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베리타스 DB |
중국에서 천주교의 선교정책 논쟁은 조상 제사 문제였다. 소위 전례논쟁(典礼論爭)이란 것인데 예수회 신부들은 토착화 정책으로 조상 제사를 개종문제와 무관하게 하려했으나 프란시스칸 수도회는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로 믿고 제사를 폐지하는 것을 그리스도교로의 개종 필수 조건으로 삼았는데 마치 유대교의 할례 문제와 유사한 것이었다.
이 논쟁이 교황청의 문제로 비화되어 100년 동안 해결을 보지 못했다. 이조시대 남인파 천주교도들이 조상 숭배 문제로 박해를 받았는데 이것은 프란시스칸 수도사들의 영향이었다. 개신교 선교사들 중에도 보수파는 조상 제사 폐지를 그리스도교로의 개종 조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초기 한국의 신도들 중에는 가족의 박해를 받았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할례를 ‘손 할례’라고 평하고 할례 의식을 개종 조건으로 삼는 것을 비판한 셈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선교 활동에 있어서 중동지방의 이슬람 국가들에서 개종을 앞세우는 선교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나 힌두교나 유교가 뿌리 박고 있고 아시아 지역에서 지난 2000년 간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결사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는 그러한 종교가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우리가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
태양을 비롯한 만물 안에서 숨쉬는 우주의 최고신을 찾아서 영혼의 정화를 얻기까지 명상과 고행을 통하여 죄악이 반복되는 자기 삶의 고리를 끊고 열반(천당)에 들어 가겠다는 그 힘든 수도와 수행을 본 받은 석가의 종교도 사람의 구원의 한 길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여덞가지 기본 계명 밖에 108가지 계율을 가르쳐서 신자들이 그것을 외우며 명상하며 자기를 반성하는 수행을 하고 있다.
석가는 그 고행과 수행의 한 모범자일 뿐이고 신자 각자가 자기 힘과 노력(自力)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거기에 비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기뻐하고 찬송하며 손뼉치며 자신하는 것이 불교도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쉽게 생각하고 전도하지만 바울이나 베드로의 서신들에서만 보더라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일을 증거해 보이기 위한 실천항목들이 몇 가지나 되는지 정리해서 불교의 108계율과 비교해 보고 그리스도인들도 매일 또는 때때로 그것들을 외우고 명상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해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자력 수도와 자력 수행이 불교도들보다 못하면 그들을 개종시킬 생각은 접어두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유교가 뚜렷한 종교활동을 하는 것 같지 않지만 한국인의 정신력, 도덕적 질서관의 뿌리로서 살아 있다. 유교의 도덕적 및 윤리적 교훈은 인류사회 공동체의 질서확립을 통한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군신과 부자의 관계나 장유의 관계나 사제의 관계가 다 사회 각 단위의 공동체의 평화를 보존하려는 교훈이다.
그런데 이 모든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의 디자인과 조화되는 것으로서 그 모든 관계와 질서를 하늘 또는 천신의 명령으로 생각하여 그것들을 어기면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러한 인륜과 천륜이 무너지면 하늘의 노(怒)가 천재지변으로 나타나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하늘을 두려워했다. 중국의 상고시대의 문헌들이 이러한 교훈을 후대로 전승시켜 주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것을 많이 가르쳤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가르치고 있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경시하지 않았다. 특히 종교개혁으로 개신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었는데 하나님의 엄연한 정의가 사랑으로 포장된 설교를 많이 들어 온 신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른다.
하나님의 무서운 정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즉 나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나를 산 제물로 바칠 제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제단보다는 하늘에서 거져 내려오는 많은 만나가 쏟아지는 설교단 앞에서 배부르게 먹고 나오는 예배 행위가 전부가 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장이다. 그러다가 같은 식구 또는 식객들이 마음이 맞지 않으면 싸우고 패를 지어 예배당이 오합지졸의 싸움터가 되기도 한다. 평화가 없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유교신도들을 어떻게 개종시킬 수 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