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귀절
이사야서 5:1-2, 5-7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노래를 해 주겠네. 그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 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다네.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이스라엘은 만군의 주님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아멘.
히브리서 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것입니다. 아멘.
마가복음서 12:1-12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어서,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때가 되어서, 주인은 농부들에게서 포도원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종을 잡아서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다시 다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때리고, 그를 능욕하였다.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더니, 그들은 그 종을 죽였다. 그래서 또 다른 종을 많이 보냈는데,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이제 그 주인에게는 단 한 사람, 곧 사랑하는 아들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그러나 그 농부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유산은 우리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죽이고, 포도원 바깥에다가 내던졌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와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랍게 보인다.`" 그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겨냥하여 하신 말씀인 줄 알아차리고,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아멘.
설교문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기쁜 일이 참 많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6월초가 되면 김포에서 호남으로 비행기를 타고가다 내려다 보이는 호남평야의 모습이 장관입니다. 가지런히 모가 심겨져 있는 논의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모내기를 하는데 동원되어 일을하곤 했읍니다. 줄을 치고, 허리가 아플 정도로 모를 심고, 반듯하게 심었는지 확인하면서 모내기를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을쯤 되어 또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면, 또는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넓은 평야에 황금물결로 넘실되는 모습 또한 멋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로 부자가 된 것 같습니다. 풍성한 쌀, 은혜가 넘치는 논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가을추수 때 이 논에 쭉정이가 많다고 하면 농부는 일 년 농사를 망친 것입니다. 흉년의 아픔이 일 년은 더 갈 것입니다.
그런데 유럽과 중동은 우리와는 달리 쌀농사 대신 다른 농사를 짓습니다. 포도 농사입니다. 쌀농사는 평지에 물과 햇볕이 풍부하면 되지만 포도농사는 평지가 아닌 언덕바지여야 합니다. 언덕받이 바람이 통하고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곳에 물이 공급되면 포도가 잘 자랍니다. 포도밭 광경 또한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입니다. 그래서 쌀농사를 짓던, 포도농사를 하던 아름다운 동산에서 마지막에 거두어들이는 알곡은 추수를 하는 사람의 목적 그 자체입니다.
성경말씀에 등장하는 상황은 중동의 유대 땅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쌀농사이야기가 아니라 포도농사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구약성경 본문에도 그래서 포도원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포도원을 만드셨는데 그 포도원 이름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입니다. 그 속에 포도원 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그 나무 이름이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유대사람입니다. 열매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그 축복의 이름은 공의로, 어떤 열매는 기쁨으로, 또 어떤 열매는 축복으로 되어있었읍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의 현실은 온데간데없고 공의로움이 아닌 타락이, 축복이 아닌 저주라는 쭉정이가 보입니다. 도대체 이 포도밭을 누가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느냐!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이 포도밭 이야기를 하면서 모든 백성에게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만들어진 이 나라가 둘로 갈라져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독립과 자유를 빼앗깁니다. 공의도, 배부름도 없습니다. 그리고 150 여년 후 남유다도 바벨론에 침략을 당합니다. 이후 앗시리아 제국 자체도 바벨론 제국에 점령당합니다. 이렇게 해서 전체 이스라엘이 이제 바벨론에 함락당합니다. 나라가 아예 없어졌습니다. 그 나라에 정신적 영적 주인인 하나님의 자리도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이름의 신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은 무력해 졌습니다. 세상살이는 더 각박해져 갑니다. 착취하는 사람, 억누르는 사람, 반대로 희생당하는 사람, 울부짖는 사람이 늘어갑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질책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팔레스타인 땅에 포도원을 가꾸고, 물도 주고, 햇빛도 주고, 바람도 주었는데, 왜 이렇게 쭉정이가 많으냐. 왜 공의로운 하나님의 사랑소리는 들리지 않고, 울부짖는 소리만 들리느냐. 누가 이 포도원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포도원의 노래"로 한탄과 울음을 토해냅니다. 하나님,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한 번 더 기회를 주셔서 우리가 포도 농사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시야의 외침입니다.
해마다 햇빛이 좋고, 물도 좋고, 바람이 좋을 때 수확된 포도와 그것으로 빚어낸 포도주는 최고급입니다. 그래서 포도주 병에 쓰여진 문안을 보시면 알겠지만 비싼 포도주를 빈티지 와인(vintage wine)이라고 합니다. 이 와인은 몇 배나 더 비싼 값을 받습니다. 우리 한국에서 나오는 쌀 중에서도 공기 맑고, 물 좋은 곳에서 나는 아주 좋은 쌀은 "빈티지 쌀"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명품 포도주가 있는 것처럼 명품 쌀도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하나님도 매년 추수 때 빈티지 와인을 만들 수 있는 좋은 포도였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포도가 명품은 커녕 쭉정이입니다. 포도농사가 흉년입니다. 농사가 흉년이면 사람의 마음도 흉년이어서 흉융합니다. 자유도, 정의도, 사랑도, 그리고 평온도 없습니다. 이사야가 나서서 호소를 합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예배 받으실 장소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종교가, 그런 성전이 흉흉한 것입니다. 포도만 알맹이가 없는 게 아닙니다. 신도, 도덕도, 윤리도 없습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절 그 땅이 그랬습니다.
이제 마가복음의 본문에서 무대가 예수님 시절로 옮겨집니다. 예수님이 이사야의 포도원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당시의 포도원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비유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포도원을 만드시고, 나무를 심었다. 추수 때마다 추수를 잘해서, 포도를 잘 소출해 내어서 우리 다 잔치를 베풀고, 먹을 수가 있다. 그런데 포도농사의 풍년으로 농장 주인은 소출의 이익을 받기 위해 사람을 보낸다. 그런데 농장에서 일한 소작농들은 자신들이 모든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 주인이 보낸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죽인다. 주인은 결국 자신의 아들을 보내면 죽이지 않겠지 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낸다. 그러나 주인의 예상과는 달리 주인의 아들마저 죽임을 당한다. 무슨 포도원이 이러냐, 무슨 나라가 이 꼴이냐? 하면서 주인이 통탄해 한다. 그러시면서 마지막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들은 살려놓았어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 그 주인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자신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 성 밖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 죽임당하심은 바로 건축가 이야기와 관련이 있게 서술되어 있읍니다. 옛날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때 임명한 건축가들이 성전건축에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돌은 밖에 버립니다. 그런데 나중에 돌이 모자라 버린 돌중에서 쓸 만한 돌이 있어 그 돌을 가지고 성전 입구의 문을 만들었고, 모퉁이의 주춧돌로 만들었답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건축가들이 버린 돌이 성전의 주축둘이 되었다는 말씀이 금언처럼 전해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시편에서 인용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간증하러 왔더니 사람들이 나를 죽이고, 예루살렘 성 밖에 버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 밖으로 쫓겨나 "해골"이라는 "골고다" 언덕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건축가가 버린 돌이 나중에 다시 모퉁이의 기둥이 된 것처럼, 나 예수는 너희들이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죽이고 버렸지만, 하나님은 버림 받은 나를, 죽임당한 나를 앞으로 다시 일으켜서, 부활시켜서 옛날 포도원이 아닌 새로 만든 포도원의 주인이 되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밖에 쫓겨나 버림받은 예수, 거기서 십자가에 죽임당한 예수, 그 예수를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이 아닌 온 세계라고 하는 새 하늘 새 땅, 예루살렘이 아닌 새 예루살렘이라 이름하는 곳에 새 포도원을 만드시고, 거기 포도원에 세워진 새로운 건축물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새 건물이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컨데 우리 경동교회를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주축돌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율법주의에서 쫓겨나 해골의 언덕인 골고다에서 죽임당한 그분을 우리는 경동교회 주축돌로 삼았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타락하지 말라. 학대하는 자의 포악함이 없도록 해라. 당하는 자의 울부짖음이 없도록 해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바람, 물, 공기, 온갖 은혜를 먹고 쭉정이 포도는 내지 말고, 알차게 열매를 맺으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포도원을 주셨습니다.
새 하늘, 새 땅, 그 하늘과 그 땅의 주축돌은 옛날 땅과 예 하늘이 무시해 버린 버려진 돌과 똑같습니다. 옛 세상은 십자가에 죽으면, 골고다 언덕에서 쫓겨나면 그것으로 역사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신의 뜻을 모르는 인간들이 자기 죄를 모르고 던져버린 돌을 하나님은 새 하늘, 새 땅의 주춧돌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을 모시지 않으면, 그 하나님은 전혀 다른 이방사람들을 통해, 죄인들을 통해 새 하늘 새 땅의 주춧돌로 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 과정에는 괴로움도, 힘도 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사람이 억울하게 고소당합니다. 구타를 당하며, 끌려 다닙니다. 종국에는 예루살렘 성 밖으로 쫓겨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힙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십자가 위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조소까지 당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수난으로 생각한다면 수난의 정도나, 수난의 넓이나, 수난의 깊이는 상상 할 수가 없을 만큼 큽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신 그분은 이 예수를 어떻게 하셨나요? 단지 수난에 빠져 죽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수난에 지지 말아라. 십자가 죽음의 수난을 딛고 일어서라. 그것에 매몰되어 죽지 말고, 죽음을 딛고 일어서라". 부활은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기쁨은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온갖 종류의 수난이 있습니다. 유혹이 있습니다. 각 각 다 성격은 다르겠지만 수많은 아픔, 고난, 수난과 유혹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기에 부딪혀 그냥 도망가시겠습니까? 걸려 넘어지시겠습니까? 수난을 발로 차봐야 발만 아픕니다. 수난은 발로 디디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수난과 아픔 그리고 힘든 것은 발로 차면 발가락이 깨집니다. 그러니 차라리 그 수난을 밟고 일어서야 합니다. 수난은 걸림돌이 아닙니다. 디딤돌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하나님이 새로운 머릿돌이 되셔서 새 세계를 이루어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주십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에게는 종족, 역사를 가리지 않고 머릿돌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물론 이 말은 유대사람이 아니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옛날 유대사람들의 사고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방인들이라도 하나님의 아들을 구세주로 믿고 의지하면, 포도열매를 거두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주십니다. 단, 새 하늘, 새 땅에는 옛날에 알지 못했던 유대인들아 와라. 누구라도 와라, 그렇게 부르십니다. 새 하늘, 새 땅을 만들자고 하십니다. 이것이 열린사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수난절을 지나면서 우리가 꼭 기억할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준 수난을 우리가 버릴 수 없습니다. 피할 수도 없습니다. 받으셔야 합니다. 발로 차지 마세요. 딛고 일어서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미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수난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수난을 딛고 일어서서 부활절 아침을 기다립시다. 오늘 예수님 목적은 이것입니다. 나와함께 수난의 길을 가자.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 알고나가자. 어디에서 수난이 멈추는지 알고 가자. 어디서 끝날지 알고 가자. 부활절 아침에 끝난다, 그러면 그것을 기리면서 가자. 그런 말씀입니다.
최근에 신문보도를 통해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인구가 800만 명 정도인데, 그 중에 강경한 보수주의적인 집단인 하레딤 유대인의 수가 전체 인구의 10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하데림 유대인은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 주로 동구라파에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지금의 이스라엘로 이주해 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정부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위해서 인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는 하레딤 유대인들을 회유하며 함께하자고 제안합니다. 이 제안을 통해 하레딤 유대인들은 세금면제, 징집면제, 그리고 노동없이도 연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스라엘 전체 인구가 줄어들고, 하레딤 유대인의 자연출생율이 증가하면서, 이제는 하레딤 유대인들에게도 징집을 하는 징집법이 의회인 크네세트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이 법을 통해 2017년까지 하레딤 족의 60 까지를 징집하고, 그 다음부터 3년까지는 계속적으로 확대해 100 징집을 하자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 예수님은 누구나 하나님의 축복을 똑같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의무도 행사해야 합니다. 풍성한 포도와 쌀을 함께 농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나눠 먹어야 합니다라고.
오늘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이름하는 경동교회와 한국교회와 온 세상 나라를 선물로 주마. 당신들이 살아 있는 온 세상은, 새 하늘, 새 땅의 머릿돌이 누구인지 기억해라. 머릿돌은 세상이 버린 돌이다. 하나님이 그 돌들을 다시 모아서 주춧돌로 삼으신다. 우리의 주축돌은 십자가에서 달리신 하나님, 수난 당하신 나 예수다라고. 여러분, 그의 수난은 우리가 딛고 일어서라고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채이지 마시고, 십자가를 딛고 일어서서 부활의 은총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수난을 헤쳐가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부활이 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스라엘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만 듣고 자신이 잘 사던 동네를 떠났습니다. 자신의 본향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떠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미래지향적입니다. 믿음은 현재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향도 떠날 수 있는 결단입니다. 믿고 가면 혹시 가는 중에 십자가가 있더라도 십자가 다음에 부활이 기다리고 있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미래를 향한 결단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람들이 축복이 좋아서 호의호식 하다가, 고인 물처럼 앉아서 썩었습니다. 떠나야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어느 한 곳에만 영구적으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온 우주 공간에, 하나님이 가라하시면, 그곳에 젖과 꿀이 흐르는 공간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민족도, 국가도, 우리 사고방식도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 밭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면 떠나십시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에 매몰되지 마십시오. 썩습니다. 안됩니다. 이스라엘을 보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이고, 새 하늘 새 땅에 동참하자. 그 과정에 있는 모든 고난은 부활을 향한 생산의 과정이다라고요. 좋은 약이 입에 쓴 것처럼 생명의 약은 입에 쓰겠지요. 그러나 그 쓴약을 먹고 생명을 얻읍시다. 오늘 우리 사회에 아픈 곳이 많지요? 많지만 다시 한 번 결단합시다. 초심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의 부활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갑시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격려와 분부의 말씀입니다. "이 길을 나와 함께 가자. 부활의 그날까지!". 이 길을 함께가시려는 여러분모두에게 주님의 크신 축복이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