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게테 호스텔Burguete Hostel 입구 |
▲부르게테Burguete 마을 중심 도로를 지나가는 순례자 |
▲순례자를 안내하는 표시, 은총의 조가비 |
하얀 벽, 초록색 덧창이 눈에 띄는 부르게테Burguete 호스텔을 지나 좀 더 올라가면, 도로 왼쪽에 아치형태의 회랑이 있는 부르게테 관공서 건물이 나타난다. 회랑을 마주한 플라타너스 공원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공원 뒤편 나지막이 자리한 프론톤 바르Fronton Bar는 순례자들의 달콤한 휴식처이다. 몇몇 순례자들은 이른 아침, 빈속의 허전함을 빵 한 조각, 커피 한 잔으로 채우고 있다. 프론톤 바르 옆에는 영혼의 쉼터인 성 니콜라스 교회당Iglesia de San Nicolás de Barii이 중세의 시간과 공간을 그대로 간직하며, 거룩한 소원 품은 순례자들의 무사한 여행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교회당 정면 꽃문양의 원형 벽감 가운데에 있는 둥근 시계는 우주의 중심처럼 보인다.
부르게테 마을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 도로 오른쪽 은행건물 옆 좁은 길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면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완만하게 뻗은 하얀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뒷모습이 서넛 보인다. 아름드리 푸른 나무들이 청청하게 오밀조밀 행렬을 이룬 이유가 있었다. 개울Rio Urrobi이다. 우리는 까미노를 여행하면서 수많은 강과, 냇물, 개울, 도랑을 건너게 되었는데, 그 모든 물길의 주변에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생명들이 가득함을 깨달았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시1:3)’ 찬송하였던 시인의 노랫말을 절로 웅얼거리게 하는 풍경이었다. 거룩한 시냇가, 생명의 시냇가에 근원을 두고 있어야 할 까닭이다.
▲회랑이 있는 관청과 플라타너스 공원이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당Iglesia de San Nicolás de Barii |
▲부르게테의 프론톤 바르Fronton Bar에서 휴식하는 순례자들 |
▲부르게테를 빠져 나가며 개울Rio Urrobi를 건너며 즐거워하는 순례자들 |
거센 물줄기가 들이닥쳐도 꿈적하지 않을 큰 바위 덩어리가 받치고 있는 빛바랜 갈색 나무다리를 건너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누런 소 떼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검은 비구름이 간간이 일어나지만,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는 기세를 꺾지는 못한다. 강렬하게 내리 비치는 햇살은 이 땅이 열정의 스페인 영토임을 잊지 않게 하며, 명과 암의 선명한 대비를 만들어준다.
마을을 뒤로하면 마을이 그립다. 그리움이 커질수록 소망은 가까워진다. 마을이 멀어질수록 마을이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집에서 멀어질수록 집에 가까워지는 이치이다. 등산용 지팡이를 양 손에 들고 스키를 밀어내듯이, 식물성 가지를 엮어 만든 멋들어진 모자를 카우보이처럼 쓰고, 구릿빛 건장한 다리로 힘찬 도약을 하며, 하늘과 산, 강, 들, 바람, 풀과 돌을 벗 삼아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의 행진하는 모습은 경건한 감동을 일으킨다.
어제 피레네를 넘을 때 다리를 절던 아내도 아직까진 괜찮아 보이고, 바이올린을 메고 가는 세빈이는 잔뜩 설레어 보인다. 훌쩍 뛰어 한 걸음이면 건널만한 작은 개울에도 견고한 돌과 바위를 이용해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길은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하고, 오르는듯하다가 내려가고 그러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되풀이한다. 햇빛을 피할 길 없는 들판을 가로지르고,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숲 그림자 속에 파묻히기도 한다. 단단히 다져진 흙길, 숲 속 자갈길, 검고 널찍한 블록모양의 돌길을 지나자, 파란 하늘, 초록산 아래에 펼쳐진 빨간 지붕선이 있는 에스피날Espinal 마을이 점점 가까워진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부르게테 근교 목장의 소 떼 |
▲여러 가지 마음으로 순례를 떠나는 나그네들 |
▲이불솜같은 하늘 구름이 걷히며 햇빛이 쏟아지는 까미노 |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데,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이 십수명이 모여 있다. 오전 10시가 다 되었는데도, 지난 주말 밤을 술과 함께 꼬박 지샌듯 몹시 취해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 중 몇이 알 수 없는 말로 가까이 오면서 비틀거리며 웃어댄다. 순간 긴장이 밀려오며 신경이 곤두섰다. 그 청년들 중에 하나가 다른 동무들을 제지하며 오더니, ‘서울에 가보고 싶다. 한국 소녀가수의 노래를 좋아한다. 한국 기업이 만든 전화기를 사용한다. 이렇게 취한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 는 말을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 가며 이야기한다.
스페인 시골 마을에서 ‘한류韓流’를 만났다. 비틀거리던 한 젊은이는 차를 몰고 어디론가 ‘휘’ 떠난다. 술 취한 젊은이와의 대화는 그렇게 유쾌한 것이 아니었지만, 무언가 불미한 일이 일어날 만한 상황이 그 청년으로 인해 소멸되었다는 직감이 스쳐갔다. 어느덧 마을 안쪽 교회Iglesia Parroquial de San Bartolomé 앞에 이르렀고, 흔들리던 청년은 격한 몸짓과 목소리로 “부엔 까미노Buen Camino!”를 외치며 우리 곁을 떠난다. 우리가 가야할 마을 방향 하늘에 구름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깨끗해졌다.(사진제공= 이대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