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8:13,18-22
노아가 육백한 살 되는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 땅 위에서 물이 다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니,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을 데리고 나왔다. 모든 짐승, 모든 길짐승, 모든 새,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바깥으로 나왔다. 노아는 주님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집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서,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주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 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아멘.
고린도후서 3:3-5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아멘.
마가복음서 10:17-21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아멘.
설교문
성가대 찬양 감사드립니다. 교회에서 설교하거나, 찬양하거나, 기도할 때에도 이해를 위해 편의상 제목을 적어놓습니다. 모든 제목에는 세 글자, 바로 “하나님”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앙 세계에서 어떤 말을 하든지, 그 중심은 항상 하나님입니다. 세상 역사가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 이야기는 항상 같이 있어왔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인 모세가 십계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분이십니다. 너무나 고마우신 이 분은, 오직 한 분이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은혜가 풍성하시고, 무슨 수식어를 써도 부족한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묻습니다. “아무리 그런 분이시라 해도, 이름은 알고 그 분을 믿었으면 좋겠다.” 당연한 욕구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우리말도 있듯이, 이름 없는 사람도, 제목 없는 사건도 없습니다. 모든 인류역사의 큰 제목은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 때문에 그 분이 만드신 사람이 있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때문에 우주와 자연이 있지요. 모세가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뭐라고 칭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도나이, 당신 이름이 뭡니까.” 아도나이는 히브리말로, 주인양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이 분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야훼” 또는 “여호와.” 우리가 하나님을 표기할 때 히브리 자음 4개 “YHWH”만 사용합니다. 옛날엔 자음밖에 없고 모음이 없었습니다. 그 말이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데 모음 없이 자음만 있었으니, 나중에 사람들이 아도나이, 주님이라는 모음을 붙여서 야훼, 여호와가 된 것입니다. 당시 정확히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말씀하신 그 뜻은 이렇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나다. 이름 묻지 마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라고 하면 편합니다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해서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 이름은 아닙니다. 한 분 밖에 안 계신다고 해서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것 역시 하나님 이름이 아닙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기 미안해서, 그냥 하늘에 계신 분, 하나뿐이신 분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우리가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옳다, 하느님이 옳다는 논쟁은 무의미합니다. 이름 석 자, 편의상 부르는 이름 가지고 하나님을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다. 나에게 이름 붙이지 마라.”
“나는 나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내가 나라는 말은, 네 앞에서 하는 말이다. 너는 내 피조물이고, 나는 네 창조주다. 나는 나다. 너는 나의 너고, 나는 너의 나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분은 자기 이름을 어떻게든지 표현하기 원치 않으십니다. “피조물인 사람인 너와 나는 피조물과 창조주다.” 너와 내가 합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말씀을 통해서 주실 때, 항상 네가 있어서 나를 나라고 얘기하지, 네가 없는 나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땅에 있는 사람 때문에 하늘에 계신 것입니다. 세상과 사람을 만드시고서 참 좋다고 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다. 내가 나인 것은 너 때문이다. 너 인간은 하나님 때문에 인간이 되었다. 그러니 너와 나는 하나다. 그런데 네가 그렇게 죄를 짓고, 나를 떠나고, 너와 나의 관계를 단절하면 어떻게 되느냐.” 이것을 성경에서는 죄라고 합니다. 잘못을 범한 것을 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용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관계, 하나님을 보고 나라고 부를 구 없는 관계. 하나님은 인간을 나의 분신인 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신인 네가 나를 떠나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후회하십니다. “사람이 너무 죄를 지으니, 차라리 창조하지 말걸 그랬다. 창조한 인간이 나를 떠나서 나는 나다는 명제가 성립이 안 되게 생겼으니, 이제는 내가 만든 모든 인간들을 다 없애버려야겠다. 그리고 인간이 함께 놀라고 만든 동물들, 먹고 마시라고 준 모든 것들도 다 함께 없애겠다.” 하나님이 화가 나셔서, 후회의 결과로 만드신 사건이 바로 노아의 홍수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노아가 배를 하나 지어서 사람 몇 명 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분노하고 후회하셔서 모든 인간과 생명을 다 없애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너는 없고, 홀로 나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를 통해서 짝으로 몇몇 사람과 생물들을 같이 살아남게 하십니다. 홍수가 끝나고 배가 산 위에 올라섰습니다. 그 산 이름은 성경말씀에 아라랏산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산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중에 고고학자들이 연구를 해봤더니, 터키 북쪽에 있는 아르메니아라는 나라의 산꼭대기에 갔더니, 노아의 방주로 추정되는 잔해가 있다고 하여 후대에 이 산을 아라랏산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아를 같은 조상으로 섬기고 있는 이슬람에서 고고학 연구를 해서 아라랏산은 본래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라랏산의 위치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후회하셔서 인간과 생물을 멸절하셨고, 그것이 여호와, 나는 나라고 한 사람의 진면목이라는 것입니다. 물이 다 빠지고 나서 노아의 집 식구와 모든 생물을 내보내신 다음에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십니다. “앞으로는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나를 떠났다고 해서 생물과 인간을 멸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지개로 약속의 표시를 하십니다. “인간이란 본래 잘못을 하기로 되어있다는 걸 내가 안다. 잘못을 가지고 내가 인간을 멸절하지 않을 테니, 인간들이여 잘못을 그냥 품고 살지 말고, 잘못을 잘못했다고만 하면 내가 용서해서 다시 끈을 이어가겠다.” 그런데 인간이 또 그 약속을 하도 안 지키니, 한참이 지난 후에 하나님이 결단을 합니다. “내가 직접 피조물인 인간이 되어야겠다.” 그래서 2000년 전 12월 25일 아침,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바로 그 분이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죄 지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셔서, 인간이 지은 죗값을 직접 자기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인간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나를 믿으면, 사람이 된 하나님, 나의 분신인 그 사람, 나와 함께 영과 육을 나눈 그 사람 예수를 믿으면, 그 예수로 인해서 그대들의 죄를 사하겠다. 대신 죽음을 넘어서 나와 함께 생명 나라의 일꾼이 되자. 영생의 축복을 너희에게 주마.”
그래서 어느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영원한 생명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에게 질문하니 이렇게 물으십니다. “모세가 받은 열 가지 계명을 다 지켰느냐?” 그러니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토색질하지 않고, 부모 공경했습니다. 5계명부터 10계명까지 6가지를 다 지켰는데도 왜 영생의 확신이 없냐고 물으니 예수가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가 모자라서 그렇다. 네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날 따라와라.” 예수께서 여기까지만 설명하시고, 부자 청년은 재산이 많아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되어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 분노하시고 후회하셨던 그 분은 오늘 부자 청년을 보고 예수님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재산 팔아서 주고 날 따라와라. 그것이 영생 받기 위해서 부족한 하나이다.” 하나님은 부자 청년의 재산을 시샘하신 걸까요? 하나님은 영적인 축복만 주시고, 육적인 축복을 인간에게 허용하지 않으셨나요?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시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모든 백성이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건 부모공경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것을 지키는 걸로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십계명을 주신, 나는 나라고 하신 본질인 그 분을 저희들이 모시고 사는 것이 십계명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고, 우상 섬기지 말고, 그 분의 이름도 더럽히지 말고, 그 분의 이름을 빙자하여 엉뚱한 짓도 하지 말고, 하루는 그분을 위해 예배하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이 보시기에 첫 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를 지키지 않았거나, 너무 형식적으로만 지켰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던 것입니다. “근본인 이 하나가 모자라니, 이웃사랑도 좋지만 가서 하나님 사랑, 하나님 예배를 하는 것으로 인생을 바꿔라. 근본을 바꿔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우리는 부활 이후를 사는 사람들이니 그 의미를 다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후회하신 분도, 시기하신 분도 아닙니다. 모든 영적, 물적, 피조물에 해당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다 즐겨라. 그런데 즐기는 인간의 바탕만 하나님의 신앙으로 바꿔라. 그 위에 육도, 영도, 물질도, 재능도 다 넣고, 그리고 하나님을 접해라.” 율법주의는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자신이 생각하는 율법만이 제일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만 있으면 모든 사람이 축복을 받고 하나님 나라, 영생의 나라의 시민이 된다고 선포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하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사해주시려고 오셨고, 우리가 죄 사함 받고 다 끝난 다음에는 우리를 다시 영생의 나라, 하나님 본래의 품성을 닮은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축복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된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 구원받으며 살아가야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의미를 아주 잘 파악하고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담은 것이 성경책입니다. 이 책은 종이에 그냥 쓴 글자가 되어서, 사람들이 읽고, 분석하고, 파악하고, 의미를 캐내고, 참 좋다고 감동을 받는 그런 책만이 아닙니다. 그런 책은 먹물로 쓴 글씨일 뿐이고, 이 책은 하나님의 혼으로 쓴 책입니다. 읽고 파악하는 것으로 끝나는 책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야 할 책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담은 성경책은 사람이 깨닫고, 연구하고, 소위 인식하고 파악할 책, “인식론”의 대상인 책이 아니라, 말씀대로 느끼고, 살고, 호흡하고, 먹고, 마셔야 할 책이라는 말입니다. 인식 정도가 아니라 살기로 고백하고, 고백적 행동을 해야 할 책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개념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나와 일상에서 자나 깨나 함께 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있으면 당연히 살인, 간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도둑질도 안 합니다. 도둑질은 하나님이 떠날 때 생기는 사건입니다. 인식론의 대상인 하나님이 아니고 고백의 주인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말씀을 읽고 은혜 받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은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즘 언론에서 이렇게 많이 말합니다. 기독교가 성장을 많이 하다가, 요즘에는 목사부터 시작해서 기독교인들이 형편없이 행동하니 교회의 성장이 멈췄다고요. 솔직히 고백합시다. 예수가 싫어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싫어서 교회가 나락에 떨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현실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미 2000년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격이, 삶이,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이 편지를 보고 감동을 해야죠. 썩은 편지를 보고 누가 감동을 하겠습니까. 내가,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살아있는 편지입니다.” 살아있다는 말은 항상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사죄함 받을 수 있고, 실패했지만 다시 살 수 있고, 절망했지만 희망을 끌어안을 수 있듯이, 살아있다는 말은 바뀔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난으로 태어난 것이 죄입니까? 가난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죽었습니까? 가난을 통해 오히려 인생의 새로운 경험을 학습하고, 가난 덕분에 오늘 이렇게까지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모두가 그랬습니다. 가난 때문에 죽지 않고, 가난 덕분에 다시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가 금융위기에도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위기 때문에 망했습니까? 금융위기 덕분에 다시 딛고 일어나서, 새로운 여건이 만들어졌습니까. 혹시 아프신 분, 계십니까? 아픔 때문에 죽었습니까? 아픔 덕분에 운동도 하고, 약도 먹고, 음식도 잘 먹고 건강을 찾았습니다. 실패한 경험 있으시지요? 실패한 경험 때문에 망했습니까? 실패 덕분에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의 우리가 되었지 않습니까. 저는 세계 인생의 역사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사건을 가지고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서 그것 “때문에” 무너지거나, 그것이 디딤돌이 되어서 그것 “덕분에” 다시 딛고 일어서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대들이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나와 함께 있으면 잘못을 이실직고 하고 새로운 삶을 받아라. 그래서 내가 살았다고 선언하라.” 제대로 살고 싶으시지요. 그러면 다시 일어납시다. 주님이 모든 것을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감사드리고, 십자가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으니 다시 일어납시다. 십자가 덕분에 부활이 있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영원이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 고난 덕분에 부활의 역사가 생겼습니다. 우리의 잘못 덕분에 회개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움직이는, 생동하는 편지 자체입니다. 감사하시고 찬양하십시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