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성령으로 태어나는 자

2013년 6월 2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이사야서 6:1-8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그 때에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아멘. 
 
로마서 11:33-36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 낼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으며, 누가 주님의 조언자가 되었습니까?”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3:1-8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였다.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아멘. 
 
설교문 
  
성가대 찬양 감사드립니다. 오늘 찬양을 들으면서 저는 이런 느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는데, 그 때 성가대가 찬양을 합니다. 예수님의 올라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찬양을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러 제자들과 유대백성들을 앞에 놓고 병 고침의 기적도 행하시고, 하늘나라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은 특별한 만남이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 사람은 예수께서 가장 비판적으로 여기셨던 바리새파 사람 중의 모범적인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종교적으로 경건하며, 또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사회적으로도 가장 상류층이며 완벽한 지도계층에 속한 사람입니다. 동시에 이분은 정치적으로도 굉장한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당시의 로마제국 치하에서 유대인들의 의회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정도가 될 듯합니다. 행정사법권은 없습니다만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에 관한 입법을 관장했습니다. 그 구성 인원은 120명쯤 되었으며, 그 중의 한 분이 니고데모입니다. 또 성경말씀에 보면 이분은 굉장히 부자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니고데모는 경제적 여유도 있고, 지위도 높으며 많이 알고 행실도 착한 모범적인 지도자입니다. 이 분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니고데모와 시골변방 출신의 나사렛 예수, 둘사이에는 외형상 학력차이, 빈부차이, 신분의 격차가 크게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혜성같이 나타나 기적을 행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고 또 그렇게 칭함을 받습니다. 그 당시 지도층이라고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행적이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고, 예수가 사람들을 혹세무민 하고 있다고 낙인찍어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와 하늘나라,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대화는 니고데모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 형식으로 이루어 집니다. 제가 그 내용을 요약하여 해석해 풀어보겠습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말씀이 이 땅에서 사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 땅이 꼭 말씀하신 하늘나라와 똑같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두 나라 이야기를 니고데모가 하고 있읍니다. 예수님도 두 나라 이야기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나는 이 땅에 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데, 여기 있는 나라 말고 또 다른 나라를 내가 선물로 주마고. 사람은 누구나 두 세계에 삽니다. 땅이라 이름하는 세계와 하늘이라는 세계에 삽니다. 옛 사람들은 공간적으로 이 두 세계를 이원화시켜서 완전히 구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옛날 사고방식을 벗어납니다. 내가 이 땅에 온 목적은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심어 주려고 왔다. 그래서 나를 믿는 사람은 두 세계를 동시에 사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 이해가 가십니까? 땅의 나라가 있고,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공간으로 따지면 하늘나라는 위에 있고, 땅의 나라는 아래에 있습니다. 그렇게 흔이들 상식적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과학서적을 보고 배운 것 중에 하나가 있읍니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에 관한 설명입니다. 사과가 때가 되어 사과 줄기 받침이 썩으면 사과가 땅에 떨어집니다. 과학 이론은 중력의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모든 물체에는 땅에서 끌어당기는 힘의 작용이 있고, 위에서 끌어당기는 힘의 작용이 있습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위에서 끌어당기는 힘보다 아래서 끌어당기는 힘이 더 커서 사과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여러분 만유인력의 법칙 다 아시죠? 
 
그렇다면 사람이 죽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법킥에 따르면 사람이 죽는 것은 하늘에서 끌어 올리는 힘과 땅에서 끌어내리는 힘의 관계 가운데 땅에서 끄는 힘이 강해서일 것입니다. 너무 강하면 죽은 사람은 죽고 땅 속에 묻힙니다. 하늘에서 끄는 힘이 모자란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 32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죽은 후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로 올라간다". 승천하시면서 하시는 약속이 "내가 올라가면 이 땅에 있는 여러분을 하늘로 끌어 올리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내가 죽었다가 하나님의 인력(引力)에 의해서 살아났듯이 나를 믿는 여러분들을 하늘로 끌어 올리겠다는 뜻이겠죠. 그 말은 죽은 자들도 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부활시켜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 주시겠다는 뜻이지요. 제가 그 말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땅의 끄는 힘이 너무 강해서, 하늘이 죽도록 내버려 놓은 게 아니고, 땅의 끄는 힘이 강해서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다시 사는 것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들 예수에게 권한을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사람 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끌어올려 하늘로 올라가게 하시는 것이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람이 두 세계를 사는데 이 땅의 세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면 살 수 있는 세계입니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이 땅에 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끌어 올리는 그 하늘나라는 필수과목이긴 하나 선택을 먼저 해야 합니다. 선택필수 입니다. 내가 내힘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이 힘있게 끌어올려 주어야 땅이 아래로 밀어 당기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상관관계 역사는 누가 우리 생명을 끌어 주느냐와 이끌림을 받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끌어 올리는 힘, 이 힘을 오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매력적 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매력은 끌어 올리는 힘에 있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끌어 올리시니까 부활을 사는 것이지, 우리가 스스로의 힙으로 하늘로 가는 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니고데모라는 이 땅의 대표적인 인물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힘은 끌어 올린다. 너도 끌어 올림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요. 그럼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니고데모가 묻습니다. 그 때 니고데모는 다시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이 땅에 한번 태어나 사는 것으로 끝이다. 하나님이 끌어 올릴 때는 하늘에서 낳음을 받아야한다. 하늘에서 낳은 자를 끌어 올리지, 하늘에서 낳지 않은 사람은 끌어 올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두 번 태어나야 한다. 땅에서 태어나야 하고, 다시 하늘에서 태어 나야한다. 하늘에서 낳는 다는 말은 성령으로 낳는것이라 이해하여라. 성령의 은총을 받는 것이 하늘에서 낳는다고 함을 알아라. 그런데 그 말은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서 낳는다는게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이 볼수있는 원정출산이 아닙니다. 성령이 이미 와 계시기 때문에 이 땅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받으면, 성령이 우리를 끌어당기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 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고민이 생깁니다. 위에서 낳는다는 말,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다는 말, 하나님이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는 말, 중생, 이게 무슨 뜻일까 하며 고민입니다. 이 땅의 나라만 생각하다 보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늘나라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 이야기를 들이시면서, 아 이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의 특이한 형태를 대변하는구나라고 보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모습은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저는 니고데모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식도, 덕망도, 재산도, 인격도 부러운 사람입니다. 다만 위에서 태어난다는 말, 중생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도 못하고, 경험도 못했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고 고민에 빠져있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유대 백성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물론 예수는 잘 죽었다고, 현혹하던 사람이 죽었노라고, 하나님을 훼방 놓던 사람이 죽었구라며, 박수를 쳤습니다. 예수의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들도 도망갔습니다. 유대인들의 반발하는 반응이 옳은것 같고, 우리가 믿는 선생님이 틀렸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도 막상 스승인 예수를 떠났는데, 오늘 진지한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세계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를 찾아 왔던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예수의 십자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재밌는 현실인데요, 마지막 우리 요한복음,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보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아리바데 출신 요셉이라는 사람이 예수의 시신을 인계받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사용하려고 했던 무덤에 예수를 안치합니다. 그때 우리가 흔이 잊어버리고 있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니고데모는 그냥 지켜 본 게 아니라 시신을 썩지 않게 하기 위해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 100g 정도를 가지고 와"(요한복음 19:39) 죽은 예수 시신에 발라드리자고 요셉에게 요청합니다. 예수의 시신에 몰약을 발라준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시죠? 우리 오늘 세계의 역사에서 이스라엘 신앙의 눈으로 심판받은 "반역자 예수"는 정죄 당했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예수를 정죄한 본산지에서 정죄한 집단의 한 대표자가 나와서 하는 말, "나는 이 사람에게 썩지 않는 몰약을 전해주고 싶다. 그의 몸에 바르려고 몰약을 가지고 왓다". 이분의 용기 가상하지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냥 소설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화 중의 실화로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큽니다. 여러분이 만약 니고데모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힘없는 자가 정의를 외치다가,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다, 그냥 세상 권력에 죽임을 당했는데, 세상 권력의 핵심인 한 사람이 와서, 당신한테 내가 가진 몰약을 진심으로 받치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같이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면 아마도 이 내용이 대서특필 되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그가 던졌던 질문은 무엇인가요? 그가 질문한 하늘나라는 어떻게 이 세상나라와 다른가? 이 모든 질문과 답변을 담은 내용들이 대서특필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야 십자가를 포함한 모든 역사는 해석을 다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훌륭했읍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신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너무 훌륭한 사람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아주 중요한 대화로 보여 주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 나오면서 이 땅을 살아갑니다. 사실 살아가지만 혼자 살수가 없지요, 그래서 남녀가 결혼하면서 삽니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형태로든 남녀가 어울려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가 여자를 끌고, 여성이 남성을 서러서로 사랑하며 이끌며 살아가면 행복 할 것인데, 끌어당기는 진실보다 밀어내는 가식 때문에, 사랑하는 끌어당김 보다 미워하는 밀쳐냄 때문에 남녀 간에 불행이 생겨났습니다. 남성우위도 그런 한 결과물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피부색가지고 같은 인종끼리만 끌어당기면서 살고 색깔이 다르면 밀쳐내다 보니 인종차별이 생겼습니다. 같은 씨족, 부족, 민족이 모여서 우리끼리 잘 살자고 하며 민족이 다르면 배제합니다. 끌어당기지 않습니다. 민족주의, 집단이기주의가 생깁니다. 또 빈부격차가 생겼습니다. 부자끼리만 살자. 지식층끼리만 모여 살자. 가난한 자를 배격하자. 무식한자 배격하자. 신분 낮은 자를 배제하자. 이처럼 끄는 힘이 실종된 세상은 전쟁과 폭력의 세상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우리끼리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우리끼리 살자며 무소불위를 떨친 율법주의가 곧 유대민족의 종교적 민족적 편협주의입니다. 이로 인해 이 땅을 만들어준 하나님의 마음이, 그 분의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고통을 당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 인간끼리만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가노라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환경을 얼마나 파괴했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자연을 마음대로 속박하고 착취했습니다. 자연이 울었습니다. 환경이 소리쳤습니다. 환경이 무너졌더니 그 피해가 우리 인간에게 돌아왔습니다. 자연 환경은 우리와 똑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우리와 공존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기 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까? 수 천년 걸렸죠. 이제야 지속가능한 발전, 환경과 인간의 연대 등과 같은, 어떤 표현을 하든간에, 외침이 생겨났읍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인간이 자연을 서로 끌어안고 살아가는 파트너로 인지하고 공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 말씀으로 다시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서로 어울려 산다는 것이 엄청나게 귀중하지만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끌어당기며 살았으면, 자연이 인간을 끌어당기며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왜 서로 배제 합니까? 공동체는 함께 끄는 생활이지 서로 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두 세계를 선포합니다. 이 땅도 하늘나라도 하나님의 창조물인 둘은 서로 끌어당기며 살아야 한다고요. 인간은 육과 영이 있습니다. 육과 영은 다른 세계지만 육은 영을 끌어당기며 살아야 한다. 영은 인간의 몸을 건강하게 보호하고 끌어 당겨야 합니다. 몸이 있는 곳에 영이있고, 영이 있는 곳에 몸이 있읍니다. 사람의 몸과 정신, 육과 혼은 총체적 인격체로 둘이 서로서로 존중하고 공생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늘나라와 이 땅의 나라는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를 한나로 연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예수를 믿고 싶습니다. 
 
그 분은 오늘의 현대판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살면서 육도 건강하고, 영도 건강하고 싶습니까? 물질적 축복도 받지만, 영적 축복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인간의 도덕도 고양해야 하지만 하늘의 영성도 갖추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왜 땅과 하늘을 구별하십니까? 왜 육과 혼을 나눕니까? 땅과 하늘을 합하세요. 땅에 있는 사람이 자력으로 하늘로 올라갈 수 는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사람이 내려와야,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시는 그분이 이끄셔야 하늘과 땅이 하나되고,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는 구원이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나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온것입니다. 나를 믿으십시오! 
 
아까 끄는 힘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부활 할 수 있는 자는, 오늘 말씀 보면, 위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낳은 자만이 땅에 있다가 다시 하늘 위로 올라 갈 수 있답니다. 하늘에서 낳은 자만이 다시 죽어서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오직 예수만 가능합니다. 그럼 땅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 예수가 길이다"라고. 땅에서는 그 대들이 하늘로 올라갈 수 없지만, 내가 길이니 내 길을 따라 올라가면 내 힘 때문에, 내 이름 때문에 그대들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느니라고. 그래서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다. 고로 내 길을 따라서 하늘나라로 가라"고. 이 하늘나라는 죽은 다음에나 가는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이 땅 속에도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천국이 있지요, 그런데 천국은 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라 천국은 지상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상천국이라 하죠,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합니다. 나는 길이니 나를 중심에 놓고 나와 함께 하늘도 맛보고 땅도 맛볼 수 있느니라. 이 땅이 하나님 나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이 땅이 단순히 땅의 나라가 아니라 지상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땅 속에 임한 하늘나라가, 하늘을 품은 땅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오늘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도 하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고귀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목숨이 중요합니다. 세계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에 이사야는 왕이 죽던 해에 환상을 봅니다. 스랍천사들이 부지깽이를 들고 와서 이사야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고 했습니다. 땅에 익숙한 말만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수 없다. 입을 지져 언어를 바꾸어라. 하늘 언어로 말해라. 속된 언어를 가지고 하늘나라 선포 할 수 없다. 말하는 자들은 혀를 지져 새로운 말을 배워라고 말입니다. 하님은 부지갱이를 들어서 우리의 가슴을 지질수도 있고, 지성을 지질 수도 있고, 육성을 지질수도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성과 새로운 감성과 새로운 언어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이루게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로마서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것을 주셨는데, 모든 것이 높이 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그 분을 통하여 이 땅이 생성되고, 이 땅의 모든 것이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이유는 그 분이 이 땅에 와서 하나님나라로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라고. 저는 이 말씀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오늘 니고데모도 얼마나 고마워 했겠습니까.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을 때, 아마도 니고데모는 십자가와 부활자의 승천 현장 제일 앞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시기 까지 40여일 동안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그는 제일 앞에 서서 "내가 당신 길을 따라 가겠습니다. 당신은 속히 오셔서 이 땅에 당신이 말한 하늘나라를 이루어 주옵소서. 내가 동참하겠습니다"라고 간청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승천하시는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제 나는 가고 없다. 내 대신 성령을 보내마. 성령 받아라. 그리고 바꾸어라. 언어도 바꾸고, 마음도 바꾸고. 이 땅을 지상천국으로 바꾸고, 이 땅에서 행복하여라". 여러분, 성령을 받고, 새로 거듭나고, 새하늘과 새땅을 은총으로 받아 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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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