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사무엘기하 12:1-7a
주님께서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다. 나단은 다윗을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성읍에 두 사람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부유하였고, 한 사람은 가난하였습니다. 그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다가 키우는 어린 암양 한 마리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 어린 양을 자기 집에서 길렀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 양은 그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났습니다. 어린 양은 주인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고, 주인의 잔에 있는 것을 함께 마시고, 주인의 품에 안겨서 함께 잤습니다. 이렇게 그 양은 주인의 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데, 자기의 양 떼나 소 떼에서는 한 마리도 잡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다가,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대접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부자가 못마땅하여, 몹시 분개하면서, 나단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서 맹세하지만,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또 그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 그는 마땅히 그 어린 암양을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합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아멘.
갈라디아서 2:20-21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7:36-38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청하여,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들어가셔서, 상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숫고 계신 것을 알고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등 뒤에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아멘.
설교문
하나님의 꿈(사무엘기하 12:1-7a; 갈라디아서 2:20-21; 누가복음서 7:36-38)
오늘 사무엘기하 본문은 나단 예언자가 다윗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단 예언자는 오늘 본문에서 어떤 이야기 하나를 다윗에게 들려주는데, 그것은 어느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하나밖에 없는 어린 양을 빼앗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오늘 나단 예언자가 한 이 이야기의 배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이 우리야에게서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나단 예언자가 말하는 부자는 바로 다윗이었고, 가난한 자와 어린 양은 우리야와 밧세바를 가리킵니다. 다윗이 왕의 지위를 이용하여 밧세바를 범하고, 얼마 있다가 밧세바는 임신까지 하게 됩니다.
그런데 부하의 아내를 왕의 힘을 이용해서 빼앗은 것도 잘못인데, 임신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 후로 더 큰 죄를 저지릅니다. 혹시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까봐,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이자 다윗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듭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 왕이 저지른 대표적인 범죄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일로 밧세바도 상처를 입었고, 성실한 그의 남편 우리야는 목숨을 잃습니다. 게다가 밧세바가 임신했던 아이도 이후에 죽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밧세바가 낳은 솔로몬과 다윗의 다른 부인이 낳은 아도니야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면서, 나중에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죽이는 그런 안타까운 일들이 왕실에서 벌어집니다. 이처럼 다윗이 저지른 범죄는, 여러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 다윗 가문에도 엄청난 비극을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건에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사람들 외에도, 피해자가 더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피해자는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이야기가 있는 사무엘기뿐 아니라, 성경을 창세기부터 쭉 읽어보면, 이 사건이, 한 나라의 왕이 한 여인을 범하고 그 남편을 살해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 사건의 피해자가 되시고, 왜 이 이야기 속에는 또 다른 의미가 들어 있는가?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면서 인간의 죄악은 나날이 커져만 갑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면서, 무언가 대안을 마련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입니다.
이대로 세상이 흘러가다가는 더 큰 죄악과 더 큰 비극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계획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은 출애굽 사건까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사사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사울 왕과 그 위대한 다윗 왕을 세우십니다. 결국 이러한 모든 과정이, 성경의 커다란 틀에서 보면, 서로를 지배하고 죽이고 빼앗는 죄악에 물든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아브라함부터 다윗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만들려고 하셨던 이스라엘, 하나님이 꿈꾸셨던 세상은,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땅은, 인류 최초의 문자가 발명되고, 비옥한 땅과 많은 인구, 수준 높은 도시 문명을 구가하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로 쌓은 바벨탑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와 지식과 풍요를 뒤로하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가장 낙후된 가나안을 향해 가도록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모세의 출애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집트에는 더 비옥한 나일 강이 있었고, 더 훌륭한 피라미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이집트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면,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모세를 통해, 이집트를 점령하고 그곳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면,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비슷한 일도 있었습니다. 출애굽이 일어나기 3백 년 전에, 저 북쪽의 아시아 대륙에서 힉소스 족이 내려와 백 년 넘게 이집트를 점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집트는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 모든 것을 버리게 하시고, 바다를 건너 거친 광야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 세운 나라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변의 나라들이 발달된 철기문명을 받아들이고,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가를 세우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이번에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스라엘에는 왕은 없고 사사라는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것도 하나같이 모자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사 옷니엘은 나이가 어린 경험 없는 사람이었고, 사사 에훗은 장애인이었고, 드보라는 차별받던 여성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가서도 사사 삼갈은 소모는 막대기로 적을 물리치고, 기드온은 항아리와 횃불을 들고 싸웁니다. 게다가 삼손은 힘만 셌지 인격적인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 )
사무엘기하 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우리도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대하셨지만, 백성들의 요청이 워낙 강해서, 어쩔 수 없이 왕을 세우시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 왕도 이상한 왕이었습니다. 당시 고대국가에서 왕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요소가 있었는데, 하나는 왕궁이고, 다른 하나는 상비군, 즉 왕의 군대입니다.
그런데 사무엘기상 11장을 보면, 사울은 왕이 되고도 오랫동안 왕궁이 없었고, 사울은 직업이 따로 있어서, 평소에는 소를 몰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자신의 부하도 없고 군대도 없어서, 필요하면 그때마다 사람들을 모아서 전쟁을 치르던 그런 왕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변 나라의 왕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권력이나 혜택이 없는, 백성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였고 왕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이 나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펼치실 때, 우리는 주변 나라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많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술과 문명을 외면하시고 풍요로움도 피하십니다. 지도자의 권력을 꺼려하시고, 능력 있는 사람보다 오히려 부족하고 약한 사람을 택하십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우리의 생각과 반대 방향이었고,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실 때, “나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을 본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심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심장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심장이 그 사람의 생각과 뜻과 감정과 꿈을 관장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윗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능력이 아니라, 다윗의 마음과 뜻과 꿈을 보신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기상 13장 14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과 마음이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 13장 22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과 마음이 맞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따라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출중한 능력이나 지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심장, 같은 뜻, 같은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다윗이 왕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밧세바를 빼앗고, 자신의 권력으로 우리야를 죽인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이 저지른 범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때부터 다른 세상을 만들고자 품었던 하나님의 꿈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어찌 보면 하나님의 심장을 멎게 하는 그런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무엘기 기자는 다윗의 죄를 기록할 때, 창세기 12장에서 이집트의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빼앗으려고 했던 그 사건처럼, 그리고 창세기 20장에서 아비멜렉이 다시 사라를 범하려고 했던 그 사건처럼, 그리고 창세기 26장에서 그랄 사람들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희롱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오늘 다윗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밧세바와 우리야에게 저지른 죄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의 아내를 범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가로막는 것처럼, 다윗도 밧세바와 우리야에게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방해했다는 그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 갈라디아서를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것은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십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죽은 나”는 누구이고, 지금 “살고 있는 나”는 어떤 나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바울에게 죽은 나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 즉 가말리엘 문하, 로마시민권, 베냐민 지파,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를 가로 막고 방해했던 바울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자랑하던 이 모든 것들을 이제는 해로 여기고 오물로 여기면서, 이전의 자신은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 안에 살고 있는 예수, 바울을 살아가게 하는 그 예수는 누구인가?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고 예수의 죽음을 본받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지금 바울 안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예수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 23절을 보면, 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꿈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비록 세상에서 볼 때 성공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결국 예수의 길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꿈을 방해하고 있었고, 반대로 지금은 사람들이 볼 때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꿈을 위해서 지금 살아간다고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서 7장은, 바로 그 십자가의 길을 가는 예수의 발 위에, 어떤 여인이 눈물과 향유를 붓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향하는 예수, 우리는 이것을 눈으로 본 적도 없고, 직접 겪어본 적도 없기 때문에, 사실 머리로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 길을 가는 예수와, 그 예수를 십자가로 보내는 주변 인물들에게, 십자가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고, 생각보다 더 고통스러운 길이었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를 보면 예수가 어렸을 때에, 갈릴리 근처 세포리스, 라는 곳에서 엄청난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그것은 에제키아스의 아들 유다가 헤롯의 궁전을 공격한 일종의 반란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사도행전 5장 37절에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렇게 나옵니다.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 백성들을 꾀어서, 자기를 뒤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소. 그도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소.” 이런 말씀입니다.
이 말씀처럼 당시 로마제국에 항거했던 유대인들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진압되고, 세포리스는 불태워지고 그곳 사람들은 노예가 됩니다.
그런데 그때 이 항거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은 그 대가가 너무나도 참혹했습니다. 로마 당국은 여기에 참여한 2천여 명의 사람들을, 모두 세포리스 근처에서 십자가형에 처합니다.
이곳은 어린 예수가 살던 갈릴리와 6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지금 우리교회와 광화문 정도 되는 꽤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게다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고, 그것은 예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천 개의 십자가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 주변 지역의 모든 목수들이 동원됐을 것이고, 요셉과 예수도 분명히 그곳에 불려갔을 겁니다.
예수의 가족과 갈릴리 사람들은 그 참혹한 현장, 길가에 세워진 2천 개의 십자가와, 그곳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을 것이고, 그 비명소리와 피 비린내를 평생 잊지 못했을 겁니다.
따라서 예수가 가는 십자가의 길, 예수를 그 길로 보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세포리스의 십자가가 계속 떠올랐을 것이고, 그래서 더 슬프고 그래서 더 두려운 발걸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한 여인은 바로 그 발 위에 눈물과 향유를 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로 하여금 어릴 적부터 보았던 그 끔찍한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 )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는 아브라함과 다윗 때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꿈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그 꿈은 로마 제국을 점령하고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 죽음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에 보았던 그 십자가 때문에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가능하면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뜻, 나의 꿈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나님의 꿈대로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길은 결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 향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꿈은 바벨탑에도 피라미드에도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경제성장에 무조건 기뻐하고 권력과 지식에 환호하는 공동체가 결코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바벨탑을 쌓을 때, 누군가는 가나안으로 떠나야 하고, 모든 사람이 피라미드를 쌓을 때 누군가는 광야로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교회가 꾸어야 하는 꿈이 있고, 그리스도인이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교회가 그 꿈을 꾸고, 그리스도인이 그 길을 가야, 이 나라와 민족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꿈은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욕망으로 가슴 뛰는 세상의 심장을 멎게 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심장으로, 하나님과 꿈꾸고 그 꿈을 이루어 가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