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예레미야 애가 3:23-26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주님께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 아멘.
디모데후서 1:7-1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일이나 주님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함께 겪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실을 따라 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따라 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타나심으로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않음을 환히 보이셨습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7:11-16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그래서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하였다. 아멘.
설교문
우리는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 성가에도, 설교에도 제목이 있듯이 모든 것에는 다 제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제목에 담긴 공통의 내용이 있습니다. 개인이 신앙생활을 할 때, 신앙공동체로 모일 때 공통의 제목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감사합니다. 이것이 여러 가지 언어로 표현되어서 다양한 제목으로 나타납니다만 주제는 하나님입니다.
저는 신학을 전공했고, 지금도 열심히 신학이 무엇일까를 평생 제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영구과정 중에 제가 얻은 잠정적인 답이 하나 있습니다. 신학은 하나님 이야기인데,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읽고 성경말씀의 주제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찾아서 그것을 논리화 하고, 알기 싶게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설명은 정확하게 하나로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하나님이 누구신가, 어떤 분으로 알고, 섬기고 싶고, 찬양하고 싶은 가를 우리 각자에게 과제로 주어졌습니다. 오늘 여러분 성경말씀을 읽으시고, 들으시고, 하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작지만 큰 과제입니다. 신앙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신학과 차이가 없습니다. 신앙이란 신앙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누구라고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은혜를 사모하는 내가 경험하고, 우리가 경험하고 믿으며 찬양하는 그분이 누구인지 믿음으로 경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설명이 많습니다. 다 옳은 말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묻고, 그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이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찬양도, 기도도, 말씀도 우리에게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 그 분은 생명을 주신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구약의 말씀을 보면, 생명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누리는 것도 생명이지만, 생명은 함께 누리는 복합적인 것입니다. 가족이 모두 함께, 사회와 나라가, 온 세상이 함께 누리는 생명이 있습니다. 집단적 생명, 공동체적 생명, 그 생명도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오늘 누가복음 말씀에 보면 어느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병 고침의 역사가 나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생명도 그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 생명, 개인의 생명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행복하고, 복되게 사십시오.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이라는 관문이 있을 것입니다. 생명을 끝내고 싶어 하는, 생명을 몰아내려고 하는 그런 엄청난 과오가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것은 뛰어 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죽음도 넘으셔서 어느 상황이던지 생명을 허락해 주십니다. 내용이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께서 읽어서 받으신 말씀 예레미야 애가서입니다.
예레미야는 남 유다가 바벨론에 짓밟혀서 나라를 빼앗기고 고통당할 때, 예언자 예레미야가 받은 고통을 하나님 앞에서 온 맘을 다해 “하나님, 우리의 (집단) 생명이 죽어갑니다”고 호소했습니다. 이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예레미야 애가서입니다. 비참한 이야기만 쓰여 있습니다. 그 중간에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 힘들지만 견딥시다.”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저는 애가서를 읽을 때마다 제가 경험은 못했으나 배워서 알고 있는 일제 강점기로 우리가 힘들었던 식민지 시절을, 그리고 6.25 전쟁 이후 죽음의 문화로 인해 우리가 떨며 살고 있었던 때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레미야 애가서 둥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인용해서 읽었습니다. “하나님, 아침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히 넘칩니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내 목숨이 살지, 내가 파리 목숨처럼 죽을지 아니면 바벨론에 끌려가서 개죽음을 당하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샬롬”이라고 인사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인 이야기가 있읍니다. 오늘 자고 일어났더니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오늘 아침에도 차고 넘치네요. 오늘 살았네요. 어제 밤에 무사하게 살았네요 라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생각됩니다. 혹시 여러분 집에 가셔서 예레미야 애가서만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생명의 주가 되신 하나님에게 예레미야가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아이들이 엄마 품에서 젖이 없어서 죽어 가네요. 먹을 것, 마실 것, 찾아 헤매다가 길거리에서 발길에 채여 죽어 가네요" 라고. 이게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어 고통 당하는 백성들의 삶위 현장입니다. "어떤 여자가 사랑스럽게 낳고 기른 자식을 배고프다고 잡아먹는단 말입니까? 이럴 수 있습니까? 주님의 성전은 예배하는 곳인데, 예배를 집전하는 예언자와 제사장이 맞아 죽습니다. 이럴 수 있습니까. 젊은이와 늙은이가 길바닥에서 쓰러지고, 처녀와 총각이 칼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분노를 발하시던 날 그들은 사정없이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라고. 나라의 생명입니다. 민족의 생명입니다. 집단 생명이 이렇게 허술하게 죽어 갑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님, 생명의 주인, 민족의 생명의 주인이신데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이럴 수 있습니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반드시 예레미야 애가에만 있었을까요? 비슷한 이야기들이 오늘날까지 이 땅 곳곳에서 수없이 쓰여 지고 호소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새롭습니다라는 이 말이 통합니까. 아마 스스로 죽지 않고 살아난 경험이면 아침마다 그럴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냐면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어떻게 이 절망을 살라고 하십니까? 이 절망을 놓고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우리 백성이 망했습니다. 이 나라가 망했습니다. 그렇게 원망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은 죽음이지만 집단이 죽은 것은 망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 이 죽음을 영원히 이것으로 끝내시렵니까 라고 호소합니다. 여러분 죽으면 삶이 끝난다고 믿습니까? 나라가 한 번 남의 나라에 속국이 되면 그걸로 끝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식민지일지라도 우리는 나라의 한 시민으로, 한 백성의 시민으로 참자. 이것이 죽음이지만 죽음을 끝내고 다시 부활하자. 그것이 독립 아닙니까?! 그것이 자유 아닙니까?! 죽음은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음을 끊고 새로운 생명을 갈구합니다. 사람마다 나라마다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이 다양하게 있습니다. 모두가 잘못하여 역사가 망했다고 기록할 수도 있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독특한 사관이 있습니다. 자기들 백성이 허약해서 망했는데, 그것만 가지고 망했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이스라엘 고백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면 우리는 망한다. 군사력이 약해서, 경제력이 약해서 망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잘못해서 하나님이 분노하셨다. 그러면 망하는 것이다. 하나님 믿으라고 했더니 하나님 곁을 떠났다. 하나님의 공의를 짓밟았다.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을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를 발해 우리가 망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구약의 기록은 역사적 자연과학적 기록으로 창세기를 쓴 것이 아니고, 사회과학적 교과서를 쓰기위해 선지자 이야기나 역사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고. 인문과학적 예술적 서적을 내기 위해서 잠언이나 시편을 쓴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표현하든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역사 속의 주인은 하나님, 그 분을 중심에 모시고 살면 축복을 받고, 그 분을 벗어나면 우리는 멸망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하나님은 모든 역사의 주인입니다라고요. 그렇기에 이런 이스라엘의 사관에 따른 역사를 신앙의 역사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기에 그에 따른 고백이 있읍니다. 백성이 험난하게 죽어가는 상황을 보면 그것은 정말로 비극입니다, 그래서 분노합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라가 다시 일어섭니까? 회개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붙잡으면 살아납니다. 하나님을 벗어나면 멸망입니다. 하나님을 모셔야 다시 삽니다. 재창조, 생명의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구약의 메시지는 이처럼 모두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역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이 주신 축복을 향유하고 누리게 하십니다. 단 역사의 과정에 먼저 가장 중심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갖추랍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축복이 된답니다. 그것이 없어지면 세속이 되고, 여러분은 망할 수 있고 죽을 수 있습니다. 한번이 이니라 매일같이 죽어 갑니다.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면 사람이 죽는 것 같지만 다시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축복으로 얻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생명의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 죽음이 끝이 아니라, 나라가 망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죽고 무너지고 또 다시 살아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믿고 살았습니다. 2천 년 동안 나라를 잃었으면 그것으로 끝나야 하는데 지금도 오뚝이처럼 살아 있지요. 그것은 자신들의 역사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이 계시면 죽음 속에서, 망한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계시고, 하나님은 다시 살리신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아프더라도 이 삶의 중심에 있는 생명의 역사를 살아갑니다.
죽음과 생명, 절망과 희망, 이 둘 사이가 얼마나 먼지 아십니까. 최근에 뉴스 보니까 독일의 메르켈 수상이 뮌헨 근처 다하우(Dachau) 나치수용소를 방문해 사죄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에 가면 전기로 된 철조망 때문에 안에 있는 사람은 밖으로 나올 수 없고, 밖에 있는 사람은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철조망 안쪽을 보는 사람은 매일 조금, 조금씩 죽어가고, 철조망 밖에 있는 들국화 피는 것을 아침 마다 보는 사람은 하루, 하루씩 살아갔답니다. 생존자인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정신병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고백이죠. 나중에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점은 철조망 하나입니다. 철조망 하나를 놓고 철조망 안쪽의 분노와 좌절을 생각하는 사람은 죽어가고, 철조망 밖에 있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본 사람은 살아갔습니다. 철조망이 얼마나 두꺼운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1cm 또는 2cm 정도일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생사가 갈립니다. 예수님의 희망은 철조망은 잘려진다. 지금은 철조망이지만, 철조망은 잘려진다. 벽은 허물어진다. 죽음과 삶이 아주 순간적인 차이지만, 누군가는 와서 죽음의 문턱을 허물어트린다. 그렇게 약속하십니다. 그러면 사는 것이다. 나라가 망했다고 그걸로 끝은 아니다. 하나님은 다시 살려낸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분이십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이런 사실들을 읽고 경험하여 다 알고 있습니다. 한 개인의 이야기가 예화로 제기됩니다. 유대 땅에서는 과부로 산다는 것은 죽음과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따돌림 당하고, 먹을 것도 없고 비참합니다. 그 사람에게 외아들이 있었다는 것은 곧 외아들의 생명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생명, 가족 전체의 생명이 함께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아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엄마, 그리고 가족 전체가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총체적 죽음입니다. 얼마나 슬프고 보기가 측은하여 참기 힘들었는지 많은 사람이 관을 따라 왔습니다. 그 중에는 유대교 제사장, 바리새파 사람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 보면 많이들 "울었다"고 쓰여 있읍니다. 그 광경을 보는 예수님도 우시면서 도움의 손길을 주십니다. 관을 내려 놓게 하고, “청년아 왜 자느냐. 일어나라!” 고 명하십니다. 엄마보고는 울지 말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관속에 있는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지요. 그 아이를 엄마한테 돌려보내면서 생명을 살아라. 죽음의 벽을 넘어선 생명을 살아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청년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끝나는 것은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지 사람이 결정할 수 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을 만드셨고, 그 분의 아들인 예수도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전하십니다. 말씀은 위대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읍니다. 하나님은 언행일치의 하나님입니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창조의 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한 게 아니라 몸으로 죽으시고 몸으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생명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성경에 쓰여 진 말은 우리의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행동이고, 그 분의 언행은 구원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언을 잘하고 행을 못하면 언행분리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의 삶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쓰여 진 글 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삶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으면, 먹으면, 마시면 그냥 다시 살아납니다. 이렇게 믿고 하나님을 모시고 사십시오. 말 따로 행동 따로가 아닙니다. 생각 따로, 몸 따로가 아니고 모든 것은 통합된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주님의 긍휼은, 오늘 죽음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고, 죽음으로 생명을 끝내지 않고 죽음을 다시 폐하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바꿔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은 죽음을 폐하십니다. 망하는 것을 폐하시고, 절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않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옛날도, 지금도, 내일도 그 하나님은 죽음을 폐하십니다. 생명과 썩지 않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나라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역사도 그렇습니다. 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 속에서 다시 살아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보고 그렇게 믿고 살라고 분부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함께 이렇게 고백하십시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옵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