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6:1-3, 7-10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주님께서는 탄식하셨다.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 이렇게 세 아들을 두었다. 아멘.
베드로전서 5:5-11
젊은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 복종하십시오.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권세가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6:33-34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아멘.
설교문
성가대 찬양 감사합니다. 오늘 창조절 첫 주를 맞아서 이렇게 찬양이 울려 퍼졌습니다. 창조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만물 만드시고 사람을 만든 첫 창조입니다. 이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 가 매일 매일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창조는 어떻게 경험합니까? 세상 창조가 아닌 우리 삶의 창조는 어떻습니까? 오늘은 후자 말씀을 성경 본문에서 찾아서 드리려 합니다. 태초의 창조주이셨던 분이 오늘도 매일같이 창조 역사를 만들어 주십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나라에 첫 선교사로 왔던 분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감리교의 첫 선교사이셨던 아펜젤러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1885년 6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탄 아펜젤러 목사 부부는 한 달간 항해를 해서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습니다. 한 달 반을 쉬었다가 부산항을 거쳐 인천항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서울까지 와보니 자기들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더랍니다. 그 이유를 보니, 전 해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난 뒤에 나서 개화파 주도자들이 일본으로 망명하고, 청나라 군대가 와서 주둔하고 있는 등 외국 사람들에 대한 안 좋은 시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부부에게는 곧 태어날 아기가 있었기 때문에, 임산부를 위해서 일본에 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오자마자 다시 일본 나가사키로 돌아갑니다. 세 달 쯤 지낸 뒤에 부부는 다시 서울로 돌아옵니다. 태교를 위해 일본에서 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일본에 간 아내가 조선땅에 왔으면 조선땅을 즐기자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부부는 11월 19일 첫 딸을 순산합니다. 아펜젤러 목사의 개인 기록을 보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부부는 한양에 와서 여자들이 너무나 불쌍하다는 것을 제일 먼저 느꼈다고 합니다. 아들 못 낳는다고 핍박받고, 아기를 못 낳으면 쫓겨나고, 매일 울고, 억지로 순종해야하고... 사람이 이렇게 핍박받을 수가 있냐며 너무나 안타까운 심정을 담은 이야기가 많이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11월 19일 태어난 아기는 딸이었습니다. 서양 사람이 와서 첫 딸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됩니다. 딸아이가 어찌나 예뻤던지, 살결은 백옥같이 희고, 오똑한 코는 예쁘고, 눈동자는 파란색이고, 사람들이 아기를 보러 많이들 밀려왔고, 찾아오는 사람마다 안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서양인 부부의 첫 딸이 참 예쁘다는 이야기가 퍼져서, 남자들도 아기를 보러 많이 왔다고 합니다. 외국에서 온 부부는 아기를 봐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아펜젤러 목사가 할머니, 할아버지 노릇을 하며 지극정성으로 아기를 돌봤다고 합니다. 이것이 조선땅 여자들에게 소문이 나서, 여자들의 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남편도 저랬으면, 했겠지요. 딸을 정성으로 돌보며 키우는 아펜젤러 목사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부부에게 이렇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저의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인 딸을 잘 기르고, 딸을 낳아준 내 아내를 정성껏 모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분, 남녀,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축복을 주십니다. 이 아기는 하나님이 주신 나와 아내의 희망입니다. 미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미래가 얼마나 귀한지, 나는 내 미래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투자합니다.”
작은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128년 전 남존여비 사회인 서울 장안에서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겠습니까. 우리 땅에 기독교 복음이 많이 전파되면서 특히 아녀자들, 또 백정들, 나라 독립을 위해서 일하는 엘리트들,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많이들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데, 전파되는 말씀 때문이 아니라, 이 아펜젤러 같이 아기를 자기 미래로 생각하는 아름다운 아버지, 어머니의 행동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식은 나의 확실한 미래입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느냐면 미래, 희망 때문에 삽니다. 지금 괴로워도 미래에 크고 밝은 희망이 있다고 믿기에 오늘 괴롭고 힘들어도 이기고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펜젤러 목사도 우리 딸은 나의 희망, 나의 미래라고 말했습니다. 이 한마디가 교회에서 하는 설교 백번보다 훨씬 큰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자밖에 없던 당시 사회에서 이를 언문으로 번역해 여성, 백정, 평민들이 들고 다니며 같이 읽고, 명상하면서 복음이 퍼졌습니다. “하나님은 옛날 옛적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오늘 1884년 11월 19일 저에게 딸을 주신 이 날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제 미래를 주셨습니다.”
이 내용을 1517년 독일로 무대를 옮겨 생각해봤습니다. 당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려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했습니다. 회개하려면, 회개 명목을 지어놓고 값을 매긴 면죄부를 사야 합니다. 아마 면죄부 값이 천차만별이었을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에게는 비싸게, 없는 서민에게는 싸게 팔고, 그래서 하늘나라 가는 일도 아랫목 윗목이 있었을 것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나는 면죄부를 사고 싶어도 살 돈이 없다. 아주 싼 면죄부도 살 돈이 없는데, 언제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을 것이고, 돈이 있는 사람은 정말 이걸 사면 면죄를 받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을지 의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고민, 있어도 고민. 이렇게 구원의 문제로 힘들었을 때 루터가 나타나 이야기합니다. "구원받는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이신 나의 희망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빈부, 신분의 격차를 넘어서서 믿으면, 믿음 하나만으로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폭탄선언을 합니다. 당시 돈이나 권력으로 구원을 사고팔던 시절에, 다 필요 없고 믿음만 중요하다는 말을 들은 당대의 모든 사람들은 얼마나 큰 희망을 얻었겠습니까? 종교개혁이 성공한 이유는, 이런 극적인 상황 속에서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메시지 덕분입니다. 그 뒤에 루터가 번역을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성경, 라틴말로 쓰여 있어서 누구나 읽을 수 없던 성경을 평범한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믿으면 나에게 희망이 있다. 믿으면 나에게 미래가 보장된다.” 그러면서 불길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1884년이나 1517년이나, 한국이나 독일이나 이 말씀은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작은 이야기지만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그대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주기 위함이다. 새로운 창조를 주러 왔다. 사랑하는 여러분, 첫 번째 창조 이후로 사람을 만들어 놨더니,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죄짓고, 타락하고, 흉측하게 사는 여러분, 여러분이 그렇게 살다보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형상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없고, 사람 모습만 있습니다. 몸만 있고 혼이 없습니다.” 오늘 창세기에 보면, 하늘의 아들들이 땅에 있는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남은 것은 땅 뿐이고 하늘이 없어졌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없고 사람의 욕망만 남았다는,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진 세계를 멸절시켜야겠다, 후회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죄지은 사람들을 다 노아의 홍수로 멸망시키고, 노아와 식구들만 살려놓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 기본 가치를 잃어버리고 욕망이 충천한 이 세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새로운 인간으로, 새로운 세계로 변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맛보는 것입니다. 과거가 미워서 하나님이 회개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예수님이 보시기에 회개를 안 하면 미래가 없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생명이 넘치는 미래입니다. “그 미래를 죄악이 막고 있으므로, 미래 때문에, 희망 때문에 회개하라.”
사실 회개란 말은 두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차지해라. 이 가운데 하나님의 관심은 후자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미래를 차지해라. 1884년 아기가 나의 미래라고 고백한 것이나, 1517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서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나,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낳게 하시고, 빌라도에게 고난 받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그걸로 하나님이 끝내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부활하여 새로운 생명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미래, 예수가 고통당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머물지 않으시고, 고통을 꿰뚫고 새로운 미래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것을 새 창조라고 이름 합니다. 새 창조가 되고 싶으면 반드시 잘못된 하나님의 형상을 좀먹는 과거는 단절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새로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미래를 차지해야 합니다. 결단은 과거 지향이 아닌 미래 지향적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몸으로 낳았든 가슴으로 낳았든, 사랑하는 생명에 태어나면 우리의 미래를 생명에 겁니다. 저도 제 자식들에게 제 미래를 겁니다. 제 내일을 맡깁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습니다. 하나님도 자기 자식 예수에게 하나님의 미래를 맡겼습니다. 고통당하면, 아프면, 죽으면 죽는 대로 맡기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구원의 생명, 부활의 생명을 넣어서 새롭게 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다 주겠노라. 하나님의 미래는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이 만드신 몸으로 세속에서 살아라. 단,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형상만은 잃지 마라. 하나님의 뜻과 진실만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다. 그러면 미래가 보장된다. 세상 속에, 몸속에, 역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먼저 채워 넣어라. 하나님의 혼, 하늘의 뜻을 먼저 채우고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살아라.” 이것이 작은 창조 혁명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혁명을 지금도 주십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곳마다 옛 사람 벗고 새사람 입자고 말씀하십니다. 떡을 들 때, “나의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게 해주십시오,” 잔을 마실 때, “옛 것은 다 깨끗이 씻어주시고, 새로운 세계와 새 세상을, 새 인간을 잔속에 담아 주십시오. 제가 먹고 마시겠습니다. 저는 미래를 먹겠습니다. 내일을 마시겠습니다.” 오늘 성만찬이 하나님의 축복의 떡이고 축복의 잔입니다. 진실로 감사하면서 미래를 드세요, 내일을 마시세요.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