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본지 편집고문) ⓒ베리타스 DB |
요즘 한국에는 이렇게 부자(父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서 큰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는 괴이한 현상들이 자주 일어난다. 얼마 전 대기업 H사의 김모 회장의 둘째 아들이 술집에서 얻어 맞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회사직원인가 깡패들을 데리고 그 술집에 나타나서 보복폭행을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다. 그 아들이 다시 마약을 하다가 수사를 받고 있다. 또 삼성의 이건희 회장의 손자, 즉 이재용의 아들이 영훈국제중학교에 사회적 배려대상으로 입학해 물의를 빚더니 자퇴하는 수모를 당했다. 요즘 한창 비자금 문제로 수사를 받고 있는 CJ인가 하는 회사도 이병철 회장의 장남의 회사가 아닌가? 그 뿐인가? 광주 민주화항쟁을 총칼로 압살하고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주범인 전두환은 대통령시절 기업들로부터 강제로 긁어모은 재산들을 자식들에게 넘긴 것이 문제가 되었다. 거의 돈을 번 적이 없는 자식들이 몇 천억, 몇 백억 대의 부자들이 되었다. 또 그는 재산이 얼마 없다고 공언하고는 호의호식하며 산다. 그는 돈을 다루는데 귀재라고 한다. 요즘 이렇게 부자지간에 일심공모(一心共謀)하는 일이 유행인가 보다. 큰 교회 목사들도 자식들에게 교회를 대물림 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 하는 것일까? 그렇게도 증오하는 북한의 세습체제에서 배워온 것일까? 그렇다면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려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부자지간의 일심공모의 전통이 대대손손 전승될까 두렵다.
성서에 보면 예수는 부부는 동체(同體)라고 했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가 10:7-8). 이 말씀에 부부는 한 몸(同體)라고 했지 한 마음(一心)이라고는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결혼하면 부부는 신체적으로 한 몸이 될 수는 있지만 꼭 한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인 것 같다. 그래서 성서학자 안병무는 부부는 일심도 동체도 아니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부부가 한 마음이 될 수도 없거니와 어느 하나는 먼저 죽는 것이기 때문에 동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가끔 신문 사회면에 남편이 부인을 시켜 다른 남자들을 유혹하여 잠자리를 같이하게 하고 남편이 나타나 위협하며 돈을 갈취하는 기사를 본다. 그럴 때마다 이들이야말로 정말 일심과 동체의 부부라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어찌 일심동체가 아니고서 남편이 아내를 꽃뱀으로 내 놓고 돈을 갈취할 수 있겠는가?
앞서 살펴본 조용기나 김승연 그리고 이건희, 이맹희, 전두환 집안의 부자일심동체 혹은 일심공모 사건들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게 된다. 필자는 감히 자식과 공모하여 주가조작을 하거나 부정하게 갈취한 돈을 자식들에게 넘겨 사업을 하게 하거나, 자식이 당한 폭행을 폭력배를 사서 보복하거나, 돈을 주고 어린 자식을 좋은 학교에 입학시킬 자신이 없다. 아니 필자는 그럴 능력도 실은 없다. 설사 내가 그럴 능력이 있다 해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거나 특별히 양심적이어서가 아니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식과 함께 어떤 범법이나 부도덕한 행위를 공모하여 실행에 옮길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부끄러워서 그런 불법행위나 부도덕한 행위의 공모를 자식이나 혹은 아내에게 감히 제안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공모를 제안 받은 자식이나 아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내 자식이나 아내가 나를 얼마나 비열히고 부도덕한 인간으로 보겠는가? 나는 더 이상 자식이나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어떤 목사는 가족들에게는 폭군이면서 강단에서는 천사의 소리같은 설교를 마구 해대니까 그 아내가 하루는 목사를 데리고 강단에서 살자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 있다. 나는 목회하면서 아내나 가족이 두려워서 엉터리 설교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많은 교인들을 모을 수 없었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윤리학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낯선 사람들이 어쩌다 눈길이 마주치면 눈을 내리깔게 되는 것은 인간 속에 있는 수치 즉 원죄에 대한 수치심의 상징이라고 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범죄나 부도덕한 행위를 할 경우 수치심을 느낀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인간들에게서는 이러한 원초적 수치심이 사라진 것 같다. 인간들이 수치를 모른다. 얼마 전 어느 여성학자의 “뻔뻔함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글을 읽었다. 우리 사회의 인간들은 언젠가부터 뻔뻔해짐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가져야 할 수치심을 떠난 인간, 새로운 인간들로 태어난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필자는 내 자식이 그런 범법행위나 부도덕행위의 공모를 나로부터 배우는 것이 두렵다. 내 자식이 나에게서 그런 행위들을 배워서 뻔뻔스럽게 수치를 모르고 사는 세상이 올까 두려운 것이다. 수치를 모르는 자식이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면서 살아갈 때 그는 한편으로는 교만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만하게 살아가는 인간이 될 것이다. 이러한 범죄행위나 부도덕한 행위는 인간이 부유한 부모들에게 의지하여 자기능력 이상으로 뭔가 되거나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교만과 함께 자기노력 없이도 편히 살 수 있다는 태만에서 시작되며 그것은 결국 자기와 세상을 속이는 기만으로 떨어지게 된다(신학자 칼 바르트의 죄론).
한국사회에서 가장 공고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가장 커다란 병폐는 혈연, 학연, 지연이라고 사회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혈연의 병폐는 이미 앞서 언급한 이기적 가족주의 형태로 나타나고, 학연이나 지연의 병폐는 출신학교나 출신지역 사람들끼리 이해관계에 얽혀서 부정과 부패의 사슬로 나타난다. 역대 정부들에서 특정학교나 특정지역 출신들이 중요한 관직을 독식하는 관행은 이명박 정부에서 극에 달했었는데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요즘 유행하는 금융계의 모피아나 원자력발전을 주도한 마피아들이 모두 이런 잘못된 학연이나 지연에서 생겨난 일심공모 집단들이다. 이러한 혈연, 학연, 지연으로 얽히고 설킨 먹이사슬들은 근대민주주의 국가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합리성과 공공성을 파괴하고 생활세계를 특정집단의 식민지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은 금융계를 장악하거나 원전사업을 장악하여 국민들을 착취하여 자기들의 배만 불리는 암적 존재들이다. 여기에서 온갖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비리들의 온상이 되며 인간들을 수치와 염치를 모르는 야만으로 몰아간다.
성서에도 보면 혈연을 내세워 구원을 얻으려는 유대인들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혈통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나면 모두 하나님의 자손이고 그들은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사람들은 믿었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러한 혈통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믿음을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마태 3:9) 미국인으로 태어나면 구원받는다는 생각에서 한국의 부유한 모피아와 마피아 집안들은 임신한 며느리와 딸들을 미국으로 보내서 손자녀들을 미국인들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인이 되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도 그 점을 말한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15:50).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부자가 공모한 경제 모피아나 원자력 마피아 아니 종교마피아의 집안에 자녀가 되는 것이 곧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성서는 말한다. 주님 주님하고 되뇌는 입술만의 신앙인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타자를 위한 존재”(본회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7:21 타자를 위한 존재, 타자를 위한 삶, 공동체적 삶에서만 구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