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 St Augustine, 1639. |
에큐메니컬 모임에서 신에 대한 한글이름으로 ‘하나님’으로 할 것인가, ‘하느님’으로 할 것인가, 통일된 이름을 구하기란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하여, 하나님(하느님)을 병기한다. 개신교·가톨릭이 함께 참여한 공동번역은 ‘하느님’이란 이름을 받아들였고 ‘하느님’이란 이름이 국어학적으로 옳다는 국어학자들의 긴 해명을 읽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신학교 시절 조직신학 교수이셨던 故 윤성범 선생님께서 ‘하느님’이란 명칭으로 판서하셨을 때(아마 1977년 경) 마음으로 적이 놀란 경험이 있다. 곧 공동번역이 출간 되었고(1977년) 국어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하여 그 후 나도 ‘하느님’이란 이름을 즐겨 썼다. 그런데 1995-6년도 쯤 출강하던 모 신학대학 1학년 교양과목에서 무심코 ‘하느님’으로 판서했다가 한 학생으로부터 곤혹을 치룬 경험이 있다. 그 학생은 나이 많은 학생인데 ‘하느님’은 증산교와 동학 등 한국의 민속종교의 신명인데 당신은 그러한 신관을 갖고 있느냐고 일방적으로 화를 내며 질문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 학생은 교실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런 일은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가끔 신학교 교실에서는 일어나는 열정(열광)적 신앙의 분출이다. 이 일이 있은 후에 그 학교에서는 더 이상 나를 강사로 부르지 않았다. 학생이 선생의 가르침에 대하여 자연과학교실이나 심지어 인문학 교실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신학에서만 일어나는 신앙의 희귀 현상이다.
그 후 감신 강의실에서도, 학생들이 화를 내거나 교실문을 박차고 나가는 경우는 없었지만 왜 ‘하느님’이란 명칭을 사용하며 ‘하나님’과 ‘하느님’의 차이는 뭐냐, 하는 질문을 강의 때마다 계속 받았다. 처음 몇 년은 한 30분 공들여 설명하다가, 최근에는 이 언어의 설명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나도 ‘하나님’으로 사용하고 있다. 당연 질문도 없어졌다. 우리가 경외하고 사랑하며 예배하고 고백하는 그분의 이름이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국어학적인 옳음을 말하다가 학생들의 경건을 손상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기 때문이다.
칼뱅은 “우리의 머리에는 단지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이 떠돌 뿐 참되신 하나님은 배제하게 될”[<강요>, I.13.2]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또 칼뱅은 삼위 하나님의 위격을 지칭했던 동서방 교회의 상이한 명칭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실로 나는 단순한 용어 때문에 완강하게 싸울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경건하게 이 문제를 다룬 고대의 교부들도 서로가 일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개인적으로 일관된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강요>, I.13.5]
아우구스티누스는 17-8년 동안 삼위일체를 밝히기 위해 밤낮으로 궁구했다. 하루는 꿈에서 바닷가에 한 소년이 조가비를 가지고 바닷물을 떠 모래 성 안에 힘들여 담는 것을 보고, 언제 바닷물을 모래성 안에 다 담을 수 있으며, 왜 그 짓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 때 소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밝히는 지적 작업이 마치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량없으신 은혜와 사랑을 주시는 그분에 대한 공통의 명칭이 필요하다. 그러나 다른 명칭을 사용한다하여 우리의 경건을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