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12:1-6
그 날이 오면, 너는 이렇게 찬송할 것이다. “주님, 전에는 주님께서 나에게 진노하셨으나, 이제는 주님의 진노를 거두시고, 나를 위로하여 주시니,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 나는 주님을 의지한다. 나에게 두려움 없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시다.” 너희가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또 이렇게 찬송할 것이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의 이름을 불러라.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알리며, 그의 높은 이름을 선포하여라.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일을 하셨으니, 주님을 찬송하여라. 이것을 온 세계에 알려라. 시온의 주민아! 소리를 높여서 노래하여라. 너희 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참으로 위대하시다.” 아멘.
골로새서 3:12-15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아멘.
마태복음서 11:25-30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려고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아멘.
설교문
우리는 매주 주보를 보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주보를 한 번 살펴보시지요. 입례찬송부터 축도 송영까지 있습니다. 찬송은 부르는 찬송이고, 예배부름, 교독, 성경봉독은 읽는 찬송입니다. 설교는 말하는 찬송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호소하고 드리는 찬송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감사해서 드리는 찬송입니다. 찬송을 부르거나 드리면, 들으면, 굉장히 아름답고 가슴 벅찬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아멘 할 수 없는 찬송은 아마 힘든 찬송이었을 것이고, 아멘할 수 있으면 가슴에 와 닿아서 후련하고 감사해서 아멘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있으면서 항상 하던 기도 한 제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나요. 하나님이 우리 백성에게 죄 때문에 진노하셔서 저희 백성 전부를 이방 국가인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언제 진노를 푸시고 사랑을 베푸셔서 저희가 해방 받았다고 너무 기뻐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또 질문이 있었습니다. 나라 만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수한 짐들이 있습니다. 고뇌가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못 살겠습니다. 언제 한번 이 속박의 짐, 식민지의 짐, 고뇌와 아픔과 서러움의 짐을 모두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홀로 또는 함께 모여서 주님을 기도로, 말씀으로, 탄원으로, 찬송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까? 포로생활을 하는동안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가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찬송하여라.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백성들아 찬양하여라." 이사야서 12장뿐만 아니라 이사야 전체에 있어서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이런 대목의 권면이 나옵니다. 민족 전체에게, 또 백성 개개인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 날이 오면!" 그런데 그 날이 언제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수백 년의 세월을 기다렸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이 주인 되신 날, 우리가 해방 받았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그 날은 먼 훗날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귀한 날, 안식일이었습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그 날이 오면 선물 줄 테니 그 날이 오면 와서 찬양하여라. 그 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그 날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 날이 오면 찬양하여라. 글로, 말로, 드림으로, 감동으로.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사야서가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하나는, 그 날이 오면 이렇게 찬양하여라. 곧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진노를 거두시고 은혜를 베푸신 주님, 이제 오늘 그 날이 왔으므로 우리 회당에 가서 주님을 이렇게 찬양하겠습니다. 주님이 마련해주신 구원의 우물에서 아주 기쁜 마음으로 물을 길어서 마시겠습니다. 구원의 물을 마시면서 찬양하겠습니다. 당신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우물 속에 있는 당신을 물처럼 내가 들어서 마시겠습니다. 또 다음날 그 날이 오면, 저희들이 모여서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만백성에게 영광스럽다고 전하겠습니다. 당신은 훌륭하신 분이시라고, 그 날이 오면 찬양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진 선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날이 오면, 다 모여서 구원의 물을 마십시다. 경동교회는 구원의 물로 가득한 공간입니다. 여기에 오면 구원의 물을 다 떠 마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을 말하고, 감탄하고, 감동으로 찬양하고, 그래서 우리는 물을 함께 마실 수 있습니다. 생명의 물을 마시는 예식이 예배입니다. 오늘 물을 못 마시면 예배의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도 물을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조건입니다. 물 마시러 오는 사람은 그 날이 오면, 내가 말한 그 장소에 오면, 구원의 물을 마시되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머리에 이고 마시지 말고, 짐을 다 내려놓고 편하게, 기분 좋게, 행복하게 물을 마셔라고. 오늘 마태복음 말씀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구원의 물을 주러 왔다. 생명수를 주러 왔다. 짐 좀 내려놓아라. 그리고 아주 가볍고 행복하게 물을 마셔라고.
최근에 저는 경고 있는 음성 하나를 들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 새로운 형태의 신자들이 생겼는데, 그 신자 이름을 "가나안 신자"라고 부른답니다.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이라는 목표를 가기 위해서 험난한 광야 길을 걸어갑니다. 여전히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땅,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가나안 백성의 목표지점이죠. 그런데 더 중요한 뜻은 이것이랍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 나가", "교회 안 나가"입니다. 세습이 있는 곳, 정경유착이 심한 곳, 권력 다툼이 있는 곳, 논문 표절이 있는 곳, 문어발식 개척만 있는 곳, 그 곳엔 안 간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안 나가. 그래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니, 안 나가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우물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 그렇다고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고, 갈 곳은 없고, 그래서 떠돌아다니는 그런 신앙인이 있는데, 좋은 말로 가나안 신자라고 합니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젊은이들로 채워지지 않으니 조사를 한 것인데, 이 사람들 말이 우리는 종교적이고 싶다, 그러나 교회에 등록된 신자이고 싶지는 않다. 그 비율이 30, 지역멸로는 심지어 50까지 올라갔다는 기록을 봤습니다. 우리나라에 가나안 신자가 몇 명인지 정확한 통계는 없습니다만,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 800만 개신교 기독교인들 중에 최소한 100만 명은 가나안 신자일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에 어쩌다 나오고 보통은 그냥 떠돌아다니는 이동식 가나안 신자까지 합하면 한 200만 명, 전체의 1/4정도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 통계를 보면서 참 부끄럽습니다. 왜 이 땅에 있는 교회가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안 될까. 왜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말로, 가슴으로, 곡으로 찬양하지 못 하는 곳으로 교회가 변했을까고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짐을 어디에 내려놓느냐는 것입니다. 짐을 내려놓을 곳이 없으면 짐을 이고 방황할 수밖에 없지요. 어떻게 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저는 교회란 구원의 우물을 마시기 위해서 짐을 내려놓는 곳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도 마찬가지지만 여러분께 당부 드리는 말씀은, 이곳에 오셨으면 짐을 내려놓으시라는 것입니다. 끌어안고 예배보지 마시고, 내려놓으시지요.
이런 얘기가 있지요. 한 할머니가 버스를 공짜로 탔습니다. 이 할머니는 버스를 탈 때부터 계속해서 머리에 짐을 이고 있었습니다. 짐을 계속 이고 있는 할머니에게 버스기사가 짐을 내려놓으라고 하니, 할머니는 공짜로 태워준 것도 고마운데 어떻게 짐까지 내려놓겠냐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실 이렇게 살고 있는 것 아닐까요? 짐을 내려놓읍시다. 내려놓으면 그 짐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라고 하는 교회가 받아주는데, 교회 자체가 아닌,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그 짐을 받아주신다고 합니다. 짐 받는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짐 받는 곳을 우리가 표시해놓았습니다. 아무 건물에나 짐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짐을 그냥 받아주는 곳이 있는데, 교회 종탑 위에 십자가 표시가 있는 곳에 가면 짐을 받아준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왜 가나안 신자들이 생겼을까요? 종탑에 십자가가 있어서 짐을 내려놓으려고 갔더니, 헌금 내라, 전도해라, 열심히 나와라, 스트레스를 주는데 짐을 맡기러 갔다가 짐이 더 붙어 나온답니다. 그래서 안 나갑니다. 맞나요? 그럴 수 있지요.
하나님의 몸 된 교회는 찬양이 있는 곳이기에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늘 유대백성들에게 이렇게 설교하십니다. "우리 아버지와 제가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일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사회와 모든 역사를 하나하나 다 끌어안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옛날 옛적에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이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저를 보내서 이 모든 역사를 관여할 권한을 아들인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역사를 관장할 책임을 맡았기에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모든 사람의 짐을 다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꺼이 편하게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제가 지키겠습니다. 저에게 짐을 다 맡기십시오. 저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인 저에게 짐 맡겼다는 사실을 여러분 확인하십시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이 찬송이고 찬양입니다."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역사적으로 보면 초대교회부터 시작해서 역사가 2천년 내려오기까지 모든 교부들이 오늘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 30절의 말씀, 아버지와 내가 합의해서 짐을 맡기로 했다는 것, 수고하고 무거운 짐 가진 사람들 다 내게 오면 내가 편히 쉬게 해주겠다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 전체의 보석과 같은 말씀이라고 이해했읍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가 기록된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단 문맥의 뜻을 보아서 우리가 삼위일체 신앙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여러 군데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을 은유적이기는 하지만 직접 말씀하신 것이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 30절, 오늘 본문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직접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한 성령 안에서 세분이자 하한분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삼위일체 신앙의 아주 모범적 본문이라고들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여기서 삼위일체 신앙을 강론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삼위일체가 무엇이고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유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안한 쉼을 준다. 이것 말씀하시기 위해 삼위일체가 있는 것입니다.
짐이 무엇입니까? 짐은 나라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짐은 반드시 벗지 않고는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짐이라는 것입니다. 짐 가운데 가장 흉악한 짐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입니다. 아픈 것도 짐이고, 병균도 짐이고, 착취도 짐이고, 처절한 가난도 짐이고, 정치적 억압도 짐이고, 핵의 위협도 짐이고, 개인적인 자존심 때문에 당하는 치욕도 짐이고, 성차별, 지역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 이 모든 차별이 짐입니다. 이 짐을 다 내려놓으면 예수님께서 받아서 해결해주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나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고, 내가 이 권한을 여러분을 위해서 행사하겠다고 하십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짐 맡기고 감사하면 우리 아버지에게 찬양을 부르십시오라고.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함께 짐을 맡고 계시다는 얘기를 하십니다. 짐 맡기 위해서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짐을 맡기로 하고, 그래서 구원의 물을 주시기로 했다는 말이 삼위일체의 설명입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를 어디에서 보증해주셨냐, 짐을 어디에서 맡느냐 하면, 죽음으로 이끄는 짐을 보통 장소에서 맡지 않으시고 골고다 언덕이라는 곳에 가셔서 짐을 맡으셨습니다. 본래 옛날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그 표시로 짐승 첫배를 속죄물로 바쳐서 사죄함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죗값은 반드시 치러야만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짐승의 피를 대신드려 죄 사함을 받았고, 그것이 속죄의 전통입니다. 하나님은 이 전통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다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의 피를 받지 않겠다. 더 이상 희생양은 안 받겠다. 직접 내 아들 예수가 이 세상 과거, 미래의 사람, 모든 인간의 잘못된 희생을 내 아들로 치르게 하고, 내 아들이 흘린 피 값으로 용서하고, 모든 인간들의 피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읍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아들이 죽었습니다. 아들의 피 값으로 다 사죄하마. 이 피 값으로 사죄했으니 이제는 다시는 사람이나 짐승을 죽여서 피를 바치지 말아라고 하십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죽어야 할 짐까지 다 받아주시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표시와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여기에 오늘날의 십자가가 있구나 하고 십자가 아래에 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십자가 표시는 있지만, 망상 들어와 보니 그곳이 장사의 소굴, 타락한 성전이라면 짐을 내려놓을 수 없겠지요. 가나안 신자가 생긴 이유는 짐을 내려놓을 곳이 없어서입니다. 우리 교회는 짐을 내려놓는 장소이기를 바랍니다. 그 날이 오면, 그 곳에 가면, 짐을 일주일에 한번 씩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들 예수의 십자가 속에 모든 죄라는 짐을 다 내려놓게 하시고, 구원을 베푸셔서, 새로운 부활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짐은 무겁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능력은 가볍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짐을 내려놓는 사람은 너무 죄악이 심해서 눈물로 짐을 내려놓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부활의 은총은 웃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일본은 과거 역사의 짐을 계속해서 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역사의 짐, 내려놓아라. 한국 백성이 슬퍼한다. 북한은 핵무기 짐을 계속 가지려고 하더군요. 갖지 말아라, 너도 망하고 세계가 망한다. 혹시 우리 가운데 자존심의 벽 때문에, 허위의식 때문에, 부정부패 때문에 짐을 내려놓기 어려우면, 혼자라도 하나님께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구원 받으십시오. 그런데 짐 내려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거운 짐인데도 쉽지 않습니다. 짐이 따로 있고 짐 아닌 사람이 따로 있지 않아서입니다. 짐과 사람이 같이 있더군요. 제 경험입니다. 제가 암이라는 짐을 내려놓느라고 수술을 받았는데요, 수술을 안 받았으면, 내려놓지 않았으면 저는 지금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암이라는 짐을 내려놓았습니다. 내려놓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마취하고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깨어났을 때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짐 내려놓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구나. 짐을 내려놓은 다음에는 상했던 좋은 세포를 증강시켜야하고, 건강도 회복해야하고, 그러지 않으면 내려놓은 짐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소생하는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짐 내려놓는 일이 아픈 것 압니다. 그런데 내려놓은 다음에는 부활 생명으로 구원 우물의 생수를 마시고 다시 건강하십시오. 옛날의 아픔을 척결하고 새롭게 건강하십시오. 그러나 생명수를 마실 수 있는 은총은 짐 안 내려놓고 받을 수 있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힘든 은혜입니다. 땀을 흘려야 하는 값비싼 은혜입니다. 회개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힘들게 회개하면 하나님이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다음에 부활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새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을 때에는 눈물을 흘렸지만, 부활의 생명을 줄 때에는 기분 좋게 웃으실 것입니다. 생명의 힘은 웃고 아름답습니다.
예수가 말씀하십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핵폭탄을 가지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여러분의 짐을 맡지 않습니다. 나는 아주 온유합니다. 나는 미소를 가지고 여러분의 짐을 맡고 힘을 주겠습니다. 나는 거만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아주 겸손해서 밑에 내려가 여러분의 짐을 받고 작지만 아름다운 부활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내 짐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가볍습니다.” 우리가 짐을 다 내려놓으면 내려놓은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빈 공간은 채워야 하고, 빈 공간을 부활의 은총으로 채워주시는 역할을 예수께서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짐을 내려놓으세요. 어렵지만 내려놓으세요. 내려놓고 새로운 능력을 받아서 명쾌하고 아름답게 사세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이 뜻을 아들 예수께서 실천하셨고, 오늘 그 기쁜 소식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오늘 짐 받는 얘기를 우리에게 해주셨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가볍고 아름다운 새로운 생명의 힘 받으시지요. 나라도 필요합니다. 가정도 필요합니다. 한분 한분에게도 필요합니다. 어렵지만 내려놓읍시다. 비웁시다. 그리고 새롭게 힘을 받읍시다. 웃으시는 예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다가옵니다. “내가 짐을 받아주마.” 새로 은혜 갈구하며 삽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