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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화 경동교회 담임목사 ⓒ베리타스 DB |
이사야서 63:15-19
하늘로부터 굽어 살펴 주십시오. 주님이 계시는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곳에서 굽어보아 주십시오. 주님의 열성과 권능은 이제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나에게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도, 오직 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옛적부터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속량자`이십니다. 주님, 어찌하여 우리를 주님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셔서, 주님을 경외하지 않게 하십니까? 주님의 종들 곧 주님의 유산인 이 지파들을 보셔서라도 돌아와 주십시오.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 주님의 성소를 잠시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우리의 원수들이 주님의 성소를 짓밟습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주님의 다스림을 전혀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하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5:7-8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누가복음서 21:25-28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서 징조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서 괴로워할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일들을 예상하고, 무서워서 기절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을 띠고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일어서서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구원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문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축복을 주시는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를 보아라. 그 새를 누가 기르는지 모르지만 잘 살고 있지 않느냐? 하물며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그대로 둘 것 같으냐?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시죠.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사람이 제일 영장입니다. 동물, 식물, 바다와 하늘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합니다. 새는 사람보다 훨씬 열등합니다.
제가 읽은 새에 관한 기록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솔개라는 새입니다. 독수리를 닮은 새입니다. 솔개의 수명은 70~80년 이라고 합니다. 사람만큼 오래 삽니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 살기 위해서 솔개는 큰 변화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솔개는 부리로 먹이를 찍어먹습니다. 날아 다녀야 하니 날개가 강해야 합니다. 먹이를 발로 낚아채야 하니 발톱이 아주 강해야 합니다. 그런데 40년이 지나면 발톱이 망가지고, 날개는 낡고, 부리는 꼬부라집니다. 이렇게 되면 솔개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못 먹기 때문입니다. 솔개의 지혜는 이렇합니다. 40년이 지나 더 이상 거동이 힘들면 산에서 제일 높은 바위로 올라가 한 달 동안 고뇌의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바위에 부리를 찍어 부리를 망가뜨리면 새로운 부리가 나온다고 합니다. 날개의 털을 하나씩 뽑으면 새로운 날개가 난다고 합니다. 발톱도 망가뜨리면 새 발톱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달 동안 각고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부리도, 발톱도, 그리고 날개도 새롭게 나와 새로운 40년을 산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조류학자의 연구결과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에게도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음식을 가져다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리를 주시고, 날개를 주시고, 발톱을 주셔서 열심히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노력하고 일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공짜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주지 않습니다. 솔개도 40년을 더 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합니다. 저는 솔개가 이렇게 고백할 것 같습니다. “내 몸은 완전히 망가졌다. 망가진 정도가 아니라 천지개벽했다. 내 각고의 과정동안 나는 몸이 떨리고, 발이 떨리고, 손이 떨리고, 입이 떨렸다. 이제 새로난 나에게는 하늘이 움직였고, 땅이 진동했다. 온 옜 세상이 다 망가지고 온정히 새로와진 것을 느꼈다.” 이렇게 고백할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소경이 왔을 때 소경을 보고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면서 모래에 침을 바르시고 눈네 가져다 대시며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소경이 나았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그냥 글로 읽지 마십시오. 소경의 철학과 사고방식, 생활방식 등 소경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눈을 뜨고나면 사고가 변합니다. 몸이 변합니다. 주변의 세계가 변합니다. 이렇게 소경의 삶도 완전히 변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하늘이 보이지 않았으나 이제는 하늘이 보입니다. 땅이 보이지 않았으나 땅이 보입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하늘과 땅이 완전히 진동했음을 압니다. "나는 이제 다시 산다"고 고백합니다. 이 사람의 변화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또 예수께서는 치유를 기원하는 앉은뱅이를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일어났읍니다. 세계의 변화, 인간의 변화, 모든 것이 변합니다. 하늘이 움직이고, 땅이 진동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 있는 산과 바다만 진동했다고 해서 진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 사상 등 사람의 모든 것이 변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오시면 하늘 세력들이 흔들리고 하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바다와 산이 온통 움직인답니다. 그 만큼 세계 변화가 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각자가 작은 하늘이요, 땅이요, 세계입니다. 작은 그러나 엄청난 우주입니다. 병자가 고침 받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우주가 뒤틀리고, 흔들린 사건인 것입니다. 이것을 만들어달라고 간구하며 또 그것을 확신하는 고백이 인간의 응답이요,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받으면 그 믿음이 온 세상을 뒤집어엎습니다. 우리는 우주입니다. 하늘을 향해서, 주님을 향해서 결단하고 믿으면 우주가 흔들립니다. 오늘 야고보서 본문이 말합니다. 이 시간에 주님이 오십니다. 그 분이 오시면 우주가 흔들린답니다. 그래도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시리랍니다. 새로운 역사와 새로 나는 삶을 경험하시죠. 오늘 성서의 말씀입니다.
구원의 때가 오면 이런 현상이 생깁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유념할 것이 하나있읍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오실 때 엄청난 변화가 있는데 참으며 인내하며 기다리십시오. 믿음을 굳게 하십시오. 흔들리면 안 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는 성경말씀은 그냥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랍니다.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똑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옵소서"라고. 하늘에서 행복하셨듯이 당신이 만든 인간들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계획하신 것 같이 땅에서도 그 계획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런 뜻이죠. 이 말씀을 근거로 살펴보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곧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사랑하게 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아 주님이 오시니 참고 인내하며 아픔을 견뎌라"는 그 말은 하나님이 우리 죄악 때문에 멸하고 싶었지만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 죄악을 참고 견딘 것처럼 그대들도 하나님의 축복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분노를 발하지 말고 인내하고 기다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하나님이 먼저 인내하셨듯이 인간들아 서로 인내해라.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고통 받으셨듯이 새날을 위해 이 땅에서 고통을 참고 기다려라. 이것은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하셨듯이 우리도 똑같이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었읍니다. 이집트에서 400년 종살이 후 출애굽 했습니다. 그후 가나안 땅에 오래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믿던 하나님은 해방의 하나님 곧 출애굽의 하나님이시요, 가나안 정착과 함께 시작된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살다가 하나님과 이제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많이 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됩니다. 그 심판이 바벨론 70년 종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고백합니다. 수백 년 굴욕의 역사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해방해 주신 하나님, 이제는 다시 하나님께 빌겠습니다. 우리를 바빌론 식민지 속박에서 다시 구원해 주십시오. 속량해 주십시오 라고.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 말씀에 "속량의 하나님을 우리가 찾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해방의 하나님 은혜로 오래 살았고, 이제는 그 분이 속량의 하나님이시길 바라며 살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오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처럼 온갖 죄악에서 해방시켜주십니다. 속량의 하나님이 오늘 이 땅에 평화를 주시려고 다시 오십니다. 이스라엘이 그 분 하나님을 기다렸듯이, 오늘 우리도 그 분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정말 오랫동안 참고 인내하고 기다렸습니다. 그 분의 아들을 보내시기 까지 말입니다.
최근 여러분께서 언론에서 본 것처럼 훌륭한 지도가 한 분이 하나님 품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 제가 만델라 대통령 이야기를 하려고 자세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은 백인이 통치한 나라입니다. 백인은 15이고, 흑인은 85 이지만 지난 350년 동안 흑백인종차별이 존재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은 소수의 백인이 350년 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흑인을 괴롭혔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백인들은 하나님이 "함"과 "야벳"처럼 본래 흑인과 백인을 따로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흑백차별이 하나님의 창질서라고 억지를 부렸읍니다. 백인의 우월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인종차별을 신학화하며 실천한 일로 인해 남아공 교회는 WCC로 부터 회원자격을 박탈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으로 전세계 회원교회는 흑인해방을 지지했습니다. 한때 WCC도 남아공 백인 정부로부터 크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왜 용공을 하느냐? 남아공 백인정부는 흑인을 지지하는 것을 용공, 공산으로 몰아갔습니다. 이렇게 WCC가 욕먹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흑인이 인종차별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흑인해방 운동의 선두주자이었던 만델라가 27년 만에 감옥에서 나오면서 흑인해방 운동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약속합니다. 흑인이 해방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해방정부가 들어서면 그 동안에 받았던 350년간의 핍박을 보복하지 않겠다.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겠다. 그 바탕 위에서 흑백이 함께 새 나라를 이루어 가자. 이것이 만델라의 선거공약이었고, 대통령이 선출 된(1994) 다음에 즉각 실행에 옮겼습니다. 실행에 옮기면서 과거사 청산 위원회, 곧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출범시키면서 이런 선언을 합니다. "나는 여러 색깔로 이루어진 무지개 나라를 건설하고 싶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이 나라를 만들려면 두 가지 철학인 필요한데, 하나는 용서고, 하나는 화해입니다. 과거를 향해서는 용서하고, 미래를 향해서는 화해합시다. 과거는 분명히 잊지않고 기억하겠지만, 이제와 앞으로는 용서하겠읍니다". 어려운 일인가요? 쉬운 일인가요?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시죠.
예수님 말씀과도 똑같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씩 용서해라. 그리고 승리하여 화해의 나라를 만들어라. 아마 이분 만델라 대통령은 예수님 말씀을 따라 그렇게 실천에 옮긴 것 같습니다. 제 판단입니다만, 그분의 신앙이 워낙 확실하고 좋아서 이런 정치적 법적 선언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당시 아무리 흑인 인구수가 많아도 무기를 들고 무력혁명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군사를 동원 할 힘도 없었읍니다. 무기도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용서하는 힘은 무력혁명보다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화해라는 힘은 엄청남 핌을 지니고 있고 온갖 갈등과 질곡이라도 이기고 남음이 있읍니다. 그리고 내적으로 힘있는자 만이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읍니다. 내적으로 승리의 힘을 가진자 만이 "화해"를 선포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읍니다. 그렇다고 이런 힘이 거져 양심과 도덕적인 자세 만으로 생길 수는 없읍니다. 용서하고 싶은 과거의 죄악을 잊을 수는 없읍니다. 아니 또 잊어서도 않됩니다. 그것은 과거로 부터 배워야 하는 교훈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훈에 머믈러 있으면 않됩니다. 용서를 통해 미래를 개척하고 새 생명으로 화해된 공동체의 삶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만찬에서 주님의 구원의 몸(=떡)과 구원의 잔(=포도주)을 먹고 마실때 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해라"는 말씀(고전 11:26) 을 감사하며 성만찬 예식에 임합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죽으심 속에서, 그 고난 속에서 부활희망이 나왔다는 것을 알아라는 뜻입니다. 공짜로 부활 된 게 아니라, 죽고 죽음을 넘어서 부활 한 것입니다. 죽음의 고난 속에서 새생명의 기쁨이 나오는 것이지 그냥 앉아 있으면 저절로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솔개가 낡은 날개를 뽑아내고, 발톱을 뽑아내고, 부리를 찍어내듯이, 바로 이런 십자가 고통같은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부활의 역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총을 공짜로 받을 생각 버리세요. 십자가 고난 없이 부활이 없듯이, 고난의 회개 없이, 자기 변신 없이 축복은 없습니다. 복음의 기독교는 값싼 종교 아닙니다. 복음이 값싼 은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값지고 비싼 희생의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심으로 부활셍명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아주 값비싼 생명의 은총을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회개해라. 어렵지만 회개하고 새 날을 맞아라" 하십니다. 솔개는 다 자기신의 각고의 고통 속에서 앞으로의 40년 정도를 더 얻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영원무궁한 삶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다 서로 만나야 합니다.
제가 기록을 살펴보았더니 만델라 대통령이 흑인의 비폭력 승리, 용서의 승리, 화해의 승리를 하고나서 한국을 찾았더군요.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1995)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은 정말 아름다운나라다. 남아공과 한국을 바꿉시다"라 했다지요. 사람들이 많이 웃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한국이 좋았으면 그렇게 해겠습니까.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제 친구 한분이 독일의 아주 유명한 감독이신데 3천명쯤 등록교인이 있는 중심지 교회의 목회자입니다. 주일날 감독복을 입고 나와 설교를 하는데 3천명이 등록된 교회인데 잘해야 3백 여명 밖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이 없어서 힘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가 그분에게 1.2부 예배가 가득차고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는 경동교회 이야기 했더니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 감독직과 교회와 저의 목회직 및 경동교회를 서로 맞바꾸자고 합디다. 우스개 소리였지만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되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마 만델라가 이야기 했을 적에 우리나라 사람들도 청와대 만찬장에서 그 이야기 듣고 기분 되게 좋았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보면, 우리 백성은 감동할 정도로 우리 각자의 각고의 노력으로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남아공도 나름 그렇게 왔을 것입니다. 만델라 대통령한테 하나 배울 점이 있읍니다. 가장 최고의 승리는 용서를 통해서 하는 승리요 그런 승리가 역사상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 하나 만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힘은 무력의 힘이 아닙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힘이었습니다. 그 힘이 단순한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힘이라고 치부하지 마십시오. 그 힘은 완전히 복수와 분노를 이기고 승리해서, 굴복시켜서, 모든 사람을 예수의 제자로 만드는 힘, 곧 살리는 힘의 역사이고, 그 역사가 이 땅에 있어 왔습니다. 제가 참석했던 제 8차 WCC 하라레(짐바브웨) 총회(1997)에서 했던 만델라 대통령의 강연이 아직도 인상이 남습니다. 350년의 인종차별을 종식시킨 것은 "제가 아니고, 우리 흑인 운동도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WCC를 통해 외부의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헌신으로 협력해 주셔서 제가 이 자리에 서있을 수 있게 됨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Thank you, thank you very much!". 이 말씀을 듣고서 참석자 모두가 일어나 기립박수가 나와 한 동안 회의가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박수, 찬양, 감사, 아멘과 춤으로 총회장소가 온 통 뒤집어 졌는데요. 정말 하늘이 움직였다. 해와 달이 노래했다. 땅이 파도가 치고 일어났다. 오늘 성경말씀 그대로 당시의 느낌을 전합니다. 물론 흑인해방, 그것으로 하나님나라가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그런 새역사도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이런 역사의 한가운데서 역사하심을 보면서, 인간의 대결의 역사에서도 이런 해방의 감격이 이루어짐을 우리는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만나로 오십니다. 하나님이 오신다는 말은 놀러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러 오십니다. 만나면 대화를 해야 합니다. 만나면 말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종인가요? 주인과 종인이 만나러 오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고난 받으셨다는 말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자기 형상을 인간에게 준 이상, 하나님의 자존심을 인간에게 선물로 준 이상,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부분적이지만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이상,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동등한 파트너입니다. 절대적 파트너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간된 주인으로 대접해 주십니다. 신이신 주인과 인간인 주인으로 만납니다. 주인됨의 종류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주인 됨과 인간의 주인 됨은 다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종처럼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남의 두 종류가 있는데 둘이 만나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두 주인이 만나는 대화가 있다. 그때 두 사람의 이름은 "I-Thou"(나와 당신)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발로 짓밟고 착취하는 만남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I-It" (나와 그것)의 관계, 곧 "갑-을 관계"인데, 이런 관계로 만나면 둘사이의 진정한 대화는 없다. 용서도 없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와 당신이 만나면 그때 비로소 아름다운 대화가 성립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 적절한 분석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먹을 것을 숟가락으로 넣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손을 주셨잖아요. 팔을 주셨잖아요. 지성도 주셨잖아요. 감성도 주셨잖아요. 영성도 주셨잖아요. 왜 놀리고 계십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주인 된 의식을 가지고, 피조물로써의 주인이 되어서, 창조주인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는 그대들 만나고 싶고, 대화하고 싶다. I-Thou로 만나고 싶다. 나는 물건이 아닌 존경하는 당신으로 만나고 싶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물건 취급해서 it (그것)으로 부르지 않고, 물건으로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들"로 맞으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당신"으로 부르며 나아갑니다.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물건이 아닌 갑과 갑 관계가 되면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든지, 어디서든지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모여 뜻을 모았읍니다. 그런 하나님이 당신이라면 사람과 다른 당신 일텐데 그 앞에 다른 적절한 수식어를 붙요보자. 그래서 하는 말이 당신은 "영원한 당신" ( Eternal Thou)이랍니다. 이 "영원하신"이라는 말속에 여러 하고픈 표현이 다 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변치 않는, 스스로 우리 죄를 지시는, 희생하시는,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는, 새 새명을 주시는, 그런 당신은 영원하신 당신입니다라고. 우리도 그렇게 되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당신은 영원한 당신입니다. 영원까지 못하면 "영원을 닮은" 당신, 나도 "영원을 닮은" 나가 되고 싶습니다라고요. "당신" 앞에서 이 고백을 하시면 오늘 하나님이 떳떳하게 오십니다. "내가간다, 길 열어라!". 주님의 당부이십니다. 간다. 열어라. 내가 그대들에게 간다. 열어라. 맞으라. 여러분 오늘 그 분을 모시기로 "아멘" 하시기 바람니다. 그런 아멘의 날이 바로 대림절입니다. 아름다운 대림절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