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12:1-4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아멘.
고린도전서 1:18,22-25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5:4-11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아멘.
설교문
우리들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목소리를 내어 찬양을 하고, 기도 할 때도 깊은 마음을 담아 기도하고, 말씀을 새기는 것도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예배와 찬양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까. 낮은 곳에서 얕게 믿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소리를 내어 깊은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망원동 그소망 교회 교우 분들께서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겠다고 오셨는데 깊은 은혜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이 말씀인데, 이 말씀의 배경이 이제부터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선포해야하는데 세상 나라는 살기도 어렵고, 개념규정하기도 어렵다. 보이지도 않고 또 꼭 믿어야만 되는 세상 나라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려고 하는데 나를 도와줄 제자가 필요하다. 이 제자는 적당히 공부한 사람이 아니고, 적당히 사는 사람 말고 아주 깊은 곳에서 신앙 고백하는 사람을 내가 택해서 제자로 삼아야겠다. 이 결심을 가지고 오늘 제자를 찾으러 다닙니다. 그 첫 번 말씀이 오늘 누가복음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 말씀을 다 전파하시고 나서 제자들 앞에서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보아하니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조금 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낮은 곳에 던져 못 잡는 것이니 깊은 곳에 던져보아라.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와 제자들이 깊은 곳에 그물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너무 고기가 많아 자기가 탄 배로만 충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배까지 채워 두 배 가득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랬더니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 분 앞에서 승복합니다. 밤새도록 노력해서 안 된 것을 당신이 한 말씀을 듣고 깊은 곳에 던져서 이렇게 많은 고기를 잡았으니 당신 앞에 내가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정말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시지요. 나는 죄인입니다. 왜 갑자기 죄인입니까? 주님 고맙습니다하면 끝이지 주님 저를 떠나시지요. 제가 감히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이곳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죄를 고백할 때의 저는 죄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잘못을 범해서 법으로 심판 받을 정도로 제가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실직고합니다. 처벌 받아 마땅할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저는 죄인입니다 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결혼한 딸이 시집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식을 하나도 못 낳았습니다. 이 딸이 부모님을 생각할 때 어떤가요? 저는 아기를 못 낳은 죄인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제가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관습적으로 제 부모님을 생전에 잘 모시지 못한 죄인 된 자식입니다. 이렇게 표현하지요. 이 죄인이라는 말은 영적 죄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관습적으로 제 구실을 못한 죄인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희 같은 어부들은 사회에 설자리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안식일에도 겨우 일해야 밥을 먹고 삽니다. 안식일날 회당에 못갑니다. 그래서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서 유대교 율법에 정한 모든 율법들을 지킬 수 가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사람 취급도 못 받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잘못보다도 체제, 윤리, 사고, 사회 모든 체제가 나빠서 우리는 상놈이고 천민입니다. 천민과 같은 저희들에게 오셔서 이렇게 많은 고기를 잡게 하다니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겠습니다. 가시지요. 저희들은 상놈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상놈 같은 사람에게 와서 주님. 보통은 선생님 그렇게 표현하는데, 오늘은 주님이라고 합니다. 당신한테는 무릎 끊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내 목숨까지 맡길 정도로 감사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이 다 버립니다. 우리는 아무런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우리들을 떠나세요. 죄인들과 같이 하시면 됩니까?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죄 짓은 죄인도 사랑하지만 이렇게 따돌림 당하고 짓밟힌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깊은데 그물을 던져서 수많은 고기를 잡았듯이 그렇다고 고민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는 고기 잡는 어부 말고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마. 청천벽력의 순간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그냥 제자들 보도 고기 잡다 말고 와라.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재산, 배, 가정, 모두를 끌어서 나에게 와라. 우리 사람을 낚자. 사람을 낚되 몇 사람을 낚지 말고 우리 그물이 찢어질 만큼 몽땅 낚자. 온 세상을 구원하자. 하나님 나라로 채우자. 하나님의 가정도 채우자. 채울 만큼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자. 얼마나 힘찬 말씀입니까. 이 말씀에 시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또 많은 어부들은 자기 있는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좇아갔습니다. 베드로처럼 일확천금을 누리는 벼락부자가 되면 절대로 하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요즘 세상의 인심이 그렇습니다. 제가 잘되어 부자가 되고, 먼저 깨달아 잘났다 생각하면 주님이 가신 길 잘 가지 않습니다. 사업하다 완전히 망하면, 배우다가 실패해서 아무것도 안 되면, 주님 이 길이 아닌가 봅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주님의 사도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하나님 그렇게 믿으면 되나요? 잘나 갈 때도 하나님 믿어라. 풍성 할 때도 믿어라. 그것이 다가 아니고, 풍성한 뒤에도 하나님 나라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느니라. 못나갈 때만 하나님 믿으면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습니다. 무릎 끓고 간구해야지요. 왜 잘나갈 때는 믿지 않나요? 이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고기를 잡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까지 잡고 눈으로만 잡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도,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낚으려고 하면 잘 나갈 때도 주인이 하나님이시니라. 못 나갈 때만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다.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주님 제가 죄인인데, 이렇게 복을 주시나요. 복 주신 주님 따라가겠습니다. 우리한테 메시지는 하나님은 위기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 못나갈 때 하나님, 잘 나갈 때도 하나님, 변두리 있을 때도 하나님, 중심에 있을 때도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받아들이시면 여러분은 만복의 근원인 하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 말씀입니다.
제가 엊그제 인터넷을 정보를 찾다가 아주 훌륭한 보고서 하나를 읽었습니다. 1951년 한국전쟁 때 경기도 가평에 미군 40사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단장님이 시내를 돌아볼 때 150명쯤 되는 우리 아이들이 천막을 쳐놓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 장군이 전쟁 와중에 저렇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 부대로 돌아와 부대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공부하는 아이들의 눈을 보니 너무 감격스러웠다. 우리가 얼마의 돈을 모아 학교를 지어주면 어떻겠냐?” 그 당시 40사단 군인이 만 오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각자 2불씩 모아 3만 불이 모였습니다. 공병부대를 동원해 학교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가평고등학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고등학교를 지어주고 학교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 부대에서는 장군의 이름으로 하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 장군이름은 조셉 클레란드 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 말이 왜 사단장 이름으로 학교 이름을 짓느냐? 이 나라를 위해서 참전했는데, 이 나라의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처음 희생당한 전사자 군인이 있지 않느냐. 제일 어린 이름이 19살의 케네스 카이저 하사였습니다. 이 하사의 이름으로 학교 이름을 짓자. 대단한 사고입니다. 그래서 이 학교 이름은 카이사중학원 그랬다가 우리말로 가이사 중학교로 변경되었습니다. 지금은 이 학교가 가평고등학교가 되었습니다. 또 금년 2월에 40사단 소속 참전용사 5명이 천 달러를 장학금으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운 가이사학교에 장학금을 내야겠는데 나한테 나오는 연금에서 매달 장학금을 지불해라. 연금 받을 때 까지 장학금을 지급했다고 합니다.
제가 짤막한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군인이면 승리를 이끌면 끝이지 전쟁이 끝난 다음에 이 땅에 좋은 인재들이 나와서 평화를 일궈야지 하는 생각을 장군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작은 일 같지만 아주 큰일입니다. 전쟁 한복판에 들어와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할 일꾼을 지금 양성해야 한다. 이름은 반드시 높은 사람의 이름일 필요가 없다. 이 땅을 위해서 제일 먼저 피를 흘린 아주 작은 전사자의 이름으로 하자. 우리 사이에도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서 그물을 조금만 깊은 곳에 던지면 그냥 전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전쟁 이후에 평화를 일구는 사람을 낚는 어부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장군이 그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이 이렇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보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고, 성공도 하고, 성공을 한 발짝만 더 들어가 보면, 실패 속으로 한 발짝만 더 들어가 보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예측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일이 벌어진다. 그런 일을 위해서 나는 나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제자를 부르고 싶다. 아주 먼 이야기 아브라함 이야기를 오늘 창세기에서 읽었지요. 아브라함은 75세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너는 만백성을 이끌 조상이 되어야 한다. 조건은 현재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 선호하는 고향, 가정, 집, 땅,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라. 떠나서 내가 명령하는 곳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분명히 훌륭한 사람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떠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어디로 가라는 말씀도 없어지요. 그냥 가라. 아브라함은 이렇게 느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훌륭한 분이시지만 내가 그 말씀을 듣고 그 분이 말씀하시는 그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분은 내 삶의 더 깊은 곳에 계시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보다 조금 더 깊은 곳에 계셔서 내가 꿈꾸는 하늘보다 조금은 높은데 계셔서 나한테 축복의 말씀을 하신다. 나는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그 분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떠납니다. 오늘 성경말씀 보면 아브라함이 떠나는데 그냥 말씀이 중요합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약속입니다. 그 다음에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릴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주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할 것이다. 이 두 문장 이스라엘 백성이 아침부터 밤까지 줄줄 외우는 아브라함 찬가입니다. 우리의 미래의 조상 아브라함을 욕하는 사람은 하나님 눈 밖에 난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칭찬하는 사람은 함께 복을 받는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 복 받는 민족은 어느 민족이든 아브라함과 함께 가자. 아브라함을 칭찬하자. 유대백성의 신앙만이 아니고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깊은 곳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를 때 이렇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깊은데 던져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의 가장 깊은 곳은 하나님의 말씀, 예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깊은 곳입니다. 말씀이 우리가 앉아야 할 바탕입니다. 말씀이 우리가 서야할 가장 기본입니다. 그 말을 좀 더 깊은 곳, 내 말보다 훨씬 깊은 곳, 세상의 말보다 더 깊은 곳, 그 깊은 곳에서 하나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로 가야 되는데, 사도바울 선생님이 우리에게 적절한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고린도전서에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부터 가장 깊은 곳인 말씀입니다. 말씀의 집이 있습니다. 그 집은 어딘지 아십니까. 말씀의 집은 십자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말씀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가장 깊은 곳입니다. 그 곳에서 하시는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유대백성들이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냐? 왜 기적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지.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지 않으셨나하며 유대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헬라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은 바보짓이다. 지혜가 없는 짓이다. 지혜가 없는 예수는 따라갈 수 가 없다. 이 말씀에는 세계 문명의 2대 문명권이 있습니다. 헬라문명권은 인간의 지혜가 허락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히브리문명권은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신앙을 받아 드릴 수 없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지 않았고, 헬라 지혜가 보기에도 비참하고 바보같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복된 사건이 아니다. 세상의 물정, 세상의 지혜, 세상의 기적, 세상의 능력으로는 그렇게만 보이지 않지만, 십자가는 실패의 산물이고, 죽음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말씀에 집짓고 사시는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부활이라는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자체 속에 부활을 담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집 속에 부활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자리 잡고 계시다. 그 말씀은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을 잉태하고 부활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십자가의 말씀보다 더 귀한 말씀은 없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십자가 아래 말씀이 안 계시면 우리 죽음은 어떻게 합니까? 죽음을 넘어 설수가 없지요? 죽음 밑바닥에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음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음 속에 부활을 담았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는 모든 새로운 꿈속에 세상의 작품이 아닌 하나님의 작품인 하나님 나라를 가장 높은 이상으로 가져다놓았다. 인간이 보지 못할 뿐이다. 단순 소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즐겨하라. 기쁘게 살라. 노래하며 살라.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 더 조금만 깊이 내려가면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용솟음 치고 있다. 슬프다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슬픔 속에 하나님의 기쁨의 샘이 솟고 있다. 인간의 온갖 성공 속에 하나님 부활의 생명이 샘솟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것으로 다가 아니고, 한 걸음만 깊이 들어가면 그 곳에 하나님의 약속을 담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한 발짝만 깊이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한 발짝만 더 높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한 발짝만 더 넓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에서 보이지 않으셨지만 역사를 일으키시는 방법으로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깊은데 그물한 번 던져보세요. 그러면 이해할 수 없지만 엄청난 고기가, 사람이, 문명이, 역사가 이 그물을 통해서 올라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나와 함께 조금 더 깊은 곳에 가자. 거기서 나와 만나자. 조금만 깊이 갑시다. 조금만 더 높이 갑시다. 조금만 넓게 갑시다. 그분과 만나서 함께 사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