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2:1-5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두고, 계시로 받은 말씀이다.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아멘.
에베소서 5:8-14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여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그들이 몰래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빛이 폭로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드러나는 것은 다 빛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 주실 것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아멘.
설교문
항상 기도하고 찬양하며 삽니다만 우리 진실하나를 알고 넘어가지요. 찬송이 언제 생겼는지 아십니까? 성경 말씀을 보면 찬송은 예수님이 오실 때 부터 생겼습니다. 굉장히 오랜 된 것이죠. 예수님이 오시던 밤, 그날 밤 하늘에는 별빛이 빛났습니다. 그리고 별빛 가운데 한 곳에 큰 빛이 비쳤는데, 그 빛이 너무나 밝아서 모든 사람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빛이 한창 이동해서 오더니 어느 한 곳에 와서 멈췄습니다. 그 빛을 보고 따라 가 보았더니 그곳이 베들레헴 말구유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주변의 전경입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하늘에서 내려온 성가대가 찬양을 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평화로다". 말을 바꾸면 "하나님 아버지 찬양 합니다. 땅에 있는 형제자매 여러분 감사합시다"이겠죠. 찬양은, 하늘을 향해서 찬양하고, 땅을 향해서 감사하는 것, 그것이 찬양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곡조를 빼면 찬양이 바로 기도니까요. 기도도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감사하는 것이죠, 이것이 이날 생겼는데, 그 장면을 여러분이 함께 보시면 참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신데 그 빛이 하늘이지 않고, 빛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지 않고, 땅에 오셔서 땅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예수라고 이름 하는 분입니다. 하늘빛이, 하늘 영광이 땅에 와서 땅의 평화를 이룹니다. 이 빛은 하나이며, 사람의 옷을 입었습니다. 땅에 오신 예수님은 세상에 빛만 비추지 않고, 빛을 비추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하늘에서는 하늘 공간에 빛만 비추면 되지만, 땅에 내려온 빛은 땅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 엄청난 해산의 고통을 감내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한 빛이 되시기 위해서, 부활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그 분은 빛을 잉태하는 아픈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죽음입니다. 하늘에 계셨으면 십자가는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땅에 내려오시면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고통을 감내합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의 죄 때문에, 그래서 땅에 내려온 빛은 고생을 합니다. 십자가 죽음도 감내합니다. 아픔을 받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이 말씀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입니다. 그런데 그 빛은 그냥 빛이 아니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추는 빛입니다. 스스로 몸을 깎습니다. 헌신합니다. 희생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진실입니다. 희생하는 빛, 자기를 죽이면서 발하는 빛, 그것을 여러분은 무엇으로 상징화 할 수 있습니까?
초대교회 때부터 우리 교회는 그것을 아주 아름답고 단순한 상징으로 만들어서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제단 앞에 켜있는 촛불 두 개 한 번 바라다 보시죠. 늘 예배 때 마다 켜져있습니다. 대림절이 되면 주일 마다 촛불을 하나, 둘 켜기 시작해서 성탄절 아침에는 다섯 개의 촛불이 켜집니다. 촛불은 빛을 발산합니다. 단,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빛을 발산합니다. 초가 타면서 빛이 비춰집니다. 십자가에서 부활의 빛이 비칩니다. 예수님 말씀이 촛불로 상징화 된 이 빛은 이렇게 여러분이 믿고 실천하여라고 하십니다. 첫째, 자기를 깍아서 죽는 것, 이것은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이 세상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로 가득 찬 세상, 썩어 있는 세상, 맛도 없는 세상, 맛이 없고, 썩습니다. 이 세상에 가서 빛이 된 사람은 이 세상에 가서 썩지 않게 하고, 맛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 역할이 소금이다라고 하십니다.
오늘 소금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금은 짠 맛을 냅니다. 맛이 없는 세계에 가서 맛을 내라십니다. 짠맛만을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맛있읍니다. 죄악 된 인간은 맛이 없읍니다. 사는 맛도 없고, 의미도 없읍니다. 하늘 음식을 먹어야 맛이 있읍니다. 소금은 짠 맛이 있습니다. 최근에 어느 보고서를 보니까요, 소금을 너무 많이 먹으면 심장병에 걸리기 쉽고, 치매에 걸리기 도 쉽다고 짜게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짜게 먹는 사람은 자신만 짜게 먹어서 그렇습니다. 베풀지 않는 짬은 병에 걸립니다. 사람이 너무 짜게 살면 어렵습니다. 짜지 않게 사십시다. 또 너무 싱겁게 살아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금의 은혜는 홀로 짠 것을 많이 먹고 병 걸리라는 게 아니고 적당히 먹고, 나누어 주는 은혜입니다. 이 소금의 비유 속에 이렇게 단순 소박한 진실이 담겨있습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소금은 다른 사람한테 주어야 합니다. 소금이 배추에 들어가면 썩지 않게 합니다. 소금의 역할은 세상에 파고들어 세상으로 하여금 맛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썩지 않게도 합니다. 이렇게 소금은 촛불처럼 생명 살림의 빛을 발하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빛을 발하라. 그러나 소금이 되면서 빛을 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빛을 발했지만 십자가의 아픔을 지고, 빛을 발하셨읍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의미도 없지만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부활 없는 십자가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 두 진실 속에 예수님이 소금이 되어서 빛을 발하라는 말씀의 핵심이 들어있읍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빛은, 구원의 빛은 하늘에 있다. 높은 곳에 있다. 하나님 하고 제일 가까운 곳에 하나님의 집을 짓자. 가장 높은 산, 생각 속에 가장 깊은 곳, 산 중에서 가장 높은 곳, 우리 마음 가운데 가장 높은 곳, 그래서 그곳을 시온산이라 이름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주변의 산입니다. 가장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자. 그래서 그곳이 수도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시온산 모든 것이 문학적 표현이기도 하고, 또 사실적 표현입니다. 요지는 이것이죠.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 가장 높은 곳, 가장 깊은 그곳에 하나님의 집을 짓고, 하나님을 만나자는 것이죠. 그곳이 성전입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곧 있을 바벨론 식민지화 앞에서, 백성들아 빨리 하나님 만나자. 구원 받아야 한다. 빨리 하나님이 계신 높은 곳에 가서 하나님 만나자. 성전에 찾아가자.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다시 받아오자. 그래서 이 땅에서 평화롭게 살자. 그래서 이사야가 호소합니다. 성전에 모여라. 이 땅의 마지막도 성전에서 이루어지는데, 성전을 찾아가자.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비전을 이제 맛보자.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급기야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찾아가자고 했지만, 찾아가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계신 집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사야가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찾아오면 이 땅에서는 기적적인 변화가 생긴답니다. 칼로 싸우는 대신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창으로 찌르는 대신 창으로 낫을 만들어서 농사짓고 보리를 멘다는 변화가 생긴다. 전쟁대신 평화를 이루는 이런 세상을 보았느냐? 이런 세상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한다. 하나님께 가자. 이런 이사야의 말씀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하며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으나. 너무 죄악에 물들어서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결국 바벨론의 속국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결단하십니다. 사람들이 올라오지 않으니, 구원을 위해 내가 내려가마. 사람이 하나님 말씀 안 들으면 하나님이 직접 오십니다. 자식들이 부모한테 오지 않으면 부모가 가야지요. 땅이 안 움직이면 하늘이 내려와야죠. 그래서 하나님이 결심합니다. 그래 내려가자. 죄악의 현장으로 가자. 세상의 현장으로 가자. 세상도 내가 만들었으니. 그래서 하나님이 결단하고, 빛을 가지고 오신 것이 성탄절입니다. 그 일 이후로 세상의 모든 역사가 바뀝니다. 하늘의 빛이 땅에 임했습니다. 우리는 땅에 임한 그 빛을 다시 반사 받아서 오늘을 빛처럼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소금이 되어 빛을 발하라. 촛불을 보아라. 나 하나님의 아들도 초처럼 녹아지면서 세상을 비추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촛불이 우리의 신앙 고백의 한 상징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고 말씀하십니다.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살아라. 그것은 부활의 빛이고, 생명의 빛이다. 그 진실을 깨달았으면 함께 이 길을 가자 말씀하십니다. 깜깜한 밤, 별들만 비나는 밤, 그곳에 촛불 하나를 켜두니 어둔 방안이 환희 켜집니다. 어두울수록 촛불이 밝습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하지요. 죄가 클수록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그만큼 커야 용서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어두울수록 밝게 빛납니다. 세상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빛은 더욱 빛납니다. 이 진실을 살아가면서 깨닫고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의 전은 높은 곳에 계시고 그곳에서 빞을 발합니다. 세상 역사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역사 공부하면서 서양사, 특히 세계사 중에 기독교가 지배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암혹의 시대라고 역사학자들이 말하기도 합니다. 소위 중세기입니다. 중세기가 언제 끝났는지 아십니까? 학자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중세기가 기독교의 문명이 만들어 낸 암혹의 시대였다고 전제를 하고, 언제 시작되느냐 하면 공식적으로는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에 시작되었다고 들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 망했느냐면 두 가지로 흔히 설명들을 합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동쪽에 있는 지금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제국이 있었읍니다. 그 제국 이름을 편의상 비잔틴 제국이라고 이름하겠습니다. 콘스탄티노플(로마의 신수도)의 본래 이름이 비잔티움이었으니까요. 교회적으로는 정교회 지역입니다. 우리와 같은 기독교입니다. 이곳에서는 1453년 이슬람을 믿는 터키의 오스만투르크라는 사람이 나와서 동쪽에 있는 비잔틴 제국을 침몰시키고, 그래서 동로마 제국이 무너집니다. 그 해가 1453년인데, 그 해에 특징적 사건 하나가 생겼습니다. 동로마 제국을 기독교 제국의 정신적 상징으로 만들던 가장 아름다운 성전, 성 소피아 성당(St. Sophia)입니다. 이 성소피아 성당이 오스만 투르크 점령으로 인해 박물관으로 바뀌고, 하나님은 이곳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하나님은 이곳 박물관에서 묶여 있읍니다. 잠자고 있읍니다. 죽었읍니다. 꽁꽁 못박아 놔서 사람이 안으로 들어 갈 수 가 없읍니다. 이를 통해 이슬람이 이 지역을 지배한다고 선언합니다. 동로마의 정교회는 절망 속에 빠졌읍니다. 비록 상징이긴 하지만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계신 가장 높은 곳인 성소피아 성당이 박물관으로 변한 때문니지요. 비극의 역사입니다. 서쪽 로마제국에서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해 구교를 갱신하게 된 1517년이 아마 기독교 중심의 중세기 마감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적 시각에서 입니다. 정교회에서는 중심성전을 잃고, 하나님 계신 곳을 잃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만날 수 있을까? 그래서 서로 연구하고 기도하며 살면서 찾아낸 답이 있습니다. 찾아낸 성서의 답입니다. 하나님은 한 곳에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높은 성전에만 계시지 않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찬양과 기도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이 계신다. 그곳이 성전이다. 그래서 성 소피아 성당은 역사적인 유물로 되어 있지만, 다시금 세계 만방 곳곳에 하나님을 모실 전을 짓고, 그곳에서 하나님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다시 합니다. 하나님 모시고 찬송하는 오늘과 같은 예배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센터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찬양합니다.
여러분이 대예배 드리고 나면 다 흩어져서 집으로, 직장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그곳에도 계실 터인데, 교회 안에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교회 밖에 계신 하나님은 어떻게 예배하실렵니까? 그곳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교회 안의 예배가 중요하면, 교회 밖의 예배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배하는 교회에서 살고, 예배가 끝나면 세속 속에, 직장이 있는, 가정이 있는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갑니다. 주일 날 살아가는 방식, 주간 중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면 안 됩니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이십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말하기를 우리에게 주일 드리는 예배가 삶의 중심입니다. 동시에 우리 직장도, 우리 가정도, 학교까지도 이곳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하는 학교, 예배하는 가정, 예배하는 직장입니다. 그렇게 살기로 작정하시죠! 그래서 두 개의 예배를 동시에 설정했습니다. 주일 날 드리는 예배, 주간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생활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샐활 속에서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분들한테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에는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주간중에는 속된 세상에서 속되게 살지 마시고, 거룩한 주일예배와 거룩한 직장생활, 주일의 거룩한 찬송과 주간중의 거룩한 일, 하나님이 한 분 이시면 성속을 구분하지 말고 함께 사셔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그곳이 비록 십자가 현장이라도 그 속에서 거룩한 빛을 비춰야 합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면서 한 가지 깨달음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전화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집전화가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휴대폰 때문에 전화가 움직이는 전화가 되었읍니다. 그래서 그냥 통신이 아니고 이동 통신, 모바일 통신입니다. 이 세상이 모바일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신 곳도 모바일 이며, 모바일 형식으로 계신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한 곳에 있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일 날 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리 자신이 움직이는 작은 교회임으로, 우리 자신이 작은 하나님 나라임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곳마다 모바일 일터요 쉼터 입니다. 움직이는 곳마다 하나님이 빛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모바일 신앙입니다. 신앙의 하나님을 교회에다 모셔놓고 주일날 올 때 다시 만나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이곳에 묶어 놓은채 다른 곳에 가시지 마시고, 하나님을 함께 업고 다니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제 용어를 빌리자면 모바일 하나님이시죠, 틀림이 없지요. 모바일 교회, 모바일 기독교인, 모바일 신앙, 하나님은 움직이시고, 우리도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빛은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있는 곳마다, 사람이 하나님의 빛을 알고 따라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 역사가 이루어 집니다, 그곳이 십자가 현장이라도, 고난의 현장이라도 그 속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빛으로 계십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한 가지는 꼭 지키십시오.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고. 우리의 행실을 보고, 빛의 행실을 보고 말입니다. 그 행실의 내용은 에베소서가 정확하게 짚어 내었습니다. 빛의 열매는 "의와 선과 진실"입니다. 움직이는 빛은 가는 곳마다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 진실을 행하고 사는 것. 그것이 빛의 내용입니다. 의와 선과 진실은 하나님 예배의 결실입니다. 이 세가지는 바로 "사랑"의 계명을 설명하는 열매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하나님 사랑에서 나오고 이웃사랑으로 귀결되는 사랑의 결실입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핵심 행실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빛이니까요. 의롭게 삽시다. 진실을 담아서 삽시다. 선을 행하며 삽시다. 그러면 영광의 빛이 비춰서 이 땅을,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구원해 주십니다. 구원의 빛은 아름답습니다. 구원의 빛은 아주 선합니다. 아주 진실 됩니다. 그리고 구원의 빛은 아주 올바른 빛입니다. 그 빛이 여러분에게 생명의 빛이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도 생명의 빛이 일어납니다. 오늘 에베소서 말씀입니다. 이 빛을 산자들에게만 비추지 말라, 잠자는 것처럼 죽은 자들에게 비춰라. 그러면 살아난다. 빛을 묶지 말라 빛은 살아 있다. 움직인다. 누구에게든지 빛을 비춰라. 생명의 역사가 발동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입니다. 이 약속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 되시 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