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이 말씀은 사람은 각자 하루 하루 할 일을 충실하게 해서 각자 자기 생존의 책임을 져야하지만 내일 살아갈 일까지 걱정해서 수입(돈)을 더하기 위하여 근심함으로써 자기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포도원 비유에서는 주인이 일꾼들에게 노동 시간의 차이에 따라 임금을 지불하지 말고 일꾼들이 그날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일삯을 지불해서 그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바울 사도의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도 사람은 일을 해서 자기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지라는 말로 해석된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바울의 교훈을 종합해 보면 매일 열심히 일해서 자기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되 돈(물질)을 벌기 위해서 일하느라고 노동 노예가 되거나 자기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것과 고융주는 노동자의 생존을 보장해 줄 책임이 있으므로 일꾼들의 노동을 착취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노사문제와 분배문제와 복지문제 등등 복잡한 문제가 서로 얽혀있다. 사람은 여러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어떤 정신으로 일을 하느냐가 공통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일은 개개인의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국가와 사회와 인류공동체를 위한 일이기도 하여 개인의 일(노동)의 과실이 단지 개인의 생존 문제의 해결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게 되어있다. 약자와 무능자와 병자와 노령자의 생존문제도 해결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세 사람이 각각 다른 양의 돈을 받았는데 두 사람은 열심히 해서 이익을 남겼고 한 사람은 게을러서 이익을 얻지 못해 주인에게서 책망을 받았다는 말씀이 있다. 이 중 유익을 남긴 사람은 그것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도 있게 될 것이다. 사람은 생래적으로 각기 다른 천부의 재능을 가지고 그것으로 일해서 자기의 생존의 책임도 질 수 있고, 또 타인 곧 이웃에 유익이 되는 일도 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올바른, 즉 선하고 정의롭고 책임성 있게 일해야 할 것인데 이것을 직업윤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이 직업윤리를 단순히 인간의 사회적 의무 이상으로 하나님의 소명 또는 명령으로서 그의 천지창조의 한 설계(디자인)에 속한다고 풀이했다. 그는 땅에서는 식물이 자랄 수 있게 만드시고 농부는 농사해서 얻는 수확 곧 양식과 채소를 잘 가꾸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하도록 만드셨고, 바다에서 사는 온갖 종류의 어류를 만드셔서 어부들은 그것들을 잡아서 사람들에게 공급하게 하셨고, 상인들은 그 생산물을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물건을 유통시키는 일을 하게 하셔서 공중나는 새 같은 사람들이 농사하지 않아도 먹고 살아갈 수 있고 들에 핀 백합화와 같은 사람들이 길쌈을 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입을 수 있게 하셨다는 말이다.
루터는 말하기를 가뭄이 심한 곳에 곡식공급이 시급한데 상인이 곡식값이 오르기까지 곡식을 가져가 팔거나 공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 또는 명령을 어기는 죄라고 말했다. 칼빈은 당시의 제네바 시민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게으름을 피우거나 놀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고, 소득을 낭비하지 말고 저축하라고 했다. 또 여유가 있는대로 남에게 후하게 주라고 말했다. 이것은 직업이 하나님의 소명임을 일깨운 것이었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존 웨슬리도 칼빈처럼 그 세 가지를 강조하고 고융주가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지 말고 노동시간도 일정하게 정하고 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한 후생사업을 하도록 운동했다. 특히 그는 고용주들이 어른들 대신 아동들에게 일하도록 만들어 임금을 적게 주어 이익을 남기려는 악풍을 공격했다.
창조자 하나님은 인류가 자기의 피조물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시고 동시에 모든 사람의 생명과 생존의 공생과 함께 공동책임을 가진 천직을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