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고사목지대 |
▲다비드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Morning in the Riesengebirge, 1810-11 |
▲다비드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Cross in the Mountains, 1808 |
이성부의 시집 『지리산』에 실린 <고사목>에 필이 꽂혀 읽고또읽을수록, 그 맛은 전혀 다르지만 독일 낭만주의 시대 대표적 화가 프리드리히의 <리젠베르크의 아침>과 <산위의 십자가>가 연상된다. 시인은 독특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1980년 신문기자였던 그는 그해 잔인한 5월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음에 절망과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가슴은 터질 것 같은 노여움과 서러움으로 술만 퍼마시다가 절필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해 10년간 남한의 백두대간은 80%쯤 오르고 지리산 등반을 100회가 넘게 하면서, 산이 그냥 산(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삶, 인간의 역사가 새겨지고 기록된 산임을 알게 된다.
시인이 어느 날 “바위의 맛”을 알게 되었다 하면서, “알맞게 햇볕을 받은 봄날의 바위표면은, 거칠기는 했지만 사람의 체온과도 같은 따스함이 있었다. 그런 느낌은 전혀 새로운 체험으로 내 속에 들어와 앉았다.” 바위에서 사람의 체온과도 같은 따스함을 느낄 정도의 교감이 일어나려면 얼마나 오랫동안 자연 속에 깊이 들어앉아 있어야 할까?
지리산에 있는 고사목지대는 그 산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들(최치원, 남명 조식, 김종직과 김일손, 빨치산 하준수, 정순덕, 이현상 그리고 최근의 고정희 시인에 이르기까지)이 형성한 고통과 恨을 지고 가는 십자가라는 생각이드는 것이다.
내 그리움 야윌 대로 야위어서
뼈로 남은 나무가
밤마다 조금씩 자라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밤마다 조금씩 손짓하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한 오십년 또는 오백년
노래로 살이 져 잘 살다가
어느날 하루아침
불벼락 맞았는지
저절로 키가 커 무너지고 말았는지
먼 데 산들 데불고 흥청망청
저를 다 써버리고 말았는지
앙상하구나
그래도 사랑은 살아남아
하늘을 찔러
뼈다귀는 뼈다귀대로 사이좋게 늘어서서
내 간절함 이토록 벌거벗어 빛남이여
-<고사목> 전문
시인은 뭘 그리고 그리다가 야윌 대로 야위어 뼈만 남았는가? 저를 다 써버려 뼈다귀만 남은 고사목에서 시인은 살아남은 사랑을 읽는다. 그 사랑의 온기로 인해 뼈만 남은 나무가 밤마다 조금씩 자라면서, 밤마다 조금씩 손짓한다. 하여, 이토록 내 간절한 그리움 벌거벗은 나무에서 빛난다. 지리산은 이 땅에서 숱하게 일어난 고통과 고난을 짊어지고 가느라 스스로 고사목이 되어가면서 십자가를 만들었구나! 자연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론>이후 범신론자라는 욕을 먹었다. 당신 범신론은 무신론과 동급이었기 때문에 목사와 신학자인 그에게는 치명적인 장애물로 작용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자연의 전통적 사상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인격성에 지나치게 경도된 신 이해는 자연을 배제하게 된다. 하여,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현존은 어찌 되는가?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은 자연 연관성, 자연의 유기적 체계와 부딪치지 않는다고 <신앙론>에서도 주장한다. 하여 그는 계속 범신론자라는 욕을 먹고 그의 신관은 비인격적이라고 또 욕을 먹는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원인성과 자연 연관성(자연의 체계)은 일치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 자신 제정한 질서를 상하게 하지 않는다. “자연연관성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결정하신 작품이다”. 하나님의 질서, 자연의 질서, 인간의 질서는 그 상세한 부분에서 자연과학(철학)에 의해 밝혀질 원인과 결과의 단일한 유기적 총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은 간접적으로 프리드리히의 그림에 영향을 미쳤다. 카스파르 프리드리히는 십자가를 성스러운 공간인 교회로부터 거대한 산, 즉 자연으로 옮겨놓았다. 독일 낭만주의적 기독교, 기독교 자연주의라 해야 할까. 카스파르의 그림은 풍경화인가, 기독교화(성화)인가? 틸리히는 낭만주의의 위대한 공적 중의 하나는 계몽주의의 도덕주의에 대하여 자연에서 은총을 재발견할 수 있는 성례전적인 감정을 재생시켰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개신교에서 크게 부족한 것 중 하나는 성례전적 감정과 성례전적 사고인데, 틸리히는 성례전적 사고란 “무한이 유한 안에 현존하고 유한이 무한의 명령을 따를 뿐 아니라, 그 자체 안에 구원의 능력, 즉 신적인 것의 현존 능력을 가질 경우에 한해서만 의미가 있다” 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낭만주의가 재발견했다고 강조한다.
사순절에 이성부의 <고사목>을 통해 지리산에 형성된 ‘고사목지대’가 자연의 생명-인간의 삶-생명의 하나님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골고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써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