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교회] 세상나라-하늘나라

2013년 11월 17일 주일예배 설교자 박종화 목사

▲박종화 경동교회 담임목사 ⓒ베리타스 DB
성경본문
  
창세기 18:23-24, 31-33 
아브라함이 주님께 가까이 가서 아뢰었다.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 버리시렵니까? 그 성 안에 의인이 쉰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 성을 기어이 쓸어 버리시렵니까? 의인 쉰 명을 보시고서도,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아브라함이 다시 아뢰었다. "감히 주님께 아룁니다. 거기에서 스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스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또 아뢰었다. "주님! 노하지 마시고, 제가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신 뒤에 곧 가시고,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아멘. 
 
베드로전서 2:11-17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적 정욕을 멀리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들은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주님을 위하여 복종하십시오. 주권자인 왕에게나, 총독들에게나, 그렇게 하십시오. 총독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게 하려고 왕이 보낸 이들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모든 사람을 존중하며, 믿음의 식구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십시오. 아멘. 
 
요한복음서 15:18-21, 26-2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그의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내 이름을 믿는다고 해서, 이런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아멘. 
 
설교문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제 밤 성경을 읽는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시나요?"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 지금 옆에 있잖아"하시는 거에요. 안보이셔서 어디 계시나요 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네 안에 있잖아". 평소에 듣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옆에 계시고, 제 안에도, 우리들 안에도 계신다는 그걸 제가 잠시 잊었습니다. 
 
우리는 좋은 책 구입해 열심히 읽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격적인 순간은 글을 쓴 저자의 마음과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의 마음이 하나로 통해 서로의 마음으로 대화를 할 때입니다. 대화는 사건을 만들어 냅니다. 이 대화가 엄청난 생명의 희열을 느끼게 합니다. 때로는 대화 내용이 아주 슬퍼 서로 눈물을 보이기도 합니다. 성경말씀도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을 만드셨다고 하는데, 이 두 피조물이 서로 평행선을 달리게 되면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다투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과 여가 만나면 이 만나는 지점에서 사건이 생기고,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소리를 창조하셨고, 그 소리를 남성이 부르며 내고, 여성이 내고 부릅니다. 소프라노, 앨토, 테너, 베이스 등이죠. 이 하나님이 만든 소리가 서로 만나면 아름다운 찬양이 됩니다. 그리고 그 찬양은 감동을 자아냅니다. 만남, 이것이 역사의 핵심입니다.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말씀을 읽고, 듣는 우리가 서로 만납니다. 그 장소가 우리가 생활하는 생활공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디선가 하나님과 만납니다. 만남이 없으면 그냥 평행선을 달립니다. 그러나 만남이 있는 곳에는 웃음이 있고, 슬픔도 있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역사가 형성됩니다. 성경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만나서 이루어진 사건이야기. 그것이 성경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모습과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만남 없이 읽으시면 재미없습니다. 만남이 있어서 감동이 있고, 감동이 있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만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그럴 때 먼저 만나로 오시러 오는 분은 항상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이십니다. 
 
오늘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은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을 만나러 오십니다. 하나님 나라, 사람 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둘은 만나야 합니다. 운명이 아니라 그것이 역사입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만남에 대해 오늘 창세기 말씀에서는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천사 둘과 사람으로 변장하여 아브라함을 방문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 사람을 보고, 손님이 오셨다고 생각하고 극진히 대접합니다. 밥도 하고, 송아지도 잡습니다. 극진히 대접하는데 대화의 말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내가 내년 이맘때 다시 오마. 그때는 너의 90살 난 아내 사라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다.” 하십니다. 천천 병력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라가 비웃습니다. 나 같이 나이 많은 여자에게 아이가 생기다니 말도 안 된다 하며 웃습니다. 그 광경을 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그대의 아내가 지금 웃었네. 하나님이 사라에게도 웃지않았느나고 묻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웃은 일이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아니 사라가 웃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의 표정은 어떤지 아십니까. 나도 웃었다야. 하나님은 웃는 얼굴로 오셨습니다. 그후 1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그 모습으로 직접 오시지는 않았지만, 약속 하신 것처럼 사라가 아들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의 이름의 의미가 "그는 웃었다"입니다. 1년 전에 엄마가 웃었고, 하나님이 웃었더니 아들 이삭이 태어나면서 이삭도 웃었읍다. 만남의 모습은 웃는 모습입니다. 하나님도 웃고, 엄마도 웃고, 아빠도 웃고, 아들도 웃습니다. 웃음의 역사가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방식입니다. 웃었더니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는 것은 역사의 생명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만나면 생명이 태동합니다. 밝아서 웃습니다. 웃음이 가슴으로 오면 감동이 됩니다. 우리는 웃고 삽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웃고 삽니다. 세상은 밝습니다. 그렇게 여러분 하나님 만나고 사십시오. 이것이 오늘 창세기의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나고 나서 함께 동행 했던 두 천사에게 부탁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사는 동네로 가보아라. 그곳은 또 다른 동네입니다. 그 동네 이름은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두 천사가 가보았습니다. 룻도 손님을 맞아 아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밤에 두 천사가 롯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동네에 (성경말씀대로 하면) 젊음남자 그리고 나이든 남자가 모두 찾아와 대문을 두들기며 두 남자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롯이 대답합니다. 차라리 아직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을 데려가라. 두 남자를 내어 줄 수 없소. 소돔과 고모라의 비극 중에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 두 남자를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뿐만 아니라 이미 천지 창조 때부터 이런 호모 섹스의 사건이 있어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얼마나 타락하고, 하나님께 밑 보였는지 알 수 있는 한 표본입니다. 하나님이 롯을 통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천사를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 동네를 멸망시켜야 하겠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 동네에서 아직 순전한 의인 50명만 있으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45명이면 되겠습니까? 자꾸 협상해 내려갑니다. 40명이 되겠습니까? 30, 20, 아니 마지막입니다. 10명이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러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10명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의 길로 갑니다. 롯이 울며 호소합니다. 다만 하나님은 롯의 간절한 소원을 받아 롯과 두 딸은 건져내셨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희생되었습니다. 롯의 아내까지도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롯은 지치고, 지쳐서 울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도 슬퍼서 우셨을 것입니다. 울음이 노아의 방주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우는 곳에서 하나님도 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는자들과 항상 같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우는데 울지 않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옛날 구약성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폭풍을 통해서. 낙뢰를 통해서, 홍수를 통해서,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구요. 그것에 보이지 않지만 사건을 통해 임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방식이며, 우리와 만나는 방식이다라구요. 하나님은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나타난다"는 말을 "파니아" (phania)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테오파니아(Theophania, 신현)입니다. 폭풍 속에서, 낙뢰 속에서 나타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서우신 분, 전능하신 분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이렇게 나타나도 사람의 변화가 없고, 하나님이 우셔야 한다면 하나님은 결단을 바꾸십니다. 자 이제는 폭풍으로 나타나지 말고, 사람으로 나타나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그래서 하나님이 결단합니다. 그 결단은 우리가 축하하는 12월 25일 아침 나타나셨읍니다. 성탄입니다. 하나님은 파니아 하시는데 땅 위에 사건으로, 땅 위의 인물로 나타나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주현절(Epiphania)을 지키고 기념합니다. 하나님은 비상한 상황으로 나타나시고,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십니다.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신 이후에는 이상한 신의 개념이 아닌 사람과 같은 인격과 혼을 가진 "인격적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셔서 같이 우시고, 같이 웃으시며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이삭이 태어날 때 하나님은 너무 좋아서 웃으셨지요. 이삭도 웃었습니다. 그 주변은 맑은 햇살, 아름다운 공기, 신선한 태양, 웃음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때 물로 다 멸망했습니다. 그 물 속에는 죽어가는 사람의 눈물이 담겨있었고, 하나님의 눈물도 담겨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의 역사! 그것이 죽음이지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행복하면 웃음을 웃습니다. 웃음의 역사! 그것이 생명이지요. 부활생명의 역사입니다. 이 모든 역사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로 만나로 오시고, 인간을 만나러 오신 방식입니다. 그래서 웃음도, 눈물도, 기쁨도, 슬픔도 같이 필요한 것이 우리의 만남의 역사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창세기를 넘어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사람마다 눈물을 흐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웃음을 선사해줄 사람을 보냅니다. 이 변화의 사건을 만드십니다.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모든 국민은 울었습니다. 죽었습니다. 이 때 저 멀리 16개국에서 군대를 파송해주었읍니다. 다른 5개국에서는 의료장비와 시설지원을 해주었읍니다. 오늘 우리는 필립핀을 위해 수해헌금을 계획하고 있읍니다. 필리핀이라는 나라에서는 7천420명의 육군이 왔습니다. 통계만 인용하면 연대 규모보다는 크고, 사단 규모보다는 작습니다. 엄청난 군대입니다. 60년 전이니까 큰 힘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를 위해 전쟁하다가 170여명이 전사했습니다. 300여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 우리를 구해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 16개국과 시설과 의료를 지원해 준 5개국을 포함해 총 21개국이 우리나라를 전에는 어떤 나라인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의 손길을 주었습니다. 저는 이번 WCC 총회를 진행하는 가운데 여러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데, 우리 전체 국민이 눈물 흘리고 하나님께 호소할 때 우시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통해서 도움의 손길을 베풀게 하시는구나 하며.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움을 받을 때 밑 빠진 독에 물이 빠지듯이 그런 도움이 아니고 우리스스로가 도울 수 있을 때 까지 우리를 도왔습니다. 저는 그렇게 도음받았다고 믿습니다, 스스로 도울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필리핀, 우리를 도와 준 나라인데 지금은 참 어렵습니다. 이번 태풍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어떻게 도와 줄 수 있습니까? 그 나라와 국민이 스스로 일어 날 수 있도록 작지만 큰 정성으로 도와야 합니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경험을 하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독일교회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교회를 돌아다니며 헌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독일은 이미 세무서를 통해서 매달 보통 소득세액의 9 - 10를 별도로 "종교세"로 납부했기 때문에 주일 날 헌금을 잘하지 않습니다. 보통 교회 뒤편에 마련되어 있는 헌금 통에 동전을 넣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 사람인 제가 설교를 하고나면 그날은 한국교회 어려우니 돕자며 특별헌금을 합니다. 하지만 동전헌금이 없습니다. 모두 지폐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이웃이 오면, 고난당하는 이웃이 오면 더 정성을 모아 헌금을 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노라고 표현합니다. 저희 나라가 7.80년대 곤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독일교회로 부터 도움을 받아서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한 가지 마음의 결의가 생겼습니다. 일상적으로 도울 때는 동전으로 도우세요. 딸깍딸깍...하면서. 허나 조금 더 생각하고 도울 필요가 있을 때는 지갑을 열어야 한다. 소리 나지 않는 지폐로 도와야 한다. 동전의 마음도 감사하지만, 동전의 마음을 넘어서는 지폐의 가슴은 더 아름답다고 말이죠. 
 
저는 오늘 돈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때 동전의 마음으로 사랑해도 훌륭합니다. 조금 더 가슴을 열고, 지갑을 열어서 지폐의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훨씬 더 아름다룰 것입다. 찬양을 하거나, 기도하거나, 봉사하거나, 세상을 향해서, 하늘을 향해서 무슨 일을 할 때 동전의 마음으로도 똑같이 좋은 것을 드릴 있습니다. 하지만, 한발짝 더 멀리, 한 발짝 더 깊이, 한 단계만 더 높게 마음을 쓰며 도울 수 있으면, 하나님도 함께 울다가 함께 웃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을 만나려면 조금 더 깊게, 조금 더 진지하게, 조금 더 사랑스럽게 시귀며 또 그렇게 만납시다. 사람을 만나며 살아가는 이 세상, 살아가는 인생길을 오늘 베드로전서는 "나그네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뜻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만든 상품도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나 홀로 소유 할 수 있는 사유물이 아닙니다. 내 생명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이런 뜨일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 목숨은 공유의 산물입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과 내가 함께 누리는 공유품인 생명입니다. 제 가진 모든 것은 제가 하나님과 함께 쓰는 공유의 은혜요, 공유의 산물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생명과 일상을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면서 기쁨으로 맛보며 오늘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역사는 공유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이곳에 계셔서 반드시 함께 우십니다. 반드시 함께 웃으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신앙이요, 신앙의 기쁨으로 우리가 매일매일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과의 만남이 없는 홀로가는 모노레일의 삶의 역사일 뿐입니다. 아니면 두 트랙으로 각자 달려서 선로처럼 평행으로 만남없이 살다가 그냥 손가락질 하며 살면 됩니다. 허나 만나고 싶으면 그 분과 함께 우세요. 함께 웃으세요. 공유하세요. 나그네로 살아가는 여러분, 공유자로 살아가는 여러분. 이제 진실로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오늘 베드로 전서 본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신한테 성실하게 봉사하십시오. 그는 함께 하는 우리들에게 성실과. 인내를 은혜로 베풀겠답니다. 자유는 먼저 나 자신에게 책임지는 자유입니다. 동시에 내 앞에계시는 하나님께 책임지는 자유입니다. 종교개혁때 마르틴 루터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산다고 하는 사람은 이중적 자유인이랍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 대해서 철저하게 봉사하며 무릎 꿇는 자유고, 동시에 하나님이 아닌 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저항하는 자유입니다. 저항, 분노의 자유와 성실한 섬김의 자유가 두 가지가 신앙의 자유가 지닌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승복하며, 그 분께 영광 돌리면 참 인간의 모습이 들어납니다. 하나님은 웃으십니다. 하나님이 웃으시면 우리는 행복한 웃음을 같이 웃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시면 우리의 인간의 역사가 불행해서 함께 우십니다. 
 
이 사실을 알면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울음과 웃음으로,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 속에, 우리의 삶의 역사 속에서 울고 웃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보십시오. 그래도 안 찾아지면, 요한복음의 말씀대로 말해서, 확신이 없으면, 조금만 기다리세요. 들어보세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기도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담은 분을 여러분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분의 이름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아버지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의 가슴을 제 가슴으로 연결시켜주십니다. 성령을 받으세요.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대화를 한다는 뜻입니다. 만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만나게 하시는 분이신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설명해 드리고, 축복을 전해 주시고 일상에서 함께 역사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서 울음의 역사인 십자가의 역사를 함께 하셨습니다. 인간이 짊어져야 할 울음과 분노의 역사를 십자가에서 다 받으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은 자기 본래의 창조역사를 내놓으십니다. "나는 생명의 하나님, 죽은 자도 살리는 하나님, 울음을 웃음으로 바꿔 주시는 하나님, 울음 속에서 함께 웃음을 찾자. 함께 죽자. 십자가 사건이니라. 함께 살자. 부활사건이니라". 이 두 가지를 일상의 역사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경험하십시오. 오늘 성령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울며, 웃으며, 그렇게 복되게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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