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출애굽기 20:1-17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 살인하지 못한다. 간음하지 못한다. 도둑질하지 못한다. 너희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못한다. 너희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너희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할 것 없이,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
아멘.
로마서 14:17-19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
아멘.
마가복음서 12:28-34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가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아멘.
설교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제케 하시는 능력이 여러분과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10월의 아름다운 일요일 아침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말씀 전하도록 초청하여 주신 목사님과 교우 여러분들에게 먼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광고시간에 들으신데로 박종화 목사님은 지금 스위스에 가 계십니다. 유럽에서는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준비하는 여러 형태의 모임들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를 위한 사전 심포지움이 이번 주에 취리히에서 열리고, 스위스 교회와 취리히 대학이 함께 주관하여 장로교 전통과 그 현재적 의미를 논의하는 자리에 박목사님이 한국을 대표하여 초청되신 것입니다. 장로교의 뿌리와 출발이 되는 것은 스위스였지만, 21세기 그 모습이 역동적으로 부각되는 곳은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교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먼저 이 장로교가 처음 시작되었던 상황에 대하여 여러분들과 생각하여 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개신교의 출발, 혹은 종교개혁에 대하여 말할 때 마틴 루터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장로교는 루터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 아닙니다. 장로교의 출발은 스위스의 종교개혁과 관련이 있습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인 츠빙글리와 칼빈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장로교는 그 후 스코트랜드를 거쳐서 캐나다와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캐나다와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전하여 졌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 교회를 세운 언더우드 선교사가 바로 미국 북장로교에 속해있었고, 또한 한국 개신교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신 분들, 강원용목사님, 문익환목사님, 장준하 선생님, 윤동주 시인 등이 성장한 배경이 되었던 만주 용정의 은진 중학교는 캐나다 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장로교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한국 교회 초기부터 아주 지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여러 교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장로교는 그 개신교 가운데 69를 차지하기 때문에 숫적으로 가장 많고, 굳이 장로제도를 따라야 될 필요가 없는 감리교나 순복음 교단도 장로제도를 만들어 따르기 때문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교파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우리 장로교의 뿌리가 되는 그 스위스 장로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그것은 우선 츠빙글리라고 하는 스위스 종교개혁자로부터 비롯됩니다. 츠빙글리라고 하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자는 마틴 루터와 동시대의 인물이었습니다. 스위스 북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스위스 최초의 대학인 바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에 츠빙글리는 가톨릭 사제로서 활동하다가 군종사제의 직분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스위스는 지금과는 달리 굉장히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알프스의 험준한 산맥으로 식량을 얻을 수 있는 토지가 부족하고 열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하여 택한 방법은 이웃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여하여 돈을 버는 용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16세기 당시는 로마 교황의 군대와 프랑스 왕 사이에서의 왕권과 교황권 사이, 기득권 전쟁이 빈번했었습니다. 오늘날 로마 교황청에서 근위병을 맡고 있는 스위스
군인들은 바로 이 시기로부터 유래한 전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이 스위스 용병들은 신실하고 용맹성이 있으며 충성스러운 것으로 잘 알려졌기 때문에 상당한 인기를 얻었고, 용병사업은 더 번창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고 이익을 취한 집단은 오히려 당시의 가톨릭 교회였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각각 돈을 벌려고 적군에게 속하여서 이렇게 서로 죽이고 죽는 광경을 보고, 또 어쩌다 목숨을 부지하여 집으로 온다고 해도, 상이군인이 된 경우가 많아서 이후에는 노동을 할 수 없었으므로 빈곤이 악순환되는 현실도 목격하게 됩니다. 이렇게 피묻은 돈으로 부를 축적하던 당시의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모순을 처절한 전쟁터에서 군종사제로서 경험했던 츠빙글리는 취리히를 중심으로 스위스 안에서의 종교개혁을 결심하고 당시의 종교개혁에 뜻을 같이하고 동참하려는 동료들과 함께 이를 실행해 나갔던 것입니다.
루터가 개인 구원의 문제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종교개혁으로 나아갔다면, 츠빙글리는 민족의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종교개혁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행위로써의 구원이 아니라, 은혜로써의 구원을 강조했던 츠빙글리에게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가 아무리 극치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츠빙글리 보다 조금 연배가 아래였던 칼빈은 프랑스 피난민으로서 스위스에 머물러야 하면서 나름대로 그 애환이 있었고, 조국 프랑스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을 품고 살아가면서 종교개혁을 이끌어갔었습니다. 그에 비해 츠빙글리는 자신의 조국 안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상황을 개혁하고자 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색채가 더 짙게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반대를 하고, 즉 교회의 부패로 이익을 챙기던 가톨릭 기득권층과의 마찰로 벌어진 전쟁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하게 됩니다. 그의 시체는 적군에 의하여서 난도질 당하고, 돼지고기와 함께 섞여져 불에 태워 졌습니다. 이렇게까지 잔인했던 이유는 종교개혁의 추종자들에 의하여서 그 시체를 수습하여 구심점이 되는 것을 막고, 또 츠빙글리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죽게 되지만, 그의 정신을 죽일 수 없다는 츠빙글리의 유언대로, 그의 종교개혁 사상은 그의 직접적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와 또 제네바를 중심으로 이 개혁을 이어나갔던 칼빈에 의하여 계승되었습니다. 칼빈은 본래 프랑스 태생이었지만,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피난간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인 위그노와 함께 종교개혁을 이끌어 나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그노들이 갖고 있던 자본과 기술력을 중심으로 스위스의 정밀 산업의 토대를 이루어 나갔고,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자와 자본을 적정하게 유용하여 상공업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자본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향했던 자본주의는 오늘날 더욱 극명하게 빈부간의 격차가 심화되게된 천민자본주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자본주의, 즉 공동의 선을 위하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부를 추구하되, 경제정의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철저한 배려가운데 자본주의가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칼빈은 무척 강조하면서 사회적 번영을 추구하고 종교개혁을 이끌어 나갔읍니다.
이렇게 형성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장로교는 이제 또 다시 종교개혁을 해야 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교회 안팎으로 개혁되어야 할 내용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종교개혁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되게 하라는 내용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허물지 말고, 인간이 다른 인간과 피조물 위에 군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에클레시아 레포마타 셈퍼 레포만다 라는 개혁교회의 원칙을 담은 라틴어 문귀가 있습니다. 이 말 뜻은 개신교란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 교회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이 땅 위의 교회가운데 완벽한 교회는 있을 수 없고, 끊임없는 개혁의 시도가 이루어져야 개혁교회, Protestant라 불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의 시도를 이룬다는 것은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분열을 해야 된다는 것을 말함이 결코 아닙니다. 이 점이 역사 안에서 개신교의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교리적 이해가 달라지면 서로간의 입장이나 신념의 차이를 토론으로 풀어나가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금방 분열로 이어져서 새로운 분파로, 교단으로 나뉘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개혁의 근본 원칙에 위배됩니다. 칼빈은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1552년 4월 잉글랜드의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에게 보낸 편지의 한 내용입니다. “우리시대의 주된 악들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한 것이 있으니 즉 교회는 분열되어 있고, 우리 가운데 인간적 교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친교를 모두 말하고 있긴 하지만, 진심으로 행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분리되어서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나는 열 개의 바다라고 해도 기꺼이 건널 것입니다.”교회의 연합을 위한 칼빈의 노력과 애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한 대목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 일관된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 세가지 본문의 말씀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습니다. 먼저 구약성서의 본문이 되는 십계명은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나오는데, 십계명은 주기도문과 함께 종교개혁자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내용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특별히 스위스 종교개혁 사상은 이러한 계명을 구원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삶의 이정표로 교훈적으로 삼아야 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십계명은 주기도문과 같은 공통된 체계를 갖고 있는데, 앞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그리고 뒷부분은 이웃과의 관계성으로 요약됩니다.
그런데 십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그 십계명의 서언이 되는 대목입니다. 흔히 우리가 간과하면서 읽기 쉬운 귀절입니다.“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출애굽 20:2)
십계명이 출애굽 과정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흔히 우리가 십계명을 떠올리면 제 1계명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서언이 제 1계명보다 훨씬 더 중요하며 강조되어야 합니다. 나라고 표현된 하나님 스스로 하시는 자기 정의가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자유를 선사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 1계명을 읽어야 하는데“흔히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 1계명의 배타적 명령은 자기 중심주의적 독선으로 이해되고 이념적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나라는 것은 우리가 함부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준엄한 명령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혹은 개신교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다른 종교를 폄하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나란 누구입니까? 그 존재는 인간을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 출애굽의 하나님, 바로 그 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유성을 망각하고, 편협한 인간적 지식으로 하나님의 자유를 구속해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강조된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라는 말 뜻은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축소해서 사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해지는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자유한 속성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그 어떤 개념이나 말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완벽하게 설명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하나님은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유이십니다. 그러나 자유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자유라는 개념이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해 주는 한 방법임은 틀림없으나, 사랑이라는 말이나 자유라는 말로도 하나님을 다 담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능력이나 공로가 쌓여서 그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우리에게 은총으로 다가 오셔서 우리가 그 분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고 무엇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는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해 한 분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라 합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미모, 건강, 지식이나 그 밖에 상대화 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한분이신 하나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않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우리가 흔히 개인구원의 문제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고, 이웃 사랑은 사회구원의 문제와도 연관지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 그리고 나와 자연과의 관계를 모두 포괄하는 폭넓은 관계성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삼차원적 관계성의 확립이 우리민족의 전통적 천지인 사상과 맞물릴 뿐 아니라, 복음의 핵심과도 이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와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저서 십자가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지역적, 공간적, 물리적인 편협성을 너머서서 사람뿐만이 아니라, 좀 더 포괄적으로 피조물 전체, 자연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가장 큰 계명이 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한 이 황금률의 본문은 기독교만의 전유물은 물론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서 신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독특한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 뛰어나거나 우리의 업적과 노력이 축적되어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에게는 우리 대신 이러한 짐을 대신 지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몸을 낮추셔서 우리에게 오셨고, 이 땅을 살만한 공간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개신교의 신앙전통에 따라 성서를 해석해 보면 인간의 선한 행위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하는 전제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일을 대신 행하여 주셨다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함으로써 오히려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에 대한 감사로 인하여 우리는 이웃에 대하여 선한 행위를 조금이나마 행하여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무엇을 했으니,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식의 조건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나 업적이 불충분하더라도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으므로, 항상 부족하지만 그것에 대한 감사의 응답을 다른 이웃에게로 돌릴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가복음 본문에서 율법교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반복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고,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다고 말입니다. 의미없는 형식적 종교의례보다 진정성을 갖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이 율법교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칭찬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성을 유지하는 통로가 바로 예배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배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포괄적 관계를 성찰하게 하는 시, 공간입니다. 독어로 예배는 합성어인데 하나님에 대한 봉사, 즉 Gottesdienst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일요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예배는 일요일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위스 종교개혁자 칼빈의 사상에 따르면 이 세상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관계가 잘 설정되고 이웃에 대하여 서로가 섬기는 봉사를 하는 것이 곧 일상적 삶 가운데 우리가 평일에 드리는 예배의 일환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즉 예배와 봉사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달 말에 세계 교회협의회 총회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리게 되는데, 이 에큐메니칼 총회의 주제가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라는 간구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전 세계 349 교단과 교파의 연합체인데, 바로 그 연합과 일치의 활동을 통하여서 우리는 2000 여년되는 세계교회의 전통, 사도들의 행적 그리고 전 세계의 구름과 같이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들과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많은 교인들은 에큐메니칼이란 단어 자체의 뜻 자체도 모릅니다. 이 말뜻은 여러분 잘 아시는데로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어원은 여러분 잘 아시는데로 오이코스라고 하는 희랍어,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 우주 전체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집 안에 사는 우리가 살림살이를 어떻게 잘 꾸려 나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숙제입니다.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잘 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경세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몫, 우리에게 주어진 그 엄청난 숙제를 감당하기 위하여서 우리가 연합하여 함께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교회의 연합 운동, 기독인의 연합운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나만이 옳다고 하는 독선을 내려 놓고 상대화 될 수 있는 것을 절대화하지 않는 곳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다름과 다양성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장로교의 뿌리가 되는 스위스 종교개혁에도 철저히 스며있던 정신이었습니다.
경동교회의 설립자 강원용목사님은 이러한 범 세계적 교회의 연합과 일치 운동에서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한 경동의 전통은 박종화 목사님께로 이어져서 이번 총회 전체를 총지휘 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이끌어 나가십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우리가 자족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21세기에는 어떤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한 지도력만 갖고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상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고 대중화, 보편화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생활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에큐메니칼 정신을 실천해야 됩니다. 그 한가지가 바로 이웃의 개념을 확대하며 그 지평을 넓혀 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지구 위에 초대되어 살아가도록 허락된 손님입니다. 그래서 나만, 우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도 이곳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여기에서 나 혼자 편하고자 취하는 행동과 나의 무관심이 이후 이 지구 위에 살아갈 사람들, 특별히 지구 남반구의 사람들의 삶을 더욱 곤경에 처하게 하고 피폐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구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닐 불롬캠프 감독의 영화 엘리시움에서 처럼 극소수의 부유층, 특권층만이 잘 살수 있도록 마련된 편파적인 인공위성이나, 유토피아적 공간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수가 고통 당하고 소수만이 안락함을 향유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잘사는 하나의 세계, 연합된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책임을 부여 받았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 빛 아래서 자기자신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가 속한 환경을 변화시키는 일에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터전인 경동교회는 선린 형제단으로부터 비롯된 바로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가장 큰 계명을 부여잡고 그 정신을 구체화하고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곳에서 신앙적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하는데 우리 경동교회의 교우 여러분들이 각자의 삶에 자리에서,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의 화해된 삶을 위하여 늘 자기 자신과 주변을 변화시키고 개혁시키는 일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이기적이며 개인적 구원의 차원만 추구하며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성이나 온정적 사랑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피조물과의 수평적인 구조적 관계성, 즉 사회적 구원의 차원도 아울러 고민하면서 신앙생활의 균형을 이루어 나갈 수 있겠습니다. 죽은 문자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에게 가득 임하셔서 가장 큰 계명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 자연과 화해된 삶을 사시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