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서 49:1-6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님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님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 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아멘.
로마서 10:9-17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9:35-41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 절하였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말하였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아멘.
설교문
오늘 성경말씀에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안에 100마리 양이 있는데 그 중에 1마리를 잃어 버렸다면 양 무리의 주인은 99마리를 그대로 두고 잃어버린 1마리 양을 찾기 위해서 숲속으로, 들판으로 헤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게 되면 너무 기뻐서 축제를 벌인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99마리의 양도 중요하지만 1마리 잃은 양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전파하신 예수께 먼저 믿는 우리도 중요하지만 아직 구원의 동네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도 중요함으로 오늘도 주님은 산으로, 들판으로 돌아다니며 찾고 계십니다. 99마리의 양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완벽하게 회복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99마리에 잃어버린 1마리가 더해져서 100이 가득차야 하나님은 직성이 풀리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존심입니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자기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존심 때문에라도 99마리에게 기다리라고 말씀을 해놓고 1마리를 찾아 완벽한 수를 만드십니다.
오늘 구약의 이사야서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희민족을 등불로 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등불로 돌아 다녀야 합니까? 왜 이 등불은 외국의 침략 때문에 꺼져야 하고, 바람에 날려야 하고, 갈대처럼 꺾여야 합니까. 왜 등불이 고생하도록 그냥 두십니까? 그때 이시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습니다. 나는 너희 민족을 온 백성을 위한 등불로 택했다. 그러나 등불은 온 백성이 구원 받을 때까지 켜져야 한다. 그리고 함께 나와 동행해야 한다. 먼저 택함을 받았다고 그걸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하나님의 목장은 완전히 채워져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자존심이다. 우리는 먼저 부름을 받아서 우리에 있던 아직 부름을 받지 못해 또는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악해서 그 우리에 들어가지 못했으면 우리는 기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로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 그때까지 99마리는 기도해야 하고, 1마리는 찾아 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홀로 믿어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연결의 고리를 끊은 채 어느 인간이, 개인이 단독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 받지만 우리 안에서 기다려라.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우리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하고, 봉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 선교사로 나갑니다. 그리고 우리도 선교사를 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이냐면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증거하고, 증거 받은 자가 듣고, 구원의 방주를 채우라는 뜻입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어느 한 선교사가 코사족에 선교를 하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이 민족이 사용하는 토속어는 코사(Xhosa)어이며, 그 중에 우분투(ubuntu)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어느 날 선교사가 초등학교 아이들을 모아놓고 아이들 앞에 선물을 쌓아놓았습니다. 아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경쟁을 시킵니다. 달려가서 먼저 선물을 가진 사람이 제일 큰 것을 갖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달리기를 시켰습니다. 경쟁사회입니다. 힘 있는 자가, 먼저 뛰는 자가 큰 선물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느 누가 할 것 없이 선물 앞에 모여 우분투를 외치며 선물을 나눠 갖습니다. 나누고서는 손에 손을 잡고 우분투 합창을 합니다. 선교사가 깜짝 놀라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우분투는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있어서 내가 있습니다. 말을 뒤집어 보면 내가 우리를 만들고, 우리를 안아줍니다.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나는 우리를 만듭니다. 이 선교사가 선교하러 갔다가 오히려 선교를 받았고, 감동을 끼치러 갔다가 어린아이들에게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혹시 이 고백을 아프리카 어린이의 목소리가 아닌 우리의 목소리로 우분투 할 수 없습니까?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나는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있기에 저 같은 하나의 국민이 있습니다. 저 같은 국민이 우리나라를 만듭니다. 우리 가족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제가 가족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 교회가 있어서 저는 행복합니다. 저는 교회를 만듭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양의 우리에 99마리가 있고, 나중에 잃어버린 1마리를 찾았습니다. 그 한 마리가 “우분투”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면 99마리와 1마리가 합쳐져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벽한 우리를 만들어 갑니다.
우리는 요즘 “공공질서가 망가졌다. 개인주의가 너무 심하다.”고 합니다. 혼자는 잘 노는데. 모이면 그렇지 못한다. 모이면 잘하는데, 혼자는 못한다. 우리는 사회질서와 개인질서 가운데 살아갑니다. 개인의 강한 믿음과 함께 살아가는 사이의 갈등이 심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경쟁이 심합니다. 누구든지 먼저 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 믿는 것도, 먼저 믿고, 먼저 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먼저 받은 자는 빛으로 택함을 받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믿고 구원 받을 때 까지 빛을 비춰져야 한다. 축복의 은혜는 계속 비춰야 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와 한 사람 한 사람의 축복이 같이 가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사회가 우분투 같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도 우분투 신앙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하고,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인데, 믿을 때 눈 감고 믿지 마라. 왜 눈을 감고 믿느냐. 그 분 말씀이 이 말씀하시기 전에 기도 할 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할 때 눈 감고 기도하지 말라. 그런데 우리는 기도할 때 눈을 감고합니다. 사람의 눈은 감겨도 좋은데, 기도할 때 영의 눈까지 감아 버리면 아무것도 보지 않는 상태에서 기도한다는 말은 중언부언한다는 것 아닙니까. 내가 기도하고 싶은 제목이 있으면 제목을 눈앞에 보고, 아픔을 상쇄하고 싶으면 아픔을 보고, 또 기쁨을 눈앞에 보고, 우리 형제가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고, 아파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치유해 달라고 또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무주공산에서 단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영의 눈을, 마음의 눈을 감은 채 하는 중언부언과 무엇이 다르냐? 기도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눈앞에 보면서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눈 뜬 기도가 주님이 명하신 기도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구체적인 것을 보면 사람은 다 입으로 고백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데 다만 중요한 것은 입으로 고백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몸으로 실천하면서 입으로 고백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다른 말로하면 믿을 때 눈 감고 믿지 마시고, 맹목적으로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없이 믿지 말고, 세상을 보고, 아픔을 보고, 내 마음의 심정을 보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와 믿음을 받치십시오, 눈 감은 믿음이 아닌 눈 뜬 믿음을 가지십시오.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만 그때 믿는 다는 말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 믿음의 상징인 성전에 예배를 보러올 때,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러 올 때 믿음을 하나님께 고백하러 오기 전에 형제자매와 갈등이 있거나, 싸운 것이 있거나, 다툰 것이 생각나면 먼저 형제자매와 화해하고 나서 나를 믿어라.”라고 하십니다. 형제자매와 화해하고, 서로 어울려서 사는 것을 오늘 성경 말씀은 행함이라고 했고, 그 행함은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가짜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 살면서 그곳에서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지 않은 채 주일날만 와서 나는 믿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 주일 날 믿는 믿음의 찬송은 믿음의 말씀은 사랑의 세계에서도 실천되어야 합니다. 주간 동안에 살아가는 믿음 없이 주일 날 믿음은 하나님이 공허하게 받습니다. 진실로 믿음은 항상 사랑이 뒤 따라 옵니다. 그것을 행함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사랑과, 주일은 주간과, 하늘은 세상과 떨어 질 수 없이 서로 묶여 있습니다. 영적으로 구원 받고 싶으면 마음으로도 구원 받아야 합니다. 육적으로 부자가 되고 싶으면 영적으로 부유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은 사람이 구분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구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안에 99마리와 울 밖에 있는 1마리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주일과 주간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신과 인간을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정확히 쓰여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이 땅에 사셨던 인간예수입니다. 다만, 태어나기를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로 온 것만 다르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으로 사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의 이름인 야훼를 함부로 부를 수가 없어 주인양반 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육으로 사셨던 그분을 주라고,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히브리어로 메시아라고 합니다. 그렇게 부르면 믿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아주 중대한 말씀입니다. 사람으로 살았던 예수를 주님이라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말을 바꾸면 사람으로 살았던 예수는 똑같이 태어나서 살다가 마지막 우리와 똑같이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자를 보고 그리스도라고, 주님이라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 안 죽고 사는 사람, 부활하신 사람이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죽은 자를 산자로 부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이 닮은 자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그렇게 칭해야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그리스드라고 쉽게 말하지만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이 땅에 사는 예수는 하늘의 사람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은 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똑같이 예수 믿는 사람은 인간으로 이 땅에 살아가며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지만 그걸로 우리의 운명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축복으로 받는 자입니다. 죽어 묻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주로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의 담지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럼으로 죽는 자와 부활하는 자가 다른 게 아니고 똑같습니다. 이 진실을 아십니까. 이것이 믿음의 고백이라고 하면 사랑은 하늘의 영광을 찾아 가는 사람입니다. 하늘 뜻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하늘 뜻을 이 땅에서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주일날 예배 때만 있지 않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일상 하나하나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성과 속을 인간의 마음대로 구분하지 마세요. 성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속속에도 하나님이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상 속에서 만나주십니다. 그 속에서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예배드릴 때 진심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합시다. 인간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고백합시다. 살아 있는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이 땅에 주신 삶의 구석마다 하나님의 숨결이 있다고 믿고 삽시다. 하나님의 진실로 사십시다. 순간순간의 역사 속에 부활의 능력이 임한다고, 죽지만 살아난다고 믿고 고백하며 매일 매일을 살아갑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오늘 말씀에 그 믿음은 헛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일상의 믿음이 없는 주일만의 믿음은 울리는 꾕과리에 불과합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은 1마리 양을 찾을 때 까지 세계 구석구석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 구석구석마다 가셔서 하나님이 업고 오십니다. 이 진실을 여러분이 아십시오. 여러분 자신도 이 땅에 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하늘 뜻을 먹고 자라십시다. 그것은 더러운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펼쳐질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역사 속에서 찾으십시다. 찬송하면서 찾으십시다. 몸속에서도 찾고, 영속에서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종횡무진 우리를 엮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며 믿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는 주님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습니다. 그러면 구원 받습니다. 오늘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있길 원합니다. 내일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풍성하길 기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듭시다. 그 하나님 나라에서 오늘도, 내일도 살아갑시다. 주님의 은총을 풍성히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