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11:1-9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주님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아멘.
사도행전 2:5-8,12-13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멘.
마가복음서 8:27-30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멘.
설교문
성령 충만! 오늘 예배에서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 첫 주일입니다. 성령이 오늘부터 임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렇게 성령의 오심을 기념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성령이 오시면 도대체가 무슨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까요? 이것을 명확히 깨달아 알라고 오늘 성령강림절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들입니다. 하나는 지금부터 약 4천년 전의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잘못되고 허황된 꿈을 꾸면 바벨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또 "바벨탑"은 아주 부정적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창세기 내용에 보면 바벨탑 이야기는 구약성경의 입장에서 보면 인류가 범한 아주 반신적인, 신에 저항하는 그런 이야기의 효시로 되어 있습니다.
바벨탑, 바벨이라는 도시에 탑을 붙이면, 그 안에 가장 높은 탑을 쌓아서 바벨 신도시 탑 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탑이 세워졌지만 곧 탑이 무너졌고, 바벨탑 중심으로 세워졌던 신도시 곧 바벨이라는 도시가 무너지는 이야기입니다. 바벨의 어원은 바랄(balal: 혼동시키는)로, 사람을 흩어놓고, 마음도 흩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바랄이 발벨(balbel)로 되었고, 이후에 발에서 라멜(엘)이 생략 되면서 결국 혼잡을 의미하는 바벨(Babel)이 되었습니다. 어원으로 보면 "바벨"과 그 당시 근동세계의 강자였던 "바벨론"(Babylon)과 동의어입니다. 물론 바벨은 바벨론 제국의 신도시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합니다. 노아시대는 홍수로 세상이 다망했습니다라고. 그 이후 자손이 번성했는데, 노아의 후손들이 이렇게 생각 했습니다. 우리가 지혜와 힘을 모아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자. 이 도시는 홍수로 망하지 않는 새로운 문화, 문명의 경정체인 도시로 만들자. 홍수가 없게 하자. 우리 힘으로 해보자. 동시에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능력이 출중한데, 지혜를 모아서 우리 인간의 능력과 인간의 문화를 과시할 수 있는 상징적 건축을 하자. 그런 생각을 모아 생겨난 건축의 이름이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에 관한 구체적인 사적 기록은 없지만, 고고학자들의 연구결과 바벨탑은 바벨론이 출발한 B.C 2000년경 세워졌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하나의 강대한 제국으로서 그 뒤에 엄청난 세력을 떨쳐서 이스라엘도 점령했습니다. 너무 문명이 발달해서 바벨론하면 문명의 화신, 문화의 최고봉으로 알려졌던 이름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벨신도시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없지만, 바벨탑을 하나하나 쌓았다고 되어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탑을 쌓을 때 크고 작은 돌을 놓고, 돌과 돌 사이를 진흙으로 발라 연결하고 메웠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나라의 이야기를 보면 이미 B.C 2000년 경에 구워낸 벽돌로 집을 짓고, 벽돌과 벽돌 사이를 역청으로 이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역청"이 원어로 아스팔트입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아스팔트가 이미 바벨론에 있었습니다. 아스팔트는 유프라테스강 근처 분화구에서 나오는 탄산화 수소라 이름하는 역청이고, 그것을 접착제로 사용했답니다. 벽돌과 기와장 속에는 헌물한 사람들의 이름도 새기고, 탑을 쌓았답니다. 탑 높이가 얼마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지만, 고고학자들의 연구결과 91.5m쯤 되었을 거라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당시에 90m정도 높이의 탑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건축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신도시는 우리 문명의 꽃이고, 바벨론 탑은 이 문명의 꽃을 수놓는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명예, 인간의 가치를 드높이는 상징인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위에서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바벨탑은 우리를 배제하기 위한 탑이다. 창조주 없이 살려고 하는 인간들 자신의 노력의 산물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것을 보시고, 내려가서 이 바벨탑을 허물어야 되겠는데, 탑을 허물지 말고, 다른 것을 허물자. 그렇게 계획하셨읍니다. 당시의 세계 언어가 하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로, 하나의 언어를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언어를 흐트러뜨리자고 결심합니다. 서로 하나의 언어로 말하지만, 못 알아듣게 하자. 그래서 다른 언어이해가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탑을 쌓다가 언어이해가 다르니까, 소통이 않되니까, 신도시 건축 계획을 포기한 것입니다. 바벨 탑도 쌓다가 중간에 그만 둔 것입니다. 탑이 무너진 것보다도 언어가 무너졌습니다. 소통 구조가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바벨탑 역사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과 함께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에덴동산을 만들고, 그럼에고 후에는 그 곳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번성하여 살게 하고,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신 후 노아의 방주역사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려고 하는데, 인간이 또 반기를 듭니다. 인간들이 탑을 쌓았습니다. 하늘에 닿게, 곧 하늘을 무색케하는 인간의 고욕을 담은 탑을 쌓을 때 일이 벌어집니다. 상징적인 표현이긴 합니다만, 하나인 언어를 다원화 시키자고 하나님이 계획하셨죠. 탑쌓는 인가들의 언어이해가 달라졌더니, 소통이 안 되어서 신도시를 건설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엄청난 사건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같은 한국말을 쓰는데, 모두 알아들으시나요? 북쪽과 남쪽은 같은 말 사용하는데 다 알아 듣나요? 가정에서, 사회에서, 정치권, 종교계 할 것 없이 통상으로 쓰는 언어는 한국어 하나입니다. 그런데 서로 잘 알아 들으시나요? 혹 한 언어 안에서 살면서도 우리가 서로 흩어져 있지 않나요? 언어만 흩어진 게 아니라 사고도 흐트러집니다, 생활방식, 문화적 가치관도 흐트러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언어를 쓴다고 해도 하늘의 뜻에 반하면 서로간에 흐트러진다, 무너진다, 그러한 말씀입니다. 언어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바벨탑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말은 하나인데, 서로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일종의 "바벨탑 세상"이 됩니다. 4천 년 전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야기 만이 아니고, 지금도 이런 현상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고백합니다만 저는 제가 말을 해 놓고선 내가 왜 그 말을 했는지 자책 할 때가 많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분노만 폭발 할뿐 해법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같은 말을 쓰는데도 독백하는 말로 씁니다. 그러니 사고가 납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도 같은 말을 썼는데, 못 알아들었다는 것이지요. 이유는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불신했고, 불신은 불통을 낳고, 불신은 또 불통을 낳는 때문입니다. 불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속까지 믿을 수 있으면 벌서 다 알아 듣잖아요. 못 믿고 의심하면 못 알아듣지 않습니까. 신과 인간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하늘과 땅의 불신은 불통을 낳습니다. 그 상징적 표현이 언어의 흐트러짐입니다. 언어만 흩어진 것 같습니까? 마음도 사고방식도 다 흐트러졌습니다. 흩어진 세계가 오늘 바벨탑 세계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사건 이후로 이제는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사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결심하십니다. 그래서 바벨탑 사건 바로 후에 나오는 역사의 이야기가 바로 아브라함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신뢰의 조상입니다. 신뢰로 뭉친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합해서 구원의 역사를 전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역사를 하나님이 직접 관여하시는 구원의 역사라고, 곧 구속사(Heilsgeschichte)라 하며, 그 이전 것은 일반 역사라고 하여 성격상 구분을 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신뢰가 망가지면 소통이 무너진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럼 성령은 무엇인가요?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불신을 신뢰로 바꾸시는 분이시고, 소통을 하게 만드시는 영입니다. 그 영이 바로 하나님의 영, 성령이십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죠. 부활하셨죠. 그리고 40일 계시다가 승천하셔서 이 땅에는 더는 안계십니다. 그런데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나 대신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보내마고. 성령을 통해서 나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고,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대들이 나와 그대들이 성령을 통해서 서로 소통하자. 그리고 믿는 자들이 모여서 함께 소통하며 살자. 그 증표로 그 능력의 주인으로 성령을 보내마. 그런 약속과 분부입니다.
성령은 불신을 신앙으로 만드는 영. 불통을 소통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이제 바벨탑과 정반대현상이 생겼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이라 이름 하는 곳에 120명이 모였습니다. 120명은 상징적 숫자입니다만 전세계 흩어져 사는 문명과 문화와, 인종과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각자 전혀 다른 언어를 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와서 설교를 합니다. 히브리어 말로 설교했겠지요. 설교했더니 모두가 알아들었습니다. 모두가 다 알아 듣고 감사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 다른데 한 언어를 듣듯이 다들 알아들었습니다. 소통이 되었습니다. 누가 소통을 시켜 주나요, 성령이 소통시켰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너무 기뻐서 기쁜 얼굴이 마치 술 취한 사람 같았습니다. 완전히 스스로를 개방했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모두의 마음이 열리고 소통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우리에게 소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했기에 소통이 되었습니까? 오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한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이 오늘 마가복음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오늘 묻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누구라고 하더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보고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아니 옛날 구약시대의 엘리야가 다시 왔다고 합니다. 아니면 모세가 다시 등장했다고 합니다. 여하튼 귀한 분으로 선생님을 추앙하고 있습니다. 모세, 엘리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모든 사람이 예수를 보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읍니다. 사람의 말속에 사고방식, 믿음의 형태, 인지 방법, 다 다양하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제자들이 답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구약에서 이야기 하는 선생님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 그 분이십니다. 그 말을 헬라말로 하면 "그리스도" 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냐 하면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말씀은 언어가 달라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믿음만 있으면, 언어의 차이는 문제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언어 속에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들어오면, 그 고백이 모든 언어를 꽤뚫고 들어가서 소통을 가능케 합니다. 이 소통이 믿음의 그릇이요 믿음의 결실입니다. 예수가 주님이심을 믿는 것이 소통의 주제요. 이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그 성령을 보내달라고, 여러분께서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실 때 반드시 전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그렇게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의 영은 가짜 성령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노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주심을 고백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지요. 그냥 생각해내거나 꾸며낸 영이겠지요. 또는 자기 자신의 영이겠지요. 진짜 성령은 이런 고백이 나오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분은 죽으셨고, 살아 나셨습니다. 나와 함께 죽고 나와 함께 살아 나셨습니다. 내가 부활생명의 은혜의 화신입니다. 이런 고백말입니다. 이제 이렇게 고백하고, 성령이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그러면 저 자신과 제 속의 자신과 대화할 수 있고, 하늘과 땅이 대화할 수 있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성령 강림절의 성령은 이렇게 우리를 믿게 하시는 분의 영입니다. 그런 영을 "구속의 영"이라 합니다. 또 믿는 자가 진실로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 하나님과 통할 수 있게 해주시는 "소통의 영", 바로 두 가지 영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시고, 성령을 갈구하시는데도, 믿음과 소통이 잘 안 되면, 그것은 갈구가 잘못되었거나. 또는 성령의 오심을 빌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성령은 그러게 임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마가 다락방의 세상은 언어와 상관없이 다 소통이 가능합니다. 다른 말을 쓰고,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지고, 인종이 다른 120개 모든 족속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걸 무엇이라고 하면 요즘 용어로 우리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입니다. 곧 "에큐메니칼 모임"이죠. 에큐메니칼 모임이 다른 게 아니고, 언어와 사고가 다른 사람들이 모였습니다라는 거지요. 이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첫 번째 뜻입니다. 다양하고 다른 사람들이 왔고 모였는데, 성령의 능력을 받았더니 모두가 통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상통하게 하는 것, 이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두 번째 뜻입니다. 우리는 그냥 뜻없이 에큐메니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달라도 함께 모입시다. 성령 안에서 모이면 통할 수 있습니다. 통하면 기쁨이 생깁니다. 통하면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통화면 대화할 수 있습니다. 통화하면 나눌 수 있습니다. 안통하면 죽음의 사회입니다.
제가 병원에 가서 검진 받고 그후 수술 끝나고 나서 다시 검진 받으러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물으시더라고요. 수술 부위를 만지면서 아프냐고? 사실은 많이 아팠는데, 조금 아프다고 했습니다. 아프다고 했더니, 아이고 목사님 다행이시네요. 안 아프다고 했으면 이부분은 죽은 상태라고 한답니다. 그러니 병원가시거든 아프면 아프다고 하세요. 저는 안 아프다고 하면 좋아 할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까 아픈 것은 통하기 때문에 아픈 것입니다. 안통하면 감각이 없지요. 안 아프지요. 통하면 눈물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지요. 왜요 통하니까요. 안통하는 무감각의 세계를 원하십니까? 갈등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무주공산을 원하십니까? 그것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삶속의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깨달았습니다. 성령을 받아서 통할 수 있으면 아플 때 같이 웁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셔서 위로해 주십니다. 통해서 기쁘면 같이 웃습니다. 함께 찬양합니다. 성령이 오시니 더더욱 함께 찬양합니다. 세상에 질곡이 많고 아픔이 있지만, 그것을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로 받읍시다. 살아 움직이면 그만큼 우리에게 일감도 주어집니다. 그래서 대화해 보게됩니다. 서로 만나 봅시다. 껴안아 보고, 때로는 싸워도 봅시다. 목적은 서로 살아 있기 때문에, 살기 위하여, 말입니다. 바벨탑에서 역사했던 인간의 영은 미안하지만 서로 믿지 못해서 통할 수 가 없었습니다. 불신은 불통을 낳습니다.그리고 흩어지게 합니다. 죽은 세계죠.
마가의 다락방세계는 다름니다. 성령이 임했더니 다양한 것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서로 통하니까요. 다름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OECD 국가들 가운데서 우리나라가 외국사람, 다문화 가족을 제일 싫어한다고 합니다. 자기의 문화만을 제일 좋아하는 나라라고 합니다. 같은 언어와 문화속에 살면서 서로간에 제대로 통하지도 못하면서 말이죠. 심각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하지만 서로 모여서 성령을 받으면 통할 수 있습니다. 통하면 새로움을 창조하고, 생명을 창조하고, 그런 곳에 창조의 세계가 열립니다. 안통하면 죽습니다. 언어가 하나만 있다고 한들 그걸로 뭐합니까? 한 문자를 쓴다구요? 무슨 자랑입니까? 정말로 서로 좀 통합시다. 통하며 삽시다. 우리 함께 살아야 됩니다. 함께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성령은 살립니다. 그래서 성령을 표현하는 말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은 "통하게 하는 영", 성령은 "살리는 영, 성령은 "창조해 주는 영"이라는 용어입니다.
오늘 성령 강림절에 창조의 은혜를 새로 받으시지요, 성령강림절에 부어주시는 생명을 살리는 성령을 받으세요, 그리고 소통의 영을 받으십시오. 서로 통합시다. 통해서 함께 찬양합니다. 통해서 함께 끌어안읍시다. 통해서 새로운 함께 세상을 만드십시다. 성령이 임하시면 세계가 달라집니다. 우리 자신들도 달라집시다. 오늘부터 달라집시다. 주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