어온 것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세밀하게 제시한 경우이다. 그렇게 정리하여 인식론적 각성을 유도하려는 시도는 중요하다. 나아가 제도적인 변혁을 통해 인간의 인식 전환만으로 이룰 수 없는 시스템의 해체와 재구성을 기획하고 실현하는 것 또한 나도 늘 주장하는 만만찮은 과업이다. 
 
그러나 그 세 번째 층위인 인간의 욕망 문제는 단 하나의 정답이 없고 방향도 오리무중이며 대체로 모호한 영역에 감추어져 있다. 속으로 요동치는 이 무형의 에너지를 어찌할 것인가. 늘 왜곡된 방식으로 표출하는 그 욕망의 분할과 합리적 조율의 방식, 구체적인 전략까지 개혁 대상과 주체의 교집합 영역에서 지금부터라도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교회 개혁은 비로소 외곽에서 변죽을 울리는 수준을 넘어 공동체의 축제로 깃발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껄끄러운 주제들, 아무리 토론해도 화끈한 해답이 예상되지 않는 난제들, 그래서 금기로 고착되어 침묵을 유도하는 우리 내부의 아킬레스건, 바로 그 자리가 교회 개혁의 숨겨진 암초를 미리 수습하는 요처가 될 줄 누가 예언할 수 있겠는가. 금기와 위반의 밑자리를 살피는 에로티시즘의 신학적 통찰이야말로 교회 개혁의 하부구조를 강타하는 우회적인 첩경이라는 걸 뒤늦게 발견하고 인정하게 될지 누가 알랴!
 
'인간은 행복하게 숨 쉬도록 태어났다'고 몽상의 시학자 바슐라르가 말했다. 개혁은 개혁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혁 대상과 주체가 두루 행복하게 숨쉬기 위해 그 숨통을 조이는 장애물을 퇴치하려는 공감과 설득의 노력이다. 나는 남들에게 행복을 선사할 만큼 행복하게 살아왔는가. 내 욕망의 코드는 건강하게 작동하면서 타자와의 관계에서 탄력적인 조율의 리듬을 타고 있는가. 아니면 어려서부터 눌리고 폐색된 욕망의 회로가 우리의 삶을 자꾸 왜곡시켜 자신이 받는 억압을 왜곡된 형태로 분출하여 타자를 억압하면서 은연중에 그 삶의 공정을 헌신과 희생의 코드로 분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교회를 목숨 바쳐 섬긴다고 하면서 죽을 쑤는 이들이나 그것을 고치려고 물불 안 가리며 희생적 헌신을 하는 이들 모두 좀 더 행복하게 숨 쉬는 연습을, 태초의 호흡법을 익혀, 다시 해봄직하다. 제대로 날기 위해서는 날개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 날개의 구석구석을 순환하는 모세혈관에 혈액은 제대로 싱싱하게 흐르며 팔팔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하다. 내 욕망은 건강하게 발육되어 그 충일한 여유의 공간에 선한 의욕으로 발동하고 있는지, 아니면 좌충우돌하면서 받은 상처 속에 찌그러들어 제 한 몸 건사하기조차 힘든 상태에서 온갖 그럴듯한 명분을 가져다 붙이며 고래고래 고함치며 발악을 하고 있는지 마찬가지로 서늘한 진단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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