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성전 헐고 새로 지으라

2013년 8월 18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성경본문 

  
열왕기하 25:8-12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 제 십구년 다섯째 달 칠일에, 바빌로니아 왕의 부하인 느부사라단 근위대장이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는 주님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건물 곧 큰 건물은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근위대장이 지휘하는 바빌로니아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의 사면 성벽을 헐어 버렸다. 느부사라단 근위대장은 도성 안에 남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과 바빌로니아 왕에게 투항한 사람들과 나머지 수많은 백성을, 모두 포로로 잡아갔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그 땅에서 가장 가난한 백성 가운데 일부를 남겨 두어서,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아멘. 
 
로마서 11:25-32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 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그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19:41-48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버리려고 꾀하고 있었으나,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백성이 모두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멘.
 
설교문
  
예배드리고 찬양할 때마다 하나님께 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경동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느끼는 작은 감동을 소개하려 합니다. 지난 주일까지는 파이프 오르간이었지만, 지금은 전자 오르간으로 찬송 반주를 들었습니다. 이 파이프 오르간이 얼마나 좋았는지는 막상 없어지니 알겠네요. 지금 아파서 입원한 셈입니다. 너무 커서 병원까지는 못 가고, 의사가 와서 치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르간 소리가 우리의 찬양을 꽉 차게 한다고 생각하여 늘 풍만함과 풍성함을 느꼈습니다. 물론 전자 오르간도 소리가 좋지만,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늘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소리가 커서가 아니고, 소리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이 갖고 있는 힘이 우리를 꽉 차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달 반만 이렇게 기다려주시면 다시 하늘을 향한 꽉 찬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옛날 종교개혁 시절에 이런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구교라 이름 하는 천주교가 너무 부패하고, 예배도 행실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때, 종교 개혁을 해야겠다고 나선 사람들 중에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세 기독교는 너무나 타락했고 보잘 것 없으므로, 교회를 몽땅 뒤집어 개혁하고, 중세 교회가 쓰던 모든 악기도 추방하자는 쪽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쓰던 오르간이 많이 추방당했습니다. 제네바에 있는 칼뱅 교회에 가보면 악기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교회 중에는 무악기 교회가 있고 유악기 교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비롯한 천장, 벽의 그림까지도 다 추방합니다. 개신교 중에는 새로 짓는 교회에 벽화도 천장 그림도 없는 교회가 참 많습니다. 유리창에 그린 디자인도 없애자고 합니다. 심지어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단에 있는 십자가가 우상 비슷한 것이 아니냐고 하여 십자가도 못 달게 했었습니다. 최근에는 십자가 대신 스크린이 달려있더군요. 스크린은 우상이 아니고 십자가가 우상이라는 우를 범했던 지난 역사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가 타락한 이유는 신앙을 주관하는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이지, 악기나 그림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악기, 그림,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잘못해놓고 왜 이것들을 탓하느냐 하여, 악기, 예술, 미술 모두 다 유지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개혁이라고 주장한 계열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림, 성화, 촛대 등 상징적인 모든 것들을 가리켜 아이콘이라고 합니다. 모든 아이콘을 추방하자는 성상타파 운동이 각 교회에서 있었습니다만, 수백 년 지나온 뒤에 생각해보니 그 아까운 수많은 예술품들이 종교개혁 때문에 억울하게 사라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지금 유럽을 가거나 옛날 교회를 가보면 신구교를 막론하고 아직도 예술품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예술품은 없지만, 찬양과 건축으로 함께 예배를 드리며 풍성한 은혜를 나눕시다. 기왕 할 찬양과 기도, 꽉 차게 합시다. 사랑하고 싶으면 말만 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서 가득 차게 합시다. 가득 찼다, 풍성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 중의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의 감사가 가득 찬 예배가 오늘 성경 말씀에 있는 성전의 핵심입니다.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품이나 아이콘도 아닌, 찬송과 기도를 통해 나타나야 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주인이신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며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은혜를 받고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감사가 가득차야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성전의 생각을 가지고 산 위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올라갔지요. 아마 아침이었을 것입니다. 가서 내려다본 이스라엘 성전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손을 보니, 기도하는 손은 없고, 돈 바꾸는 기계, 아니면 제사 드리기 위해 거래하려는 짐승만 손에 있습니다. 많이 벌었으면 웃는 얼굴, 못 벌었으면 짜증스러운 얼굴뿐입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예수님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곳은 하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으로 가득 찼다. 도둑들, 강도들의 소굴이다. 하나님은 없고 인간의 욕심만 가득하다. 성전이 아니라 속전이다. 이런 곳은 허물어야 한다. 하나님이 안 계시고, 인간도 없고, 그냥 욕망만 가득할 뿐이니, 이곳이 어찌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겠느냐.” 너무 답답해 성전을 바라모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성경 말씀은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 성전을 보고 눈물로 우셨다.” 예수는 우신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이번 한 번과,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 흘리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는 우셨다.” 그 우셨다는 말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친구, 이웃, 자식, 혹은 부모가 완전히 병들어서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진다면, 정말 사랑하는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할 말도 참 많겠습니다만, 하나의 공통적인 표출 방법은 바로 눈물일 것입니다. “난 울었다.” 울음 속에 표출하고 싶은 모든 표현이 다 들어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말씀입니다. 옛날 옛적 다윗이 시작하고 솔로몬이 완성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전,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했던 성전, 하나님이 계시는 곳, 모든 백성이 순례해야 하는 곳, 거룩하고 훌륭한 곳, 그 성전이 어떻게 망했는지 이스라엘 백성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얘기를 아주 압축해서 표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자네의 조상들이 느꼈던 성전 파괴의 역사를 아는가. 오늘 내가 다시 지어진 성전을 보고 너무나 속상하여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울었던 성전 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오늘 시편 74편을 교독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주님의 대적들이 주님의 집회 장소(성전) 한가운데로 들어와서 승전가를 부르며 승리의 표시를 합니다." 승전가란 바빌론 사람들이 성전 파괴를 부르는 군사 노래입니다. “주님의 성소에 불을 질러 땅에 뒤엎고, 주님의 이름을 모시는 곳을 더럽혔습니다. 모든 백성을 짓밟고 모욕했습니다.” 짧은 시편에 성전이 파괴되는 얘기를 썼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에도 성전이 파괴되는 얘기가 있습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에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은 아수리아라는 나라에게 BC 721년에 속국이 되었습니다. 남쪽은 150년 뒤인 586년에 가서야 바빌론의 속국이 되었습니다만, 사실 이미 북방 이스라엘이 속국이 되었을 때 남쪽은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우리가 속국이 되는 대신, 충성을 맹세하며 조공을 바치는 국가가 되겠다며 아수리아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속국 신세만 면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속국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50년이 지나서 아수리아가 망하고 바빌론이 나타나며 아수리아가 지배했던 남북 이스라엘 전체를 바빌론이 손아귀에 넣으려 합니다. 
 
이 때, 남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세 왕이 있었습니다. 한 왕은 여호와김이었습니다. 여호와김은 어떻게든 독립을 이루기 위해 애씁니다. 그 동안 받쳤던 조공을 받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바벨론은 이것을 빌미로 침공합니다. 여호와김은 바벨론 군대가 유다를 휘어잡기 전에 죽었습니다. 아들 여호와긴이 새로이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얼마 후 여호와긴은 바벨론에 항복 선언을 합니다. “우리는 완전히 항복합니다.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신하들과 함께 바벨론 포로로 갑니다. 이 사이 바벨론은 꼭두각시 왕을 세웠습니다. 그 이름은 시드기야 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드기야 왕은 반란을 조장합니다. 북방에서 온 바벨론 대신 남쪽에 있는 이집트와 손을 잡고 반란을 꾸밉니다. 오늘 본문은 반란을 구실로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초토화 시키는 장면입니다. 성전과 예루살렘 도시를 완전히 둘러싸고 통행을 차단시킵니다. 3일 후에 이스라엘은 항복 합니다. 시드기야왕은 바벨론 왕국에서 자신의 두 아들이 참수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본인은 반란죄로 두 눈이 빠진 채 쇠사슬에 묶여 이송됩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 다음으로 왕이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예수시대 헤롯대왕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을 파괴합니다. 성경에 보면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성전을 완전히 파괴합니다. 성전 속에 든 온갖 문화재를 약탈해 갑니다. 우리도 일제식민지 시작하기 전에 명성황후 시해가 있었습니다. 고종의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으로 이미 속국이 되었습니다. 고종의 눈물, 백성의 눈물, 아무 힘이 없었던 시절입니다. 이스라엘 유다가 그랬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위해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성전은 예배하는 종교의식의 중심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혼이 묻힌 곳입니다. 하나님이 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가 법궤에 쌓여 지성소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신이 있는 곳, 이스라엘의 핵심이 있는 곳, 이스라엘의 혼이 있는 곳, 그곳이 성전입니다. 성전을 무너뜨리면 이스라엘은 거죽만 남고 혼이 사라집니다. 정신이 나갑니다. 이것이 파괴의 핵심입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심장입니다. 안보의 심장, 경제의 심장, 모든 것이 성전입니다. 성전을 허물라. 완전히 허물어졌습니다. 그 뒤에 다시 재건을 했습니다만 성전이 허물어진다는 말은 민족이 죽는다는 뜻이고, 공동체가 깨진다는 뜻이고, 사람이 완전히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 속에 담긴, 그 속에 담긴 하나님도 죽고, 인간도 죽고, 하늘 뜻도 그리고 인간의 감성도 손상됩니다.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것이 성전파괴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산에 오셔서 내려다봅니다. 예루살렘이 보입니다. 저 성전은 무너져야 한다. 이 성전에 담긴 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고, 인간의 감성도 아니다. 성전이 장사하는 사람들의 소굴이다. 강도들의 소굴이다. 이 소굴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 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 성전은 건물로 지어지고, 건물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의 감사가 있었지만, 이제 성전은 전혀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와서 살아 있는 성전을 만드신다. 사람의 몸을 입은 하나님,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 예수가 성전이다. 나 성전이 이제는 인간의 죄 때문에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그래서 다 무너져야 한다. 옛사람은 무너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하늘 뜻이 중심이 되고, 창조주가 다시 창조주가 되는 것으로 거듭나야 한다. 사람이 된 하나님, 살아있는 성전이 이제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삼일 동안 묻혀 있다가 부활하여 새로운 부활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인이 된다. 이 성전을 만들어야겠다. 그러나 이 과정이 너무 아파서, 너무 힘들어서, 너무 괴로워서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비록 삼일 째 되는 날 부활절 아침, 웃고 부활하셨지만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예수님만 우신 줄 아십니까. 하나님도 우십니다. 성경의 기록은 없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예수께서 사람이든,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 죄를 대신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 너무 힘들어 아버지에게 호소합니다. 아버지, 이 잔을 꼭 마셔야겠습니까. 대답이 없으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죽게 하십니까. 왜 버리십니까. 하나님은 답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셨나요? 장님이셨나요? 오늘 저는 예수님이 성전을 보고 우셨다는 것을 가지고 그 장면을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된 하나님, 자기가 자기의 몸을 입은 예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셨습니다. 우시느라 답변을 못했습니다. 마지막 이 장면을 본 예수는 하나님의 눈물을 보고, “다 이루었다.” 성전은 다시 세워진다. 자식의 아픔과 자식의 살아남, 민족의 아픔과 민족의 해방, 불이가 득실거리는 세상, 고생하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일어나는 장면, 우리 일상생활 속에 파괴되는 성전과 다시 세우는 성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은 눈물로, 예수도 눈물로, 그렇게 답을 주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헌신하면서 눈물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전을 허물라.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재능이나, 재산을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짜 허물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람의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중심에 하나님이 없다. 중심을 바꾸어라. 여러분은 자살하실 필요 없습니다. 자기파괴 할 필요 없습니다. 성상파괴 필요 없습니다. 아름답습니다. 그 속에 진실로 하나님만 살아 있으면 그것이 참 성전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성전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입니다. 예수와 함께 사는 모든 사람은 걸어 다니는,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 하나님이 중심만 잡고 계시면 그 성전은 아름답다. 충만하다. 풍성하다. 우리 보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채워져 있는 중심은 무너뜨려라. 하나님으로 중심을 다시 세워가라. 하나님 중심으로 성전이 세워지면, 하나님은 더 이상 울지 않으십니다. 기쁘게 웃으십니다. 웃는 하나님 모시고 복되게 사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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