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출애굽기 16;12-18
나는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너희가 저녁이 되면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빵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너희는 나 주가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하여라. 그 날 저녁에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진 친 곳을 뒤덮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진 친 곳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안개가 걷히고 나니, 이럴 수가, 광야 지면에, 마치 땅 위의 서리처럼 보이는,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명하시기를, 당신들은 각자 먹을 만큼씩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당신들 각 사람은, 자기 장막 안에 있는 식구 수대로,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하니,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인 것이다. 아멘.
사도행전 2:43-47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아멘.
요한복음서 6:29-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그들은 다시 물었다. 우리에게 무슨 표징을 행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당신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다 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참 빵을 너희에게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아멘.
설교문
우리는 찬송을 부르고 나서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찬송은 하늘의 음성과 땅의 감사가 함께 어울리는 소리입니다. 1976년,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에 독일에 가서 목회를 시작할 때 저는 독일교회 본부로부터 목회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30살이었습니다. 교회 가서 목회하며 설교할 때 유념할 것에 대해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젊은 목사님이 교회에 부임했답니다. 처음 설교를 준비할 때 자신이 배운 신학을 모두 동원해 신학적 논리와 근거가 분명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 설교를 20분 동안 했는데 설교를 듣고 난 후 교인들의 반응은 무덤덤했으며 별 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젊은 목사가 화가 나서 그 다음 설교에서는 신학적인 설교가 아닌 감성적인 설교를 해야겠다고 하며 부흥회식 설교를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교인들이 무덤덤했다고 합니다. 양쪽 모두 좋은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에는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옛날에 공중전화 박스에 보면 큰 전화번호부가 있었습니다. 독일의 그 지역에도 그게 있었습니다.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책을 가지고 강단으로 올라 왔습니다. 한 30명쯤 모인 교인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박종화교우, 주소는 중구 장충동 1가 26-6 이고, 전화번호는 2274-0161입니다. 그렇게 이어갔더니, 호명 당한 사람이 모두 아멘으로 화답하더랍니다. 30명 모두를 합하니 “아멘”이 넘칩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되겠다고 깨달았답니다.
이 이야기를 오리엔테이션때 하면서 잘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이 이야기 뒤에 숨은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 분이 정답 2개를 주더라고요. 하나는 교인들 하는 말이 이제야 처음으로 설교자의 말귀를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설교자와 청중의 말이 그제야 통한 것입니다. 예배는 그렇게 인도해야 한다는 거죠. 두 번째는 말하는 사람인 설교자와 전화번호와 주소의 당사자의 마음과 마음이 통했다는 거죠. 그래서 아멘!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이미 오래전 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매일 머릿속에서 새롭습니다. 주소를 알려줘야지 그가 어디에 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전화번호도 그렇죠. 그러면서 느낀 점이 아무리 훌륭한 음식을 주방에서 마련해 주어도 먹는 사람이 맛있게 먹여야만 좋은 음식일 것입니다. 입맛이 없으면 그 음식이 아무리 맛있게 요리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맛있게 먹고, 소화를 잘해서 몸의 영양분이 되게 해야지 음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걸 현대적인 언어로 이야기하면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듣는 것 사이에, 하늘의 음성과 사람의 반응사이에, 이 두 가지가 상통하여, 커뮤니케이션이 잘되어야,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은혜를 받을 수 없읍니다. 여러분들께서 오늘 성가가 끝난 뒤에 상대적으로 굉장히 크게 아멘! 하시더군요. 여러분 일부러 아멘 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신이 받는 만큼 자기 감성과 마음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다르게 보면 성가가 아멘을 이끌어 냈다고도 볼 수 있고, 성가의 아름다움이, 하늘 의 음성이 우리에게 임하면서 우리가 아멘 할 수 밖에 없도록 우리 감정을 이끌어낸 것이겠죠.
오늘 구약 이야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배고프고 목말라 너무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기적과 같이 히나님 주신 만나라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백성의 원망을 듣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선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마당 전체에, 천막을 치고 살기 때문에 마당이라고 해봐야 광야입니다만, 하얀 싸래기 같은 것이 가득차 있는데, 색은 하얀색이고, 맛은 꿀탄 과자 같았습니다. 이걸 먹고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고기로 먹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배고픈 사람들 앞에, 목마른 사람들 앞에, 솟아난 물과 하늘에서 내린 하얀색 과자가 있습니다. 뭐라고 반응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게 무엇이냐? 너무도 놀란 것입니다. 아마 나라마다 반응이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와우” 했을 것이고, “펑” 했을 구도 있을 것입니다. 무슨 표현이든 간에 저게 무엇이냐! 라면서 놀라운 기쁨의 찬탄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게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말이 히브리어로 “만후”(Manhu)입니다. 배고픈 우리를 먹여준 음식이라는데, 저게 무엇이냐. 맛있게 먹고 소화를 한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만후라고 외쳐댑니다. 나중에 그것을 감탄사 형식 그대로 두지 말고, 명사화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만나”(Manna)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만후를 아는 것이 아니라 만나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음식 이름이 만나라고 합니다. 생명의 양식, 이것을 다 만나라고 일반화 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 중요한 대목은 만나가 어떻게 전승 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이 이렇습니다라는 감격을 나누는 것입니다. 만나를 주셨으면, 사람은 하늘의 음성을 들었으면, 축복을 들었으면, 먼저 반응을 명사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감탄사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니 “세상에~!” , 이렇게 나와야지요. 그것은 만나다. 그것은 행복이다라고 명사화시켜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게 무엇이냐?!. 우리의 반응은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 그래야 합니다. 무슨 감탄사 이든 감탄하는 것이 처음 반응인 것입니다. 한참 뒤에 생각하고 논리를 만들어 내는 명사화된 축복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우리가 감탄의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 합니다. 그 다음 성경말씀에 보면 "만후!" 하는 것은 만나시절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대 이상으로 무언가를 나에게 주시면 오늘날릐 용어로는 너무 고마워서 "아멘!"이라고 합니다. 이 아멘은 다른 게 아니고 감사의 감탄사입니다. 감탄사 없는 언어는 죽은 언어입니다. 감탄사가 없는 외침은 내용 없는 빈껍데기입니다. 오늘 깨닫게 된 만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만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만나의 원천은 만후라는 사실을 아는것입니다. 감탄해라. 찬양해라. 소리 질러라. 아멘으로 대답하여라. 이런 것입니다. 이런 본질적인 아멘이 없는 우리 인간의 삶은 허탕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기적을 행하셨으니까, 오늘의 만나 이야기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기적이 있었습니다. 하늘이 주신 기적과 같은 축복에 우리가 "아멘"하고 받아 드립시다. 받아 드리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그렇게 성경 말씀에 쓰여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조상들이 만나를 먹고 살았는데, 미안하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 그 아름다운 만나도, 아멘으로 받은 만나도, 그걸 먹고도 사람은 죽었다. 이 땅에 있는 한 만나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어떤 만나를 먹어도 사람이니까 죽을 수밖에 없다. 이제 전혀 다른 만나를 주겠는데, 우리 조상에게 주셨던 만나와는 전혀 새로운 만나 하나를 보태주마. 이 만나를 먹으면 죽지 않는다. 한 번만 먹어도 배고프지 않다. 한 번만 마시면 목마르지도 않다. 내가 바로 그 만나요 내가 바로 그 생수다. 조상이 주셨던 만나에 더하여 전혀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음식인 만나를 내가 이 땅에 가지고 왔다. 나는 목마르지 않는 물, 배고프지 않는 빵, 곧 하늘의 만나와 생수를 이 땅에 주려고 왔다. 그래서 하늘과 땅을 합한 힘을 내가 가지고 있다. 하늘과 땅을 매기도 하고, 열기도 하는 힘을 내가 가지고 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지만 땅에서 이 하늘에 영원한 음식을 베풀려고 왔다. 내가 이래서 생명의 양식이다. 이렇게 선언을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 예수를 믿는 신앙은 방향이 하나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주를 우리가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구원은 하늘에서 내려와서 생긴 것이지 우리가 하늘 올라가면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 오셨다고 했지 인간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은 없습니다. 내려오시는 하나님, 하늘에서 주시는 복, 하늘에서 내려주는 양식, 이것을 충분히 마시면 하늘을 먹고 마시는 것임으로 우리는 하늘을 함께 차지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또 이 땅을 하직한 후에도 똑같이, 예수께서 말씀 하시는 대로, 내가 주는 이 떡을 받아먹어라, 내가 주는 양식과 물을 받아 마셔라, 그러면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교회에서 제일 먼저 성만찬을 통해서 실천에 옮깁니다. 주님의 몸을 먹으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습니다. 주님의 보혈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성만찬은 그것을 기념하고 확인합니다. 어디서 예수는 이것을 확증해 보이셨습니까? 예수께서 우리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목마르지 않다고 한 예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나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7개 말씀중에 우리의 가슴을 울린 두 가지만 인용하겠습니다. 자기를 마시면 목마르지 않다고 하신 분이 마지막 십자가에 숨 거두시기 전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읍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선포하신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시니 말이죠. 저는 이 말속에서, 다른 해석은 그만두고요, 깊은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는 진실로 사람이셨구나! 하나님인 동시에 정말 인간이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가 되면 마지막 물이 없으면 목마르다고 해야 합니다. 영원히 목 마르게 살 수는 없습니다. 목마르지요? 예수 말씀이 죽음을 앞두고 나는 창에 찔려서 피를 다 쏟았다. 가시관으로 인해 피를 쏟았다. 손발 못 박혀 피를 쏟았다. 완전히 탈진하여 목마르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왜 목말라겠나. 몸이 탈진되어서 목마르다. 마음으로 생각하니까 자기를 따르던 제자도 다 도망가고, 세상도 나를 다 떠났구나. 그러니 목마르지요. 그런가 하면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조차 자기를 버렸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버리고, 세상도 버리고, 제자도 버리고, 다 버린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몸도 스스로를 버립니다. 그러니까 말하죠:"나는 목마르다!". 사람은 그렇게 삽니다.
예수님의 심정입니다. 나도 인간으로 당신들과 똑같이 이렇게 목마름을, 마지막 내 호소를 하고 이렇게 산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인간의 일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적인 분, 사람의 고통을 다 표출하신 분, 거짓이 아니고, 쇼가 아니고, 우리의 삶을 십자가에서 헌신하신 분, 그것으로 예수는 일생의 한 토막을 끝냅니다. 그렇게 죽으심으로 마무리하셨으면 아마 성경 말씀이 이 땅에 있는 자그마한 말씀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조금 뒤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 무엇을요? 목마르다, 이젠 다 이루었다. 하고 숨을 거두시고 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한 몸은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몸, 영원한 갈증을 해소하는 물로 우리에게 부어 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죽지만, 죽음 이후에 새로운 생명이 다시 시작된다. 다 이루었다. 약속을 이루었다". 이 분 말씀입니다. 나는 이 땅에 생명을 주로 왔으니, 살아있는 동안 생명을 즐기십시오. 그러나 아플 것입니다. 힘들 것입니다. 병들 것입니다. 죽을 것입니다. 나도 목말라 했듯이 여러분도 호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심하세요. 내가 함께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다시 시작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확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생명을 살아갑니다. 이 땅에 있는 생명도 살고, 저 땅에 있는 생명도 살고, 땅의 생명도 살고, 하늘의 생명도 삽니다. 이 말씀을 맛있다고 생각하고 음식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아멘!"이라고 합니다. 그 음식이 싫은 사람은 굳이 아멘이라고 받을 필요가 없지요. 진실 된 아멘은 생명을 얻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갈림길에 있는 결단의 과정입니다. 말씀을 듣고 아멘 하는 마음의 감동 표시 정도가 아니고, 생명의 음식을 먹을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는 결단의 언어가 아멘 으로 표현하는 감성, 감동, 결단, 지성적 결단, 모든 것의 합성어입니다. 아멘은 자유롭게 택할 수밖에 없는 결단의 언어입니다. 마음대로 택하십시오. 하기 싫으면 않해도 괜찮고요, 하고 싶으시면 하십시오. 그러나 하시면 음식이 맛있을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모든 사람들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한 방에 모였습니다. 모여서 주님이 하셨던 생명의 말씀, 생명의 양식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 분이 오셔서 내가 곧 다시 온다고 약속도 하셨고 종말이 가까웠고, 모든 것이 끝나고 나니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나 홀로 먹으라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어 먹으라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이 예수는 나만 위해서 죽으신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을 위해 함께 죽으셨음을. 함께 죽으신 그 분의 생명의 양식을 우리는 나누어 먹어야 함을. 오늘 사도행전 이야기를 보시면 사람들이 모여서 재산도 모으고,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먹고 즐기며 찬양하며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재산도 다 합쳤데요. 사유재산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정치사 그리고 경제사에서 보면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유재산을 거부하는 공산주의의 성서적 원천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생산관계가 아니고 소유는 그냥 갖고 있음으로 그져 같이 사는 공생주의가 목적이다. 이런 주장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사유재산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은 모두 갖고만 있는 것이고 자발적으로 나누어 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모두 아전인수의 해석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생명의 양식은 내 것이 아닙니다. 소유주는 우리가 아니라 그 양식을 이 땅에 사는 동안 관리하고, 즐기며 살라고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기에 그 양식은 우리한테는 소유물이 아니고 우리는 청지기로써 관리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소유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 것이고, 우리는 주신 은총을 나누며, 기쁘게 살라고 하는 은사요, 축복입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사도행전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정말 거부가 되신 분들, 제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면, 제 인간적인 마음으로, 부럽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이 모을 수 있나?. 그런데 모으는 것과 상관없이 이웃을 위해서 많이 헌납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존경스럽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을 보면 너무 많은 권력 때문에 부럽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쓰지 않고 약자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많이 아는 사람 부럽습니다. 재능을 기부하는 사람은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이야기는 부럽게 살아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존경받고 살아라. 그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 놓으신 것이다. 우리의 생명자체가 내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제가 살지만 생명은 하나님이 주셔서 제가 누리며 사는 것이지 제 소유물이 아닙니다. 생명의 하나님이니까. 주신 축복도 하나님이니까. 재능기부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시간을 할애해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은 굉장히 존경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서로 나누어 가지십시다. 그래서 아멘으로 응답하십시다. 이것이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런 모든 축복을 세상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한 사람만 할 수 있다고. 예수라는 한 사람이 했습니다. 한 사람이 골고다 언덕에서 죽었더니 그를 믿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해 냈습니다. 그 예수는 여러 번 죽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죽는 걸로 족합니다. 그 죽으신 그 분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주님이십니다. 한 번 죽은 걸로 족합니다. 다시 어떤 사람이 나와서 내가 예수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번 죽으심으로 온 시간 동안에 유효한 죽음을 죽으셨읍니다. 부활하셨으니까요.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백성을 구원합니다. 한 번 죽어서 영원한 시간동안 구원을 베푸십니다. 이 모든 것을 합해서 한번 죽어서 온 백성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읍니다. 신학적으로 “Once for All"입니다. 예수 이외에 다른 축복이 없습니다. 한 번 죽어서 부활하신 그분이 지금도 살아계심으로 그 분만이 우리를 위해 구원을 베푸십니다. 생명의 양식을 지금도 베푸십니다. 나누어 가지라고요.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온 세상에 주님의 보혈이 넘쳐흐르도록 기도합니다. 아멘으로 화답하면 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