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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의 길위의신학] 제3세계 성서신학자의 비애

차정식·한일장신대 교수(신약학)


출처 : 차정식의 신약성서여행 <바로가기 클릭>


▲차정식 한일장신대 교수
이런 얘기는 체면치레 차원에서 평생 발설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가난한 마음에 이끌려 몇 마디 내뱉어 본다. 
 
오늘 아침에 어떤 한국인 목사가 내가 미국에서 다닌 학교의 교수라는 명패로 보도된 기사를 읽다가 그것이 꼬투리가 되어 거의 10년 만에 신학대학원으로 다닌 먼 모교의 홈피를 들추어 보았다. 거기서 한 클릭 더하여 박사 공부한 학교 홈페이지도 둘러보았다. 
 
내가 다닐 때 알았던 선생들, 내가 배웠던 교수들이 많이 은퇴하거나 이직한 상태였다. 새 프로필 위주로 교수진을 훑었는데 그들의 대표적인 논문 저서 제목에 눈길이 닿았다. <하나님의 키스> “하나님의 얼굴과 눈맞춤의 에티켓”... 국내 성서학자들의 연구 성향에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주제였다. 그 연구들이 산출되기까지 그 학자들이 참조하고 인용, 분석한 자료들을 떠올리자니 은근히 암울한 박탈감이 스멀거렸다. 
 
링크된 동영상을 열어보니 내게 성서희랍어를 가르쳐준, 이제 백발성성한 여교수는 대학도서관에 소장된 마가복음 사본에 대하여 학창시절부터 품어온 로맨틱한 상상과 그로부터 빚어진 학구적 호기심을 토대로 그 사본의 진위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고 있었다. 
 
학문을 위한 학문이 마냥 사치스러운 망발처럼 취급받는 이 땅의 현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천진한 로맨티시즘의 상상에서 수십 년 품어온 지극히 사소한 학문적 관심을 공유하며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시카고대학의 학풍 저변에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풍성하게 깔려 있었다. 그렇게 써먹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섬세하고 치밀하게 갈고 닦아 음흉할 정도로 오래, 많이 축적해놓은 밑천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으로 그들은 별로 티내지도 않은 채 해외에서 몰려드는 유학생 물고기들을 대상으로 넓고 길게 지식의 어장을 관리하고 부양하며 써먹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예나 지금이나 ‘개론’과 ‘서론’에 머물면서 설익은 풋내기 지식을 써먹기에 급급한 것인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오래 묵은 지식의 기반이 부족하다 보니 풍문에 민감해져 종종 대중적인 논쟁거리도 ‘모’ 아니면 ‘도’ 식의 중세적 진리 논쟁과 심판으로 치닫곤 한다. 그러다 지쳐버리면 무언가 새것이 없는가 하여 다시 태평양 건너, 또는 유럽의 신학 선진국을 쳐다보며 해바라기의 모드로 진입한다. 이어지는 것은 우리 지식의 영원한 뿌리가 되는 그들의 원서를 다시 번역하고 이식하며 잡새가 봉황 따라가듯이 꾸준히 추적하고 추종하는 반복의 행보일 뿐이다. 
 
우리나라 식민지 시대에 지식인들이 일본 유학을 다녀와서 겪는 정신적인 균열 현상에 한 문학비평가는 ‘현해탄 콤플렉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데, 이제 이런 식으로 포장만 바꿔가며 되풀이되는 쉬임 없는 따라가기의 자맥질에 ‘태평양 콤플렉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까 보다. 
 
나는 10년간 시카고에서 유학했으면서도 배우고 익히는 만큼 애써 그 공부의 흔적을 지우려 몸부림쳐왔다. 그 디아스포라의 생존기간에 더럽고 아니꼽고 치사한 꼴을 적잖이 본 탓도 있었겠지만, 내가 짐 진 운명의 여정이 그들의 그 아늑한 도서관과 그곳에 풍성하게 축적된 자료와 별 상관이 없는 척박한 광야 같은 곳을 향하게 되리라 예감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한 번도 그 유학의 장소를 되찾아 선생들과 친밀하게 교류하지 않았고, 익숙한 선생이 지인을 통해 안부를 물어 와도 애써 못 본 척 외면하곤 했다. 
 
이렇게 한눈팔며 못 본 척 외면하는 것도 제3세계 성서신학자의 서글픈 생존전략이 될 수 있겠다 싶었던 건 나름의 사유가 있었다. 그들에게 유리하게 조성된 학문의 세계적 지형에서 아무리 따라가려 발버둥 쳐도 따라갈 수 없을 바에는 적당히 한눈팔면서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축적된 지식의 보물창고를 하찮게 여기며 소박하지만 창의적인 제 나름의 가로지르기 행보가 유효하리라 여긴 까닭이었다.
 
국내를 방문하여 이런저런 과도한 대접을 받는 이른바 ‘세계적인’ 신학자들의 행보와 여기에 줄서면서 눈도장을 찍고 기념사진 남기기에 급급한 국내 신학자, 신학도들의 풍경에 눈꼴사나웠던 기억도 한 가닥 작용했을 것이다. 
 
도대체 몰트만과 세계최대교회 당회장이 무슨 신학적 윤리적 상관이 있어 그렇게 소비적인 금품을 매개로 인터뷰를 연출한단 말인가. 판넨베르그나 타이센이 무슨 신통한 영력이 있어 그들의 신학에 대해 단 한 번도 오리엔테이션 받지 못한 한국교회의 회중들을 대상으로 이곳저곳 순회하면서 통역연설 한 건당 천 달러 이상의 사례금을 챙긴단 말인가. 바르트의 신학이 이 땅의 민중들이 살아가는 일상과 역사적 삶의 자리에 얼마나 정합성이 크기에 그를 기리는 행사에 그렇게 대단한 홍보 열기를 부추긴단 말인가. 
 
내가 몇 년 전 교수직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연구학기를 얻어 캘리포니아의 한 신학대학교에 방문교수로 갔을 때 그곳의 교수진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강연 요청은커녕 내 이름을 호명하여 단 한 차례 인사를 시킨 적이 없었다. 본교와 자매결연 맺은 학교였는데도 타인보다 더 비싼 거주비를 치르며 그 골방에 웅크려 책만 쓰다 되돌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 땅의 신학대학은 외국에서 교수 한 사람만 뜨면 총장실에 귀빈처럼 접대하고 과잉 레토릭으로 온갖 친절을 베풀면서 먹이고 퍼주기에 분주하다. 이런 비대칭은 뿌리 깊게 정착된 식민주의의 근성이 정서적으로 발현된 것처럼 보여 배알이 꼬이기 십상이었다. 내가 아무리 우리학교 전임 총장한테 ‘총장님이 이렇게 저자세로 굴신을 하니 이들이 더 기고만장하여 국내의 신학자들을 우습게 보는 것 아니겠냐’고 투덜거려도 그 정형화된 동방예의지국의 허접한 제스처는 교정되지 않았다. 
 
이런 관행이 단박에 바뀔 수 없는 현실에서 나는 국내의 신학자들이 ‘서론’과 ‘개론’의 연구에서 제 전공의 영역 깊이 잡다하게 침투하여 좌충우돌 모험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여 서양의 잘난 선진학자들이 건드리지 못한 자료를 찾아 땅을 파거나 먼지 쌓인 구닥다리 도서관을 탐사하여 낯설지만 참신한 논문을 쓰고 근사한 책을 내면 좋겠다. 영어가 힘들면 한글의 연구라도 두텁게 쌓아올려 그 양적 축적이 질적인 팽창과 도약의 길을 뚫게 될 날을 기약하면 어떻겠는가. 간혹 짬이 생기면 콩클리쉬라도 좋으니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열심히 떠벌리는 전투적인 학자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외국학회에 그저 유명한 교수들과 사진 찍고 무슨 말 하는지 구경 가기 위해 천 달러 이상 외화를 낭비하지 말고, 또 외국의 유명하다는 아무개들 초청하여 꿀 먹은 벙어리들 앞에 독백시키면서 만 달러 이상 외화를 탕진하지도 말자. 반대로 그동안 잃은 만큼 그 선진 벌판으로 뛰어들어 이 땅의 신학자들이 외화벌이에 나선다면 좋겠다. 
 
남들 타박 그만 하고 너나 잘 하라고? 그래서 나도 2년 후에 외화벌이에 나선다. 미국의 모 신학대에서 날 Luce scholar로 초청해주어서 그곳의 대학원생들 앞에 강의도 하고 교수들 앞에 뻘쭘한 논문 한두 편 발표하기 위해 지금 다시 열심히 영어 공부하고 있다. 본토의 테뉴어 교수와 달리 외국인 초빙학자를 한시적인 소모품이나 장식품으로 취급하는 일을 더러 보았고, 또 국내에서 맡고 있는 책임이 무거워, 처음에 한두 차례 사양했었다. 하지만 그곳 정교수의 연봉을 한 학기 내 봉사에 투여하겠다는 그들의 그 순도 높은 자본주의적 열정에서 나는 그 초빙의 외교적 진정성을 읽었다.
 
오래 쌓아두고 길게 묵혔다가 웅숭깊이 써먹는 노회한 서양의 선진신학자들에 비해 제3세계의 신학인들은 아직도 결론이 빤한 '개론'과 '서론'을 찍고 그 언저리를 배회하느라 분요하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도 다소 코믹한 ‘노아’ 논쟁과 ‘요나’ 논쟁으로 후끈한 열기를 달구고 있다. 또다시 옛 상처를 덧나게 하는 ‘망각의 역사’가 도지는 증상이다. 무슨 놈의 ‘~주의’가 그리도 만발한지 몇 마디 말에 딱지 붙이는 버릇은 6.25전쟁이 끝나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병통으로 지속된다. 여유만만하게 배움과 탐구를 무제한의 영역 속에 즐기고 학문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유영하는 꿈의 그 원형을 모사하며 흉내 내는 짓이라도 열심히 해보자.
 
확인 결과 그 한국인 목사는 내 모교의 정식 교수가 아니었다. 무슨 착오 또는 뻥이었거나 학교 소개란에도 나오지 않는 객원교수 내지 강사 신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겉껍데기 명패로 한 몫을 보려는 것은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별 차이 없는 여일한 현상이다. 내 제자가 최근 현지에서 공식채널로 검증한 바에 의하면 현재 한국의 신학대학에 전임교수와 강사 신분으로 독일 H대학 박사를 사칭하며 행세하는 두 사람이 있다. 그 깜냥으로 ‘개혁’ 운동 프로그램에 이름 걸치고 강연까지 한다. 
 
이렇게 가짜 박사에 표절 논문이 창궐한 이 땅의 학문 풍토는 오늘도 여전히 외화내빈의 처지에서 전전긍긍해야 하는 제3세계 성서신학자의 비애를 더욱 덧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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