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베리타스 DB |
인류 또한 한 민족이나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운 천재지변이나 환난을 당할 때 그것이 하늘의 어떤 계시라고 생각해서 어떤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경우도 있다. 전쟁도 그 중의 한 가지가 될 수 있다. 이럴 때 그것을 어떤 ‘징조’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혹은 개인의 경우에는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욥은 경험으로 말하기를 전에는 하나님에게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자기 눈으로 하나님을 본 것처럼 되었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말 한 것은 그가 받은 고난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계시가 되었다는 말이다.(42:8) 더 분명한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계시 사건의 대표적인 것이 된다.
이상의 경우들이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고난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 되지만 여전히 공평하고 자비로우시며 정의로운 하나님의 하시는 일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정의로운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신비로워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기도 하고, 또는 회의적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신학적인 교리로써 정의하거나 단정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어찌해서 의롭고 착한 사람이 가난하고 천대받고 살고 반면에 악하고 불의한 자들이 잘되고 부귀를 누리고 세상에서 번영하는지? 어찌해서 하나님의 선민이며 계약을 맺은 백성이 이방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 되었는지? 구약의 시인들 중에 어떤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저버린 것이 아닙니까하고 항변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그의 여러가지 속성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시비라는 말인데 현대 신학자들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고도 말했다.
종교개혁자들도 불가시적 하나님 또는 불가시적 교회(신령한 교회)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나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잘하는 말 중의 한 가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이다. 이 말은 신비사다는 말도 되지만 단념하라는 말로도 들려서 불행을 당한 당사자들에게는 섭섭하게도 들릴 것이다. 예정론자들도 일종의 숙명론자들이다. 그들은 만사가 다 하나님의 예정이며 섭리라고 간단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실수와 잘못으로 받는 고난도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일이 된다. 또 어던 불행을 조상에게 돌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죄 값은 하나님이 반드시 치루게 한다는 하나님의 무서운 보복행위를 말하는 것인데 유대인 율법주의자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또 원죄론도 비슷한 이론이다. 그러나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는 반대 이론을 펴기도 했는데 속담에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의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사18:2) 이 말은 원죄론을 부인하는 말이 된다.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과 불행의 의미를 여러가지로 생각해 보면 개인의 신앙의 경험과 이론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사람들이 고난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데 가장 숭고하고 가치있는 고난은 남을 위해 받는 고난일 것이고 이러한 고난의 영구한 표본이 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수난을 감수했지만 그러한 위대한 고난 사건이 아니라도 이웃을 위하고 약한 자를 위하고 눌리고 소외당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받는 고난을 우리에게 전하셨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불신자들의 조롱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물심 양면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며 한국 개신교계가 분쟁과 불의와 불화가 없는 교계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고 신자들이 이기주의와 세속화와 신앙의 교만을 버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보복하시는 분이 아니고 공의로운 심판자로서 인간의 역사를 주관 해오셨지만 역사의 종말 때 최후 심판자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