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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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
목사로서 내는 그 100불의 헌금에는 예배드리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의미와 함께 그 초청한 교회에 대한 다소간의 예의까지 포함되었을 것이다. 답례받은 그 사례금 속에도 교회마다 차이가 크겠지만 관행에 준하여 설교한 목사를 향한 최소한의 정성과 예의를 담은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다. 결국 수렴하고 요약하면 하나님과 교회와 그 구성원들과 설교자 사이에 믿음을 매개로 이러한 주고받음의 관계가 성립되고 이행된 셈이다. 따라서 그 '믿음'에는 수평적인 차원과 수직적인 차원이 두루 아우러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좀 문제 삼고 싶은 게 바로 이 '믿음'이라는 개념이다. 그것은 개념이면서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삶을 규정하는 거룩한 초월의 동력이기도 하고, 부조리한 인간관계를 방치하며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한다. 더 심한 경우에는 한 인간의 존엄을 구겨버리고 그 생명을 압살하는 흉기나 흉물이 되기도 하는 게 바로 이 믿음이란 도그마다.
믿음은 내가 주로 연구하는 신약성서에 보면 도그마 이전의 다양한 풍경을 지닌 생물로 출현한다. 범박하게 분류하여 갈래를 따지면 이렇다. 희랍어 'pistis'에 해당되는 믿음은 공관복음에서 주로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과 구원의 권세에 대한 신뢰의 의미로 통한다. 이 믿음을 내세워 예수께서 치유 기적 등을 행한 것이 일부 사실이지만, 그런 전제 조건 없이 신적인 권능이 행사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주로 예수의 정체를 깨치고 그와 깊은 인격적 사귐에 드는 '앎·지식'과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바울서신의 경우는 이 믿음이 주로 기독론적으로 사용되어 본질상 죄인인 사람을 은혜로 덧입혀 의롭게 하는 예수에 대한 고백적 신앙과 예배의 자세를 가리킨다. 이에 해당되는 'pistis Iesou'라는 문구를 속격으로 해석하여 (나는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지만) 근래에는 일부 학자들이 이를 하나님을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의 믿음(또는 예수의 신실성)'으로 색다르게 의미화하기도 한다. 물론 소수의 경우지만 로마서 후반부 등에서 바울은 동일한 피스티스 개념을 공관복음서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전능함에 대한 신뢰라는 차원에서 사용한다.
히브리서로 건너가면 거기서 믿음은 보이지 않고 경험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소망이나 그 불확실성을 감내하며 꿋꿋이 나아가는 담대함(parresia)과 유사한 개념으로 통용된다.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는 유일신 신앙을 옹호하는 차원에서 지나가면서 단출하게 이 어휘를 두 차례 언급할 뿐이다. 그러나 귀신도 믿고 떤다는 말을 저자는 빼놓지 않는다. 이런 믿음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인들에게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의 주조는 저러한 믿음이란 어휘의 스펙트럼을 신학적으로 정밀하게 성찰하기 이전에 형성된 내면의 심리적 욕구의 응어리이거나 그것이 회집하여 만들어 내는 집단적 쏠림의 도가니일 경우가 잦다. 대체로 감정적인 자기 확신의 열정과 결부되는 성향이 강한 듯하다. 예수에 대한 사랑의 고백적 열정이 그렇고, 베드로가 예수의 부름에 갈릴리바다로 뛰어드는 용맹스런 화끈한 자기 투여를 실천적인 산 믿음으로 높이 떠받드는 추세도 여전하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무모한 게 분명한 이런 종류의 '착한 믿음' 콤플렉스는 평생 한두 번의 우발적인 기회에 깃드는 은총의 선물로 만족하기로 하고(실제로 베드로는 시도 때도 없이 갈릴리바다로 뛰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평정심의 차분한 상태에서 보다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어리석음이 깊어지기 전에 포기하는 믿음을 증진했으면 좋겠다.
요새 유행을 타는 '하나님나라' 담론이든, '믿음'의 주제이든, 설교 현장에서 거의 소개되지 않는, 그러나 내가 퍽 중요하게 생각하는 누가복음의 망대 비유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직접 예수의 말씀을 옮기면 이렇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 14:28~30)."
이 비유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교훈에 연이어 나온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우리의 막무가내식 믿음에 충실하자면 기존 예산의 적정성을 따지고 망대를 짓는 것은 믿음의 결여이거나 믿음의 부재이다. 감당할 자금이 10분의 1만 되어도 망대 공사를 시작해야 충만한 믿음이고 그래서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이 훌륭한 믿음이다. 동시에 그 부족분을 하나님이 꼭 채워 주시리라고 믿어 마지않는다. 그러다가 자금이 고갈돼 공사가 중단되면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어 활로를 열어 달라고 간구하는 믿음이 있으니 염려를 붙잡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분명히 이러한 계산 부재로 망대 공사가 도중에 중단될 경우 봉착할 수치의 대가를 이야기한다. 평이하게 행간의 메시지를 읽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본적인 산수 능력을 머릿속에 주셨는데, 그 정도의 더하기 빼기조차 못 하여 곤경을 자초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믿음'이란 어휘가 별도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예수의 제자가 현실 사역 가운데 염두에 두어야 할 교훈으로 이 비유를 전했다는 전제 아래 거기에 나는 '계산하는 믿음'이란 제목을 붙여 주고 싶다.
이 비유의 교훈을 다른 말로 바꾸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것이다. 겨자씨만 한 믿음으로 산을 옮기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의 실현 여부는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의 허세와 무지와 어리석음의 미끼가 아니다. 거기에 담긴 시적인 상상력과 문학적인 수사를 놓치고 격렬한 자기최면의 꼼수를 믿음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망대 비유의 후일담이 이어지지 않아 아쉽지만 그 역시 우리의 문학적 상상력이 개입해야 할 해석의 여백일 뿐이다. 이 망대 공사는 수치를 대가로 뭔가 깨달았다면 그 공사의 주체들이 천천히 나머지 공사 대금을 마련할 때까지 당분간 포기하고 유예하는 것이 상식적 행로이다. 여기에 '포기하는 믿음'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것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여기저기 빚을 내고 무리수를 두면서 그 장벽을 믿음으로 뚫어 내리라고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협박이 될 수 있다. 나아가 그건 하나님을 제 고집으로 조종하려는 신성모독으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갈라디아서의 한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서로의 짐을 나눠 질 것을 종용한 바 있다. 동시에 그 조금 아래를 읽어 보면 각자가 자기의 짐을 져야 한다고 훈계한다. 자기의 앞가림 충실하게 하고 제 짐을 제대로 지지 못하는 처지에 어떻게 남의 짐까지 나눠 질 수 있겠는가.
망대의 비유에서 추출된 교훈을 여기에 덧붙여 적용하자면 우리는 제 가정 살림과 사업 활동에서 계산하는 믿음과 포기하는 믿음을 통해 먼저 제 짐을 합리적으로 지는 버릇을 활성화해야 한다. 자신의 한 달 수입에 맞춰 지출 계획을 세우고 가용 예산에 맞춰 사업을 운용해야 한다. 들어오고 보유한 자금이 쫄아 붙을 때는 그만큼 덜 먹고 덜 써야 맞다. 빚까지 낼 정도면 차라리 제 집이나 가재도구를 팔아서라도 일단 구멍을 메우고 살림과 사업의 몸집을 줄여야 정상이다. 급한 대로 은행에 담보 대출받는 것이 때로 불가피하고 자본주의의 이기로 융통되지만, 그것도 습관이 되면 목마르다고 자꾸 바닷물 마시는 꼴과 진배없어진다.
그렇다고, 돈 벌어 무조건 남 주는 공익적인 회사 사업도 아닌데 자꾸 여기저기 손을 벌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망대의 비유가 전하는 믿음의 윤리에 합당하지 않다. 선교든, 목회든, 사업이든, 계산을 잘못하여 첫 단추를 잘못 끼웠는데 억지로 믿음 타령하며 애당초 내지른 관성대로 끌려간다면 그것은 포기하여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무엇보다 그러한 무모한 행태를 믿음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은 성서의 이치에도 맞지 않고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멸시이며 인간에게 산수 능력을 선사하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능멸하는 처사이다.
이런 지적에 일리 있다면 우리는 교회 안팎에서 상당 부분 숨기고 쉬쉬하는 자금·재정·예산·급여 등의 돈 문제에 대하여 이중적 기준을 벗어나 제대로 된 공론화가 필요하다. 자가당착의 청부론이나 공허한 청빈론을 반성하면서 망대 공사의 상식을 회복하여야 한다. 나는 돈으로 뭔가 자랑하려는 자가 못마땅하듯, 돈 문제로 궁상을 떠는 경우도 찜찜하다. 뭔가 그 돈의 자리가 정상 궤도를 이탈한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돈에 대해 떠들고 하소연하면서 직설하지 못한 채 제 속내에 여러 가지 복잡한 카드를 감추고 있는 게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기에 신앙의 고결한 포즈까지 덧칠하여 성서의 '믿음'을 요물이나 주술로 만든 채 무슨 복권 놀음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내 망대 공사는 애당초 주도면밀한 기획과 정상적인 예산과 함께 시작된 것일까. 그 공사 도중에 작동되는 믿음이란 말 속에 자기기만의 휘발성 최면은 없는 걸까. 파탄이 난 망대의 흉물을 대하면서도 그 앞에서 주구장창 하나님을 부르대며 그 애물단지를 끌어안는 인간의 밑 빠진 욕망의 허구렁을 어찌할 것인가.
미완성의 믿음이 차라리 아름답다. 처음부터 다시 계산하면 된다. 이 글머리에 예시된 목사님은 그 바닥을 경험할 만큼 하셨다면 다음에는 다시 계산하여 헌금 수표를 50불로 조정하는 유연성을 발휘하시는 게 어떨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