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Darsane, Christus am Kreuz, 1999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경당, <십자가상에서 웃는 예수님> |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조차 춤을 추신다. 십자가상에서 무아지경의 춤이라니...??(성경에 충실한 분들이라도 성경에 없는 얘기를 한다고, 그림과 조직신학은 인위적 조작신학이라고 꼬집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린다. 다 아니까요...)
나는 이 모습을 ‘부활한자의 십자가’라 칭하고 싶다. 기독교신학에서 십자가와 부활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래야 의미가 통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자의 부활'이고 동시에 '부활한자의 십자가'이다. 부활한자의 십자가는 웃고 춤추는 예수의 십자가이다. 기독교와 서양철학은 철저하게 죽여야 할 자아(self), 곧 죄인을 철저하고 줄기차게 말한다. 철학으로 말하면, ‘경험적 자아’ 배후에 있는 ‘선험적(초월적) 자아’를 그토록 난해하게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죄인이란 불신, 교만, 탐욕, 자기중심, 오만, 태만, 정욕, 거짓과 위선에 사로잡힌 자, 권력과 맘몬에 사로잡힌 자를 말한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죄의 지배하에 있는 내(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 2:20)함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요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니 춤추는 십자가의 예수, 웃는 십자가의 예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춤꾼들의 스승이라오
춤추시는 솜씨가 기막히다오
오른 쪽으로 도시고 왼 쪽으로 도시고
우리 모두 재치 있게 배워야 하오」
춤은 기독교 신앙을 신체화하고 지상화한다. 춤은 ‘지상화된 기독교’(Earthed Christianity)를 향한 발걸음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인간 경험의 모든 차원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특히 몸의 경험을 포함한다. 우리는 은총의 눈으로 인간의 온갖 종류의 몸, 아름다운 몸, 추한 몸, 섹시한 몸, 먹는 몸, 음악을 연주하는 몸, 춤추는 몸 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춤은 ‘신의 실천’(theopraxis)이다.
기독교는 2,000년 동안 읽고 쓰고 설교하는 것을 통해 초월을 가르쳐 왔고, 그것은 몸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벗어나 절대와 추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가 춤을 추게 되면 감각적 경험의 영역에 눈을 뜨게 되고 우리 자신의 몸의 생성의 리듬 안에서 그리고 그 리듬을 통해 초월이 달아나지 않고 수용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주님이 춤의 왕이요, “나는 춤이요 계속 춤을 출 것이라.” 하는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시드니 카터, <춤의 왕>(Lord of the Dance), 4절의 가사다.
높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
춤을 계속해 추기란 힘이 들지만
끝내 땅 속에 깊이 묻힌 이후에도
난 아직 계속 춤춘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 인도하련다.
그림은 발리 출신 화가 다르사네(Nyoman Darsane)의 <십자가상에서의 춤>이다. 그는 힌두교인이었으나 17살에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고 서양문화를 배웠으나 인도네시아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토착 문화적 기독교미술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화가가 되었다.
<십자가상의 웃는 그리스도>는 수년전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발표하면서 사용한 그림인데 작가를 모르겠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껄껄 너털웃음이라니......푸근하고 따스하다, 난 그때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원작가를 아는 분이 있으면 댓글을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