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경재] 영과 진리 안에서 배우는 기쁨과 은혜(요4:16-24)

김경재 목사(한신대 명예교수/ 장공기념사업회 이사장)

1. "학문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기장 여신도 교육원 봄학기에 등록한 주님이 사랑하는 모든 여신도님들에게 봄학기 등록을 축하드림니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공자의 말을 첫 인사구절로 택했습니다. 우리가 익히들었던  유명한 말입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동양의 정신문화 풍토 속에서 ‘학문공부’라는 것은 단순히 지식습득이 아님니다. 지성과 감성과 덕성이 혼연일체가 되는 살아 숨쉬는 지혜로서 지식을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적 지혜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한 배움은 한번 지식으로 듣고서 완성되는 것 아니고 시시 때때로 깊이 익혀야 제맛을 알고, 그 맛을 알 때 진정한 ‘기쁨’을 맛본다는 것입니다. 배운것을 익힌다는 말은 진리의 말씀을 다시한번 ‘새김질’하면서 깊이 음미하고 내 생명의 살과 피로 육화시킨다는 뜻입니다. 그 때라야 비로서 진리가 주는 기쁨과 자유를 향유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기장 여신도 전국연합회 기구안에 역사와 전통이 깊은 ‘여신도교육원’이 있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존경합니다. 기장 전국여신도회 24연합회 103지구회의 엘리트 중견지도자들이, 더욱더 능력있고 은혜충만한 지도자로서 자기 스스로를 연단하려고 어려운 시간의 할애, 경제적 사정 극복, 교통여건의 난관을 극복하고 이 자리에 모였다는 것 자체가 존경받아 마땅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학강연의 이 자리에서 왜 나는  여신도교육원에 등록하여 공부하려 하는가를 다시한번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전국 1,600지회에서 보다 유능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한 지도력 양성의 목적도 의미 있겠지요.  혼자서 성경을 여러번 통독하고 교회 신앙생활 수십년 하지만, 좀더 분명하게 알고싶은 지식욕의 충족 욕구도 의미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배워서 남을 가르치려는 지식증대나 나의 지식욕구 충족보다도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논어의 용어로 말하면 ‘학문을 배우고 익힘에서 오는 기쁨’이 일차적이어야  함니다.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영과 진리 안에서 배우는 기쁨과 은혜체험’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내 자신의 속 사람이 ‘영과 진리 안에서’ 깨달음, 거듭남, 자유로움, 감사와 기쁨, 보람과 봉사의 자발성으로 폭발하는 창조적 사건에 접하고자 하는 높은 비젼을 가져야 합니다. 
 
2. ‘영과 진리 안에서’ 배우는 기쁨과 은혜체험
 
무엇보다도  우리는 여신도교육원의 모든 교과 과정을 통해서 ‘생수’를 마시기를 원하며, 한번 마시고나면 내 마음  가슴깊은 곳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얻는 축복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고 익히려는  기독교 진리도 사람이 시도하는 학문적 노력인한, 일정한 학문적 방법과 지성의 논리적 합리성 훈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진리는 흔히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적 상상력이나 사회학적 분석연구나 자연과학적  실증지식으로서만 가지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진리는 ‘영과 진리 안에서’(in Spirit and Truth)만 가능하다고 증언합니다.  ‘영 안에서’란 말은 <성령의 내적 조명과 새롭게 눈뜨게하시는 은혜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평신도신학 공부도 엄연한 신학공부인데, 무릇 신학공부를 기독교 지식쌓기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루터 칼빈 정통신학체계를 배우고, 교리사와 교회사 지식을 쌓고, 요즘 새롭게 발전하는 성서분석학을 공부하고, 인간 목회상담학이나 선교학을 잘 배우면 신학공부를 잘한 학생이라고 착각합니다.  한국 교계에서 자신들이야 말로 ‘정통적 복음진리’를 정확하게 보수하고 ‘하나님의 근위병’임을 자처하는 보수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훈련받은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전도자들은 성경구절 지식암기에 박식하고 정통교리 신학에 정통할지라도 거기엔 ‘생수’도 없고 ‘다시 목마르지 않는 샘물 솟아남’이 없습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 이라는 20세기 대 사상가는 이러한 변질을 <생명의 복음을 교리지식체계로 왜곡시키는 오류>라고 갈파했습니다. 신학교에 우스개  소리로 전해오는 경고적 유머가 있습니다. “1학년 입학 땐 목사, 2학년 땐 장로, 3학년땐 집사, 졸업반 때 비신자 되어 졸업한다”는 것인데, 이 유머는 여신도 교육원생 우리들에게도 경고음이 됨니다. 여신도교육원에 입학하려고 서류내던 그 처음의 마음 곧 ‘호기심, 도전정신, 기대감, 순수한 기도하는 맘’이 중요합니다.  순수하고 열정적이던 나의 신앙이 몇학기 공부하는 동안 ‘말과 이론은 늘고, 순수한 신앙과 사랑의 열정’은 식어간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란 말입니다. 바르게 배우면 배울수록, 예수 사랑은 더 뜨거워지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 질수록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로움이 증가되어야 바른 공부입니다.
 
나는 새봄 새 학기를 시작하는 모든 여신도 교육원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이번 학기에도, 여러분의 공부의 진정한 목적은 ‘기독교와 성경에 관한 지식을 쌓아 교육원을 다니지 않는 지역교회 여신도들보다 지식적으로 우월감을 가지려는 ’지적 욕구‘에서 벗어나서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느끼는 갈증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고, 한발작 더 나아가 언젠가 부터인지 내 맘 깊은 곳에서 솟아나던 옹달샘 구멍을 막고 있는  삶속에서 생겼던 오물과 음식찌거기를 거둬내고 다시 퐁퐁 솟아나는 샘뭉를 되찾는 기회로 만드시기 바람니다.
 
3. “네가 남편이 없다는 하는 말이 옳도다”
 
사마리아 수가마을 샘터에서 일어났던  예수님과 한 여인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이름을 알리지 않는 익명의 ‘사마리아 여인’의 기구한 운명은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의 상징이기도 하고, 지난 오천년 한민족의 여인상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 보면 온갖 권력의 우상과 자본의 우상과 종교의 우상과 성차별의 우상과 사회관습의 우상이라는 무거운 질곡을 짊어지고 살아온 인류의 절반 35억명 여성들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공간적으로는 한 마을에서 주민들과 살지만 삶의 중심부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쉬는 시간  뙤약볕 비치는 한 대낮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홀로 물길러 와야하는 책임을 피할수 없는 ‘일만 하는 여자’였습니다. 분명히 야곱과 요셉이 먼먼 조상이라고 랍비들에게 들었지만, 정통유대인들은  ‘정상적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남자들도 그런 취급을 받았는데 가부장사회에서 여인은 이름도 없이 그저 흔히 우리들의 조선시대서민들의 어머니들이 그랫듯이 ‘꼬막네, 선천댁, 어쩌면 오거리 주막을 차리고 술파는 주모’같은 신세였습니다. 문자를 배우지 못했고,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전문 기술이나 고상한 옷도 입어본적 없습니다. 
 
그녀의 영혼은 한마디로 지쳤고 피곤했고 의미상실감으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야하기에, 정신없이 살아오느라 ‘자기가 정작 누구인지, 자신이 참으로 온몸과 맘을 다하여 한번 사랑하고픈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체 그저 달려왔습니다. 당장 소원이 있다면 “ 마을에서도 떨어진 이곳 샘터에 날마다 물 길러오는 일만이라도 아니하고 살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여인의 깊은 영혼의 갈증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서 난데없는 요구를 합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여인은 당황하고 화가 났습니다. “나는 남편  없는 년이에요!”. 예수는 도망치려는 여인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여인이여,  남편없다는 말도 틀린말은 아니지. 헤아려보면 지난날 남편이라고 다섯이나 있었지만 ... 지금 함께 사는 남정네도 남편이라고는 할 수 없지...”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훤히 알아마추는  귀신같은 점장이에게는 예나 이제나 완전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달나라에 우주선을 보내는 시대에도 서울 한복판엔  점쟁이 들이 성시를 이루는 것이지요. 사마리아 여인은 “어르신 용하신 선지자이신 것을 몰라 봤군요”라고 그녀의 닫힌 맘문을 열게 됨니다.
 
이 수가성 샘터 대화에서 “ 네 남편을 데려오라” . “나에겐 남편이 없어요”. “그래, 지난 다섯남편이 있어고고, 지금도 남편이라고 같이 사는 자도 참 남편이란 생각이 안들지”라는 이 대화를 좀더 영적 눈으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현대사회 특히 지난 50년 정신없이 잘살아보기 위하여 앞만보고 달려왔던 한국사회는 요즘 특히 중년 여성들의 우울증 환자의 급증과 노인여성 계층의 황혼이혼이라는 사회적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집에서 평생 전업주부로서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집에서 애만낳고 가사만 돌본것이 무능하고 바보같은 생각이 들도록 사회가 평범한 여성들을 정신적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부업알선 광고회사가 어느동네 마을버스 안쪽에 붙여놓은 광고문을 보고 나는 매우 화가나서 전화를 걸고 항의한적 있습니다. 그 광고내용인즉  “엄마, 엄마는 왜 맨날 집에만 있어!”라는 초등학교 자녀들의 질문이었습니다. 
 
커가는 자녀들은 아예 엄마를 대화상대로 여기지 않습니다. “엄마가 뭘알아!”. 중장년 여성에게 앙케트조사를 해본 결과 “아줌마!”라고 부를 땐 왠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고 ‘아주머니!’라고 불리울 때와 확실히 달랐다고 응답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한국 중년층이 특히 여성들이 “자기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으며 비유적으로 말하면 자기존재 전체를 바쳐 사랑할 만한 대상 <참 남편>을 찾자는 존재가 인간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남편’은 은유적으로 말하면 ‘궁극적인 실재나 가치의 상징’입니다. 참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듯이, 남편과 아내는 자기의 모든 것을 건내주고 건내받으면서 자기를 완성해가는 반려자입니다. 단순한 마을 깡패로부터 주막을 지켜주는 기둥서방이 아님니다. 단순히 생활비를 벌어다주는 경제동물이 아님니다. 남편과 아내는 단순히 성적 대상으로서 종족번식의 방편적 결합이 아님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잠정적으로 절대불가결한 그 무엇이듯이, 비유적으로 말하면 현대인에게 있어서 남편다섯은, 권력, 돈, 명예, 지식, 자식의 출세, 가문의  영광등 다양하게 분신합니다. 심지어 가장 성스러운 종교적 봉사 교회일도 남편임을 주장하면서 나위에 군림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느 그리스도인들은 이산 저산, 이도시 저도시, 예루살렘아니면 그림신산에  예배할 곳이 있다고 가족 재산과 자식교육과 온갖 것을 다바쳐 신흥종교 교주에게 갖다바침니다. 종파주의, 교파주의, 정통 비정통 시비와 논쟁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것들은 다 필요없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발견하고 그것에 최선의 열정을 쏟는 경험은 값있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되는것, 돈을 크게 버는 것, 석박사 학위를 따는 것, 남편이 목사와 장로가 되는것, 큰 교회당을 지어 헌당하는 것등등이 사람들에게 한 때 열정을 일으키게 함니다. 그러나, 그 추구하던 것이 성취가 되었을 때나 실패했을 때, 아니면 이런일 저런일을 다해보았는데도  어쩐지 내 삶의 깊은 내면은 텅빈것 같고,  어쩔 땐 정말 외롭고 쓸쓸하고, 어디에다 딱 뭐라고 호소할수 없는 답답함을 느낌니다. 사실은 현대인들은 그 느낌이 찾아올가 두려워, 더 바쁘게 뛰고 하던일을 앞만 보고 죽어라고 달리는 ‘일벌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게 하셨지 일하라고 태어나게 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 기독교의 확신입니다. 
 
폴 틸리히라는 20세기 기독교의  대석학의 충고를 다시한번 들어봅시다. 신앙생활엔 질문하고 생각하는 지성도 요긴하고, 가슴이 함께 뛰는 감성도 중요하고, 개인과 사회정의를 위한 윤리실천의 덕성도 긴요합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것은,  신앙은 지성과 감성과 도덕성을 넘어서는 것임니다. 신앙이 지성에 머물면 교리주의자가 양산되고. 감성에만 치우치면 심리적 과잉흥분상태를 은혜라고 착각하는  열광주의자가 되어 자신과 이웃을 모두 불태워 버림니다. 신앙을 도덕적 덕성이라고 생각하면 십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같은 교인이 될수는 있어도 어쩐지 그 사람 안에는 유머감각과 자유의 기쁨과 사랑의 희열이 부족함니다.  
 
영성은 인간의 지성, 감성, 도덕성을 온전하게 완성하면서 그것들을 더 높은 단계에로  초월합니다. 영성이 영글어지면 지성인은 더욱 지성적이 되고, 감성은 더욱 더 승화된 감성의 고양을 경험하게 되고, 도덕성은 율법적 멍애로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짐처럼 자발성과 기쁨으로 준행하게 됨니다.  진정한 성숙한 신앙인은 지성과 감성과 윤리적 덕성을 모두 갖추면서 식물의 속 씨앗이 영글어가듯이 전인적 인격의 영성이 성숙해가면서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가(갈5:20) 생활 속에서 나타납니다.  
 
4. 진정한 여신도 교육원의 교육목표는 ‘영과 진리’안에서 바르게 예배하고, 자기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서 ‘사랑하는 자유인’이 되는 것.
 
첫째, ‘영과 진리 안에서’(In Spirit and Truth)라는 말은 우리가 하는 복음적 신학공부는 사람두뇌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 성령의 은혜와  로고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의미함니다. 그래서 참 신학공부는 시원하고, 기쁘고, 황홀하기도 함니다.
 
둘째, 신학공부가 깊어져 가면, 이제까지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혔던 모든 형태의 우월감과 열등감의 폭력에서 해방을 경험합니다.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긍정하고 사랑하게 됨니다. 오늘의 나를 있게하신 모든 희생과 사랑에 감사하게 됨니다. 그렇게 변한 사람을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심니다. 
  
기독교는 한마디로 ‘중생의 종교, 거듭남의 종교’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모든 학식, 종교직분, 명예과 권력이 자기를 망치고 남에게 고통을 주는 독이 됨니다. 시장바닥 주먹대장 길선주와 최흥종이 목사로 변하고, 백두산 산골 청년 김재준이 교회를 개혁하는 신학자로 만들고, 놋그릇장수하던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세우고 3.1독립만세 운동을 선도하는 새사람이 됨니다.  눈동자 파란 처녀 엘리자베스 쉐핑으로 하여금 1920-30년대 한국의 마터 테레사로 변화시킴니다. 나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장공 김재준목사께서 경험을 통하여 확신을 가지고 말씀하듯이 “예수의 복음은 인간, 사회, 종교를 변혁시키는 혁명의 능력”입니다. 세상에서 통하고 중요시하고 당연시하는 가치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혁명말입니다. 그 새로운 혁명질서의 대표적 사례가 ‘자발적인 섬김의 자유’(막10:42-45)입니다. 앞에서 예든 인물들이 각각 일터가 다를 지라도 모두 ‘섬김의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공통입니다.
 
셋째, 그러므로 여신도 교육원의 마지막 목표는 ‘사랑하는 자유인’이 되는데 있습니다. 진실로 조건없이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한 자요, 진정한 자유인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공부가 깊어지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원한 님, 영원한 생명의 참 남편 예수를 구주로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더욱 사랑하게 됨니다. 예수를 사랑하면 자연히 예수가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을 준행하려는 열심히 생김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그리고, 마침네 ‘주님의 몸’이신 교회를 사랑하게 됨니다.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조직기구도 아님니다. 연약한 질그릇같은 인생들이 예수를 만나 모인 ‘회중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땅 위에 있는 사회적 기관 같지만 그 본질은 하늘에 속한 거룩한 신비입니다. 교회가 병들고 있습니다. 신음하고 있습니다. 양을 탈을 쓴 거짓 이리들에게 찢기우고 약탈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바로 치유하고 수리하는 21세기 성프랜시스와 성 클라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장 여신도 교육원에서  21세기 성프란체스코와  성클랄라가 많이 배출되기를 축원합니다.(2014. 3월. 기장 여신도교육원 개학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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